고대로부터 수많은 종류의 레저와 스포츠가 인류와 함께 있어왔지만, ‘등산‘이라는 개념은 그 역사가 230여 년에 불과하다. 바로, 동상의 주인공 두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자크 발마의 몽블랑등정이 인류 최초의 등산으로 기록되고, 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소쉬르였다. - P28

당시만 해도 산간 오지에 불과했던 샤모니를 식물 채집차 방문했던 소쉬르는, 해발 2,526미터의 브레방에 올랐다가 넋을 잃었다. 샤모니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거대 설산의 위용이 혈기왕성한젊은이의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은 것이다. 해발 4,807미터의 봉우리에 일 년 열두 달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던 무명의 설산은, 소쉬르와의 이 만남을 통해서 ‘하얀blanc 산mont‘, ‘몽블랑‘이라는 고귀한이름을 얻었다. - P30

몽블랑 등정의 베이스캠프이자 인류 등반 역사의 메카나 다름없는 샤모니Chamonix Mont-Blanc, 이 소도시의 중심지인 파카르 거리와 발마 광장에서 3인 영웅의 자취를 느껴보며 몽블랑 트레킹을 시작한다. 알프스 여러 산들과 함께 그 둘레를 한 바퀴 돌아 십 일 후다시 이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 P34

1786년 어느 여름날, 마침내 그들은 1박 2일 동안의 사투 끝에 몽블랑 정상에 섰다. 오늘날과 같은 산행 장비와 과학도구 같은 건 있지도 않았던 시절의 설산 등반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에 맞선 도전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산한 그들은 전 유럽의 영웅이 되었다. 악마도 없었고 인간이 오를 수 없는 곳도 아니었음을 입증해낸그들이었다. 태고 이래 인간의 발길을 허용치 않았던 몽블랑 속살이두 사람에 의해 베일을 벗었다. - P32

TMB는 레우슈에서 시작하여 레우슈에서 끝난다.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 수도 있지만,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방식이 좀 더보편화되어 있다. 열한 시십분에 샤모니를 출발한 버스는 십오 분후에 레우슈의 벨뷔 Bellevue에 도착했다. 꽃과 화분으로 장식된 거리와 형형색색의 이삼층 목조건물들이 어울려 아름다웠다. - P39

가끔씩은 도중에 마을을 만나 점심거리를 사 먹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숙소 떠날 때 샌드위치나 간식 등을 준비해가는 게 맞을 것이다. 점심은 가볍지만 아침은 토스트와 시리얼과 우유와 과일등으로 든든했고, 오늘 저녁도 어제처럼 충분하고 만족스런 성찬이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행을 더 많이 즐기기 위한 필수 요소들 중맨 앞에 둬야 하는 것, 매일매일 잘 먹어야 하는 일 아니겠는가? - P77

세이뉴 고개에 그 많던 트레커들이, 이탈리아 땅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거의 보이질 않았었다. 엘리자베타 산장Refugio Elisabetta에 들어와보니 언제 다 이리로 모였는지 온통 북적거린다. TMB 종주는 시계방향이건 반대방향이건 큰 차이는 없다. 산장에 모여든 이들 중 절반은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오늘 쿠르마예르를 거쳐 왔고내일 아침 세이뉴 고개를 오르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 P122

첫날 레콘타민의 호텔에서는 욕실 딸린 2인실에서 럭셔리하게 일박 했고, 그제 크로와 뒤 본옴므 산장에서는 2층 침대 두 개있는 도미토리 4인실이었다. 지난밤 엘레자베타에서는 5인용 침상의한가운데 자리였다. 여행 중 어떤 유형의 불편한 잠자리에도 익숙하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간밤은 잠이 들 때까지 다소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5인용 침상 자체가 비좁았고, 양쪽에서 들려오는 곳소리와 이 가는 소리 때문이었다. - P123

뭔가에 대해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하던 사람들이 누군가 한명의 결단에 용기를 얻어 그를 따르게 된다. 그렇게 앞선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 부른다. 내 앞에 여성 네 명을 이끌고 있는 남성 한 명이 오늘 아침 저 삼거리에서의 리더였다. 그가 외친 ‘렛츠고‘ 한 마디에 그의 일행 넷은 물론 나까지 따라나섰고 내 뒤의 여럿도 뒤를따르고 있다. - P129

저녁 여덟 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 자리에는 이십여 명의 투숙객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절반 정도 됨직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특유의 쾌활함으로 전체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6인실 탁자인 우리 자리에는 네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합석했는데, 안 박사의유창한 영어 솜씨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 P152

안 박사가 식탁에 늘어놓은 진미오징어포가 그들 입맛에 맞았는지 인기가 높았다. 실내에 유일한 동양인 둘이 주목을 받은 건지 옆자리 여기저기에서도 오징어포를 요청하는 소리가 나왔다. 안박사가 방으로 돌아가서 아껴두었던 오징어포 두 봉지 전부를 배낭에서 가져와 옆자리 세 군데에 골고루 풀었다. 한 자리에서 시작된박수가 식당 전체로 이어졌다. - P-1

같은 길을 걸어와 한 숙소에 묵는 트레커들 모두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아보는 경험도 짜릿한 것이었다. 삼일치 오징어포는 아깝게도 모두 소진되어버렸지만, 안 박사 배낭에는 북엇국 수프나 견과류 등 국내에서 준비해 간 먹거리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노련한 후배와 동행한 덕택에, 혼자 여행할 때 소홀히 했던 우리 먹거리를 즐기는 호사도 누리고, 서양인 트레커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영광도 함께 누리고 있다. - P-1

"벤베누토!"
스위스에서 온 그들도 알아듣고는 즉시 화답이 왔다.
"벤베누토! 벤베누토!",
부지런한 안 박사는 얼마나 일찍 도착했는지 돗자리까지 펴고 그 옆에서 버너에 물을 끓이고 있다.
"상무님, 라면 두 개와 햇반 하나 꺼내셔요. 배고파요."
안 박사 옆에 놓인 깻잎 통조림 한 캔이 위액을 자극했는지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 P163

어떻게든 저 빙하 옆까지 도로 내려간 다음 엘레나로 돌아가서 차를 불러 스위스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때 두 사람의 남녀가 나타났다. 빙하 앞에서 아이젠을 차는 모습이눈에 들어왔고 남자가 먼저 성큼성큼 빙하를 건넜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가차없이 미끄러져, 아득해 보이는 계곡 밑으로 추락할 것같은 위험구간인데도 말이다. - P183

엘레나 산장으로 돌아가서 차를 타고 스위스로 넘어간다는건 TMB 종주라는 당초 목표를 포기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고개 정상에 올라 나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안박사도 문제였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은 아이젠 없이 빙하를 건녔고, 오 분도 안 된 어느 순간 나는 빙하 건너편에 주저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TMB 십일 중 가장 많이 겁먹은 날이었다. - P186

멀리 산 능선 경사진 초원에 울창한 나무숲을 배경 삼아 띄엄띄엄 앉아 있는 목조 가옥들은, 영화나 사진 속에서 언젠가 보았을스위스 목장마을의 정경 그대로이다. 이국적 정경을 만끽하면서도몸과 마음은 우리 동네 뒷동산을 거니는 것처럼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긴장이 풀어진 상태로만 계속된 건 아니다. 절벽 중턱으로 난 위험한 길을 이백여 미터 건너는 구간에서는 조마조마했다. 한 사람만지날 수 있는 좁은 길에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절벽 아래로무참한 추락이었다. 먼 길 여행 중에는 마음이 너무 느슨해질 때를스스로 경계하라고 조용히 타일러주는 구간이었다. - P206

여행 중에서의 사진 찍기는 오년 가까이 몸에 밴 하나의 버릇, 무의식적 습관이 되어버렸다. 여행이 끝난 후, 찍어둔 사진을 한장씩 넘겨볼 때면 그 사진을 찍었을 당시의 상황이나 느낌들이 소상히 떠오른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은 수첩 한 페이지의 메모량과 같다는 믿음이 언제부턴가 확고해졌다. 하루 종일 찍은 사진들은 그대로 그날 하루의 일기나 다름없다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 P208

‘저렇게 큰 배낭 지고 굼벵이 같이 기어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
제비는 제비 나름의 삶이 있고, 토끼는 토끼 나름의 즐거움이있듯이 굼벵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P223

어쨌거나 오늘은 TMB 종주 열흘 중 가장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산을 두 번 넘어야 하고, 두 번의 해발고도 차이를 합치면2,000미터에 가깝다. 한라산 백록담을 하루에 두 번 오르고 내리는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샹펙스 앞에는 해발 2,814미터의아르페트 산Clochers d‘Arpette이 놓여 있고, 발므 고개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 P223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요?"
"이 산 내려가면 배낭 운반해줄 데 있나 찾아보자."
"그럴까요?"
"내일 락블랑까지 가려면 오늘 힘을 좀 남겨두는 게 맞겠어"
말로는 ‘내일을 위한 거‘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는 오늘 당장의문제였다. 해발 700미터를 내려간 후 발므 고개까지 다시 900미터를 치고 오르기에, 지금 내 상태로는 아무래도 힘이 부칠 것 같고자신도 없어진다. - P230

‘십 일 안에 TMB를 종주한다‘와 같은 여행의 어떤 ‘목표‘라는건 이렇듯 ‘자유‘에 대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성취를 위한 동기부여의 의미가 더 중요하긴 하다. - P238

시간은 이미 여섯 시 반을 넘기고 있다. 어서 빨리 안 박사와만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하산길은 눈밭이없어 다행이었고, 인적은 없었지만 험하진 않았다. 완만하게 펼쳐진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흙길을 총총걸음으로 내려갔다. 발므 산장에 도착해 배낭을 내릴 때만 해도 더 이상은 못 걸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람의 몸에는 비상 에너지라는 게 어딘가에는 반드시저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 P243

이십여 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몽블랑 여정을 다 마쳤다는 나름대로의 감동이나 감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어서 빨리 샤모니 숙소 알펜로제에 도착하는 것이다. 조금있다가 한인 민박집에서 마주할 저녁밥상 메뉴만이 머릿속을 가득채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일한 된장찌개, 그리고 돼지고기 볶음과 상추, 게다가 절대 빠져선 안될 푸짐한 김치. 입안 가득 군침이  고여오고 어디선가 샤모니행 버스가  도착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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