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입니다! - 만년필 사용자를 위한 입문서
박종진 지음 / 엘빅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만년필 에세이 2] 내 책상 위의 만년필 2
- 쉬는 만년필도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나는 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 이야기를 했다.

사진만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 가진 만년필은 저게 전부인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은 언제나 일부일 뿐이다.

사용하지 않는 만년필들은 따로 보관함에서 쉰다. 나무 보관함도 있고, 오래 아껴 온 만년필들을 넣어 둔 보관함도 있다. 뚜껑을 열면 각자 제자리에 누워 있는 만년필들이 조용히 쉬고 있다.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들이 현역이라면, 보관함 속 만년필들은 잠시 휴식 중인 셈이다.

한동안 책상 위에서 함께 지내던 만년필들은 보관함으로 들어가고, 대신 다른 만년필들이 나온다.

나는 혼자서 이걸 ‘교대‘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같은 만년필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 심심해진다.

만년필이 싫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녀석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보관함을 연다.

오늘은 누구를 데려올까.

뚜껑을 열고 한 자루씩 바라보다 보면 예전에 자주 쓰던 만년필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이번에는 네 차례다.‘

그렇게 다시 책상 위로 나온 만년필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갑다.

물론 늘 반갑게 인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관하기 전에는 잉크를 비우고 세척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사람 일이 늘 그렇듯 가끔은 깜빡한다.

‘다음에 또 쓰지 뭐.‘

하고 잉크를 채운 채 그대로 보관함에 넣어 둔 만년필이 하나쯤 생긴다.

몇 달 뒤 그 녀석을 다시 꺼내 보면 역시나 쉽게 써지지 않는다.

종이 귀퉁이에 선을 몇 번 그어 보고, 휴지에도 대 본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다.

세면대로 직행이다.

따뜻한 물을 조금 틀어 놓고 펜촉을 씻어 준다.

살살 마사지를 해 준다.

한참 그러고 나면 굳었던 잉크가 조금씩 풀린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종이에 첫 획을 그어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잉크가 흘러나온다.

그럴 때면 괜히 웃음이 난다.

˝인자 됐네.˝

만년필은 저마다 성격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일본 세일러 만년필은 참 부지런하다.

프로기어 화이트 로즈골드에 사쿠라모리 잉크를 넣어 두고 정말 깜빡한 채 거의 2년을 보관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야 생각나 꺼내 들었는데 얼마나 부드럽게 써지던지.

‘워매... 스케이트여. 스케이트.‘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반면 파카 듀오폴드 핀스트라이프는 내 것만 그런지는 모르겠다. 조금 오래 두었다 쓰면 잉크 흐름이 박하다. 첫 획부터 시원하게 나오질 않는다. 몇 번이고 달래 줘야 그제야 제 모습을 찾는다.

몽블랑은 대체로 든든한 편이다.

엊저녁에는 어린왕자 여우 시리즈 르그랑의 뚜껑을 열어 둔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이고, 내가 미쳤구나.‘

싶었다.

하룻밤 내내 뚜껑이 열린 채 있었으니 당연히 안 써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종이에 대 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술술 써 내려간다.

혼자 피식 웃었다.

‘역시 너는 믿음직하구나.‘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쓰고 있는 만년필들의 이야기다.

같은 모델이라도 사람마다 경험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만년필이 너무 많지 않으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책상 위에 있는 몇 자루만으로도, 아니 한자루로도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다른 만년필을 꺼내는 이유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금 다른 기분으로 글을 쓰고 싶어서다.

사람도 매일 같은 옷만 입고 살지는 않는다.

기분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 나는 그날의 마음에 따라 만년필을 바꾼다.

그렇게 교대를 마친 만년필들은 다시 책상 위에서 한동안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자를 쓰고, 시를 필사하고, 메모를 남기고, 또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다.

그러다 다시 보관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만년필이 책상 위로 나온다.

내 책상 위의 만년필은 그렇게 조금씩 얼굴을 바꾸며 오늘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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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테스트-미로관의 살인......인가? 흐음, 사상 최대의 현상 공모라, 역시 미야가키 선생님이셔. 멋진 표현이야."

스자키 씨, 기요무라 씨, 후나오카 씨, 하야시 씨가 쓸 방에는 모두 같은 기종의 워드프로세서가 놓여 있습니다. 문서 보관용 플로피디스크가 세 장, B5 인쇄용지가 5백장, 장비 매뉴얼을 비롯한 기타 필요한 물품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겁니다만 혹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방 배정은 아시다시피 이렇게 복잡한집이라 그림으로 그려 복사해두었습니다."

고용주의 ‘유언‘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굳센 의무감이 빚어낸 행동거지일까? 아니다. 단순한 직업 의식만으로는 이토록 냉정하게 대처할 수 없으리라. 거기에는아마 미야가키요타로라는 특이한 작가의 취미와 성격, 버릇(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일종의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게 틀림없다.

구로에 다쓰오가 돌아가자 이노가 현관문을 잠갔다. 그리고 현관에 있는 홀과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을 가르는 격자문에도 자물쇠를 채웠다.
뒤이어 손님들이 해야 했던 일은 내일부터 6일까지 잡혀 있는 각자의 스케줄 조정 작업이었다. 한동안 넓은 홀에 딱 한 대 있는 전화기는 주로 도쿄로 거는 시외전화로 몸살을 앓았다.

A4 용지에는 이 저택 평면도가 그려져 있고, 각 방의 이름과 배정된 사람의 이름이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우타야마의 방은 ‘포세이돈‘, 게이코의 방은 ‘디오니소스‘. 둘 다 동쪽에 있으면서 이 넓은 홀에서 가장 가까운 방이었다.

"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원래 이 손바닥에는 테세우스에게 건네는 그 실꾸리가 놓여 있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군요. 하지만 이건 실꾸리를 건네준 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흐음, 건네준 뒤라.......

"아, 제가 내일 차를 가지고 쇼핑하러 나갔다 올 겁니다. 여러분, 필요한 물품을 오늘 밤 안으로 메모해 제게 건네주십시오. 한꺼번에 구입하겠습니다. 그러면......!

미로 부분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나머지 공간을 열한 개의 방이 채우고 있다. 동쪽에 네 개, 서쪽에 일곱 개. 이런 방에도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각각 신화에 등장하는인물들의 이름이 붙어 있고, 평소 가도마쓰 후미에가 쓰는 ‘폴리카스테’가 주방에서 출입할 수 있다는 점을 예외로 치면 어느 방을 찾아가더라도 가운데 있는 미로를거쳐야 하다. 그래서 모든 방에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배려였다.

지상에 있는 현관에서 계단, 그리고 넓은 홀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건물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중간에 아주 넓은 미로 부분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응접실인 ‘미노타우로스‘가 있다.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도서실과 오락실이 있는데, 각 방에는 미노스 미궁을 함께 설계한 ‘에우팔라모스‘와 ‘다이달로스‘의 이름을붙였다. 미노스 왕의 이름을 지닌 주인의 서재와 침실은 도서실인 ‘에우팔라모스’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흐음. 이상하군, 이 오른손 모습이."
시마다는 브론즈 상의 오른손 부분을 슬쩍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뭔가를 손바닥 위에 얹어 내미는 느낌이 드는군요."

청년, 여성, 노인, 짐승...... 모두 다른 얼굴이었지만 그 가면들의 흰 눈은 희미한 조명 때문인지 전부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미로의 길표시 대신 써라"라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그다지 기분 좋은 장식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말이야, 이 복도를 걷고 있으니 왠지 여기저기에 뭔가 숨어 있는 느낌이 들어서 아주 기분이 께름칙해. 저 가면만 해도...... 안 그래?"
복도 벽에는 여기저기 흰 석고 가면이 걸려 있었다.

"으음, 내 방은 ‘코카로스‘. 이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져야 하나? 코카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아십니까?"
"시칠리아 섬의 왕 이름이죠. 미노스 왕으로부터 도망친 다이달로스를 보호해줍니다."

"미궁 속에 사는 괴물을 쓰러뜨린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크레타 섬에서 빠져나왔어. 그 뒤에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버림받는데, 그때 디오니소스가나타나서 아리아드네를 아내로 삼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지."

"아, 우타야마 씨 방은 그쪽입니까? 아하, ‘포세이돈‘인가? 미노타우로스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로군요."

"왠지 저 방에 미야가키 선생님 시신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우타야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상식을 벗어난 상황 전개로 인해 깜빡 잊을 뻔했는데...... 그렇다. 그게 현실이다.

미노스 왕의 왕비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으로부터 선물받은 흰 수소에 대해 품은 비정상적인 애정의 결과로 기형적인 왕자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되었으니까.

요 몇 해 사이 널리 보급된 일본어 워드프로세서 이야기다. 제조회사들이 다투어 발매하는 기계는 대부분이 JIS 가나 배열‘이라고 불리는 키보드 문자 배치 방식을채택하고 있다. 일본어 가나를 입력하는 방법으로는 따로 로마자 입력 모드도 준비되어 있어 어느 쪽을 쓰는가는 사용자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 미야가키 요타로가 요 이삼 년간 사용하던 문호라는 기종(그래서 이번에 준비된 것도 그것이었을 테지만)도 예외가 아니다.

"그 워드프로세서는 NEC에서 만든 ‘문호文豪‘라는 기종인데요, 하야시가 평소에 쓰던 것과 사용법이 달라 곤란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후지쓰에서 내놓은 오아시스라는 기종은 예외다. ‘엄지 시프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입력 방식을 사용하여, 자판의 글쇠 수가 전보다 훨씬 줄었다는 장점은있지만 그 대신 키보드의 자판 배열이 다른 기종과 완전히 다르다. 이 오아시스를 사용하는 하야시로서는 입력 방식이 전혀 다른 기종을 써야 하기 때문에 불평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호오, 악마인가요?"
"귀에 날개, 입, 발, 손가락 다섯 개까지 제대로 달려 있죠. 종이 한 장을 써서 가위로 오리지도 않고 이런 모양을 만들 수 있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카야마 현 산속에 있는 수차관도 기묘한 살인사건의 무대가 되었죠."

"그 까다로운 선생님께서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시마다 씨도 대단하군요."
"그런가요?"
시마다는 멋쩍어하며 두툼한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었다.

"모두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죠. 세이지라는 그 인물은 일 년 반쯤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은 그가 살던 규슈에 있는 청옥부에서 어떤 사건이일어났을 때 죽은 거죠."

"오이타 현에 있는 무슨 섬에서 일어난 그 살인사건이죠? 분명히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반년 뒤에 같은 섬에 있는 십각관에서도......."

"우타야마 씨는 술에 취하면 애벌레가 돼요. 어디서건 바닥을 기어다니고 데굴데굴 구르며 ‘나는 애벌레다‘ ‘원시시대로 돌아갈테야‘ 하면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하죠."

우타야마는 게이코가 결혼한 뒤에 병원을 그만두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깝다고들 했지만 우타야마는, 퇴사 후 평온해진 게이코의 얼굴을보자 병원을 그만둔 게 진짜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나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약간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기요무라. 그 모습을 보며 우타야마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기요무라와 후나오카 두 사람은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부부 사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세이조에 있는 미야가키의 집에서 알게 되었다. 후나오카가 기상 신인상을 받고 기요무라가 이듬해에 그 뒤를 이었을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사 년 전 봄이다.

기요무라의 바람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느니, 거꾸로 후나오카에게 불륜 상대가 생겼다느니 하는 갖가지 소문이 떠돌았는데,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헤어지려고한 쪽은 아내였던 모양이다. 위자료를 둘러싼 다툼은 없었지만 기요무라는 이혼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도 심사위원들의 미스터리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결국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 게이코가 먼저 일어섰다. 이때 우타야마는 아내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다시 넓은 홀로 돌아오다가 몇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한밤중의 어두컴컴한 미로에서 홀로.......

이 ‘뭔가 과잉인 것‘(우타야마 자신도 엄밀한 정의는 내릴 수 없지만)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네 명의 작가 중 일단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스자키 쇼스케일 것이다. 다만 스자키가 닷새 안에 원고지 1백 매를 써낼 수 있다면 말이다. 평소 그가 쓰는 속도를 생각하면 써내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밤은 그렇게 천천히 깊어가고.......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한 것이 오전 1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나?
소파에서 아무렇게나 곯아떨어진 우타야마는 낯선 미로를 끝없이 방황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아침....... 온갖 잡귀들이 날뛰는 어둠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그 방 안에는 결국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가 한 명 싸늘하게 남겨져 있다.

예로부터 죽음과 윤회의 상징으로 여겨온 미로를 품에 안은 이 저택, 미로관. 그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정사각형 방이다.
그 사람은 푹신한 상아색 카펫 위에 천장을 보고 쓰러져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경직된 팔과 다리. 손톱을 세운 듯이 굳어버린열 개의 손가락....... 이미 생명을 어둠의 혼돈 속에 빠뜨린 하나의 살덩이.

"스자키 씨가 응접실에서 죽었습니다."
"스자키 씨가...... 예에엣?"
우타야마는 귀를 의심했다. 이게 현실인가? 혹시 아직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젯밤 홀을 나갔을 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검은 바지에 수수한 갈색 스웨터. 앙상하게 마른 빈약한 신체가 천장을 보고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 주위를 중심으로 카펫에 밴 검붉은 색이 그의 죽음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핏빛 이상으로 사람들을 전율하게 만든 것이 있었다. 시체의 기이한 모습이었다.
목이 꺾여 있었다. 아니, 거의 떨어져나갔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리라.

"이 문 열쇠는?"
"가도마쓰 씨가 불러서 제가 여기 왔을 때는 잠겨 있지 않았는데요."

시체의 괴이한 모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서 제거된 머리를 대신해 뿔이 두 개 난 검은 물소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긴급 사태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금 경찰을 부르면 자연히 유산을 건 콘테스트는 중지되고 수억 엔이나 되는 상금이 날아갑니다. 우리 처지도 생각해주세요."

"물론 경찰에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전에 우선 이노 씨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죠. 사메지마 선생, 이노 씨는 아직?"

"저 물소 머리는 원래 이 방에 있던 겁니까?"
"정면 벽에 걸려 있던 건데요. 그보다 어서 경찰에......."
그때 기요무라가 소리쳤다.
"잠깐만! 경찰에 연락한다고요? 그러면 미야가키 선생님의 유언을 거스를 셈입니까?"

수화기를 고쳐 쥐고 귀에 댔다. 그런데 발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우타야마를 지켜보고 있던 사메지마가 물었다.

우타야마를 지켜보고 있던 사메지마가 물었다.
"전화가 끊어졌어요."
"예에?"

"기요무라 씨, 이게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지금 이야기했듯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 사이에 이 집은 지하 밀실이라고나 해야 할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여기 모인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 범인이?"

전화선이 끊어졌다니. 대체 누가 끊었다는 거지?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타야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싱크대에 머리를 집어넣은 다음 수도꼭지를 최대한 열어놓고 한바탕 토했다.

"저 현관문이 이 저택의 유일한 출입구. 어제 구로에 선생이 돌아갈 때 이노 씨가 자물쇠를 채운 뒤 내내 닫혀 있었을 테고. 오늘 아침에 이노 씨가 물건을 사러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나가면서 다시 문을 잠가둔 거다. 그리고......."

가도마쓰는 어질러진 술잔들을 정리한 뒤 복도로 나갔다. 이노가 오락실과 응접실도 치워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먼저 오락실을 들여다보고 다음에 응접실로 갔다. 거기서 그 사태를 발견했다고 한다.

오전 9시, 가도마쓰 후미에는 주방으로 나와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대략 준비를 마친 시각이 10시 조금 전. 홀에서는 우타야마가 소파에서 잠들어 있을 뿐 아직일어나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태라면 10시 정각에 사람이 모두 모일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 경찰이 오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잖소?"
"그래서 경찰에 연락할 수 없도록 전화선을 끊었겠죠."
"아무리 그래도 이노 씨가 돌아오면 결국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과연......."

"사인은 조사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겠죠. 목이 잘려 죽었는지, 죽은 뒤에 목을 자른 건지. 어쨌든 절단에 사용된 걸로 보이는 도끼가 소파 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노 씨가 너무 늦는 거 아닙니까?"
"그렇군요. 아무리 여러 사람이 요청한 물건을 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텐데."
시마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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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키 쇼스케, 41세.
오늘 모인 미야가 요타로의 ‘제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인물이다. 중세 유럽을 무대로 삼은 중후한 본격물이 특기인데, 워낙 집필이 느려 편집자들이 피하려는작가다.

돌아보니 스자키는 여전히 안쪽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검은 테 안경을 쓴 신경질적인 얼굴. 갈색 스웨터를 걸친 야윈 체격에 구부정한 등이 특징적이다. 그가 기요무라의 명연기에 크게 놀라는 모습을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우타야마는 오늘 모인 다섯 명 중에 성실하게 활동하는 문예비평가인 사메지마 도모오가 미야가키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이서 이 저택에 틀어박혀 미스터리 이야기로 날을 지새우며 여름 한철을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사메지마는 스자키보다 세 살 아래인 서른여덟 살이지만 미야가키와 알고 지낸 지는 가장오래되었다.

하지만 약속했던 4시에서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미야가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서인 이노 미쓰오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이노 씨가 오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텐데.......

"예를 들면 미야가키 선생님이 몸이 좋지 않다거나."
우타야마는 3개월 전 자기 건강을 ‘형편없다‘고 평하던 노작가의 어색한 웃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이를 악문 듯한 말투로 그 사태를 전했다.
"미야가키 선생님께서 오늘 아침, 자살하셨습니다."

"십 몇 억 엔이라니, 만약에 그런 엄청난 재산을 둘러싸고 상속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그야말로 살인사건이 나는 건 문제도 아니겠네."

미야가키 상에 관해서는 전부터 우타야마도 들었다. 에도가와 란포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붙인 문학상을 만들었듯이(운영 주체는 당시의 일본탐정작가클럽이었지만기금은 란포가 기부했다) 미야가키 선생 또한 자기 이름을 그런 형태로 남기고 싶다고 거리낌없이 공언했다.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검토하느라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뜻하지 않은 사태?"

마른 체격에 중간 키, 짧게 깎은 머리에 윤곽이 뚜렷한 지적인 얼굴. 젊었을 때 흰 정장이라도 입었다면 ‘미청년‘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설 연휴 때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그때 느낌으로는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더군요."

"원래는 당연히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겠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여기서 설명드리기가 좀 힘든 문제라서."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절대로 착오가 없을 겁니다. 침실 침대에서 수면제를 많이 드신 모양입니다."
아아...... 하는 긴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우타야마는 이노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유서는?"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야가키 선생님은 정말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때 초대받은 손님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까.

"만우절 놀이에는 이제 슬슬 식상할 때가 되었다니까요."
그 말에 실내의 긴장이 단숨에 풀어졌다. 기요무라는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뭐 그래도 모처럼 선생님이 꾸미신 계획을 무시하기도 난처하니 여기서 적당히......."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만우절 놀이에는 이제 슬슬 식상할 때가 되었다니까요."
그 말에 실내의 긴장이 단숨에 풀어졌다. 기요무라는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뭐 그래도 모처럼 선생님이 꾸미신 계획을 무시하기도 난처하니 여기서 적당히......."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잠깐만요. 분명히 맞는 말씀입니다. 경찰에 알려야 하죠. 하지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 그러니까, 돌아가신 미야가키 선생님께서 당분간경찰에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기신 겁니다."

"하하, 하하하......"
이윽고 처음 소리를 낸 사람은 기요무라였다. 그는 문 앞에 선 이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일어섰다.
"안 속아요, 이노 씨. 그런 수법은 먹히지 않죠."
기요무라가 익살스러운 말투로 내뱉었다.

MINOSS.
새겨진 글자를 눈으로 더듬었다.
미노스.
명장名匠 다이달로스에게 명령을 내려 미궁을 만들게 한 크레타 왕의 이름이 제작자의 실수인지 로마자로 표기한 그 철자에는 S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불쑥 일어선 시마다는 손에 든 검은 물체를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이거 접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기로 약속했는데."
두 개의 팔에 두 다리, 뾰족한 두 귀에 창처럼 생긴 꼬리, 등에는 날개 두 개가 달려 있는 그것은 검은 종이로 만든, 우타야마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이접기였다.

아리아드네.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미노스 왕의 딸이면서도 젊은 테세우스에게 반해,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미궁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길을 찾을 때 쓸 실꾸리를 건네준 공주.......

가속도가 붙은 어둠이 더욱 짙어지는 미로 모양의 복도를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돌고...... 이윽고 목적지인 미야가키의 서재에 도착했다.
"구로에 다쓰오 선생님이십니다. 미야즈에 있는 N** 병원 내과부장님이신데 요 몇 달간 미야가키 선생님이 신세를 지셨습니다."

복도 폭은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실내나 현관 계단 부분과는 달리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지 않아 적갈색 플라스틱 바닥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높은 천장은 복도 폭을 한 변으로 삼은 정사각형 유닛(철골과 유리로 이루어진 그 납작한 피라미드가 그것이다)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는 푸른 색이 감도는 두툼한 무늬 유리인데, 그리로 스며드는 자연광은 이미 저녁 어둠에 젖어가고 있었다.
복도는 직선과 직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저택 중앙부의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복도가 이 저택 명칭의 유래가 된 ‘미로‘를 만들어내는것이다.

이 ‘미궁‘ 주인의 너무도 갑작스러운 ‘자살‘.
‘이제 와서 장수 기록에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네‘
석 달 전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미야가키.......
그때 이미 그 양반은 오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이상하다.......
이노 미쓰오가 보여주는 기묘한 말과 행동은 무엇일까.

"아아...... 선생님."
후나오카가 제대로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몇 명이 한숨과 가쁜 숨소리를 흘렸다.
어쩜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떴을까?
하지만 선생님, 도대체 왜.......

이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응접실 이름이 ‘미노타우로스‘이고, 방금 나온 넓은 홀은 ‘아리아드네‘라고 불린다. 이처럼 이 저택에 있는 열 몇 개의 방에는 각각 미노스 궁전의 에피소드와 관련 있는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파티 준비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 때문에 저는 그저께 밤부터 이 저택에 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묵을 방을 준비하기도 하고, 식료품이나 다른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나가기도 하느라 어제는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과 차분하게 말씀을 나눌 시간도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히선생님의 태도가 약간 이상했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고 말씀이 거의 없고...... 몸이 편치 않으신 거 아닌가, 내일 괜찮으실까, 저도 좀 걱정이 들었죠.

그토록 의사를 싫어하던 미야가키 선생이....... 우타야마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야가키의 건강 상태가 우타야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느끼던 것보다 그토록 좋지 않았던 건가.

그토록 의사를 싫어하던 미야가키 선생이....... 우타야마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야가키의 건강 상태가 우타야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느끼던 것보다 그토록 좋지 않았던 건가.

"지금이니까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군요. 그러니까, 미야가키 씨는 폐에 심각한 병...... 암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병세가 상당히 진전되어 회복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죠. 그런 사실을 본인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봉투 겉에는 ‘이노에게‘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글씨는 미야가키 선생님의 필적이 틀림없습니다. 안에 든 편지는 워드프로세서로 썼지만 끄트머리에 오늘 날짜와 서명이 선생님 필체로 적혀 있습니다."

입구에서 보아 정면 벽 쪽에는 특별 주문한 목제 랙에 설치된 AV 기기와 엄청난 양의 레코드 판과 CD, 비디오테이프 등이 꽂혀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화 마니아, 클래식 음악 마니아이기도 했던 미야가키가 자랑하는 컬렉션이다.

그리고 기상이 배출한 많은 신인작가 가운데 특히 내가 눈여겨보았던 인재가 바로 이번 ‘환갑 축하 모임‘에 초대한 자네들, 스자키, 기요무라, 후나오카, 하야시, 이네 명이지. 다만 이게 중요한 점인데, 내가 자네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네. 그 정도야 자네들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내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걸세. 당황하지 말기 바라네. 결코 바로 경찰에 알려서는 안 되네. 구로에 선생이 오실 테니 그분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하고, 서재 책상위에 있는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듣도록 하게. 내가 죽은 뒤에 바라는 모든 것이 거기 녹음되어 있네. 반드시 이 지시에 따라주기 바라네. 1987년 4월 1일 미야가키 요타로‘ 자, 여러분께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라는 인간을 믿고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구로에 선생에게는 면목이 없지만 나는 완치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병과 싸우며 살고 싶지는 않네. 이미 수술하기는 어려운 상태이고, 그래도 수술을 한다면 그 뒤에는 방사선 치료니 항암제 투여니 해서 다소나마 연명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얼마 남지도 않은 삶에 매달리는 건 내 미의식에 어긋나는 일일세. 그래서...... 그래서 나는 예순 살 생일 아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한 걸세. 사람이란 무슨 일이나 깔끔하게 처리해야지."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살인사건으로 하되, 작가 즉 자네들 자신을 그 피해자로 설정해야만 하네.

완성된 네 사람의 작품을 편집자인 우타야마와 평론가인 사메지마, 그리고 ‘마니아 대표‘로서 시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읽고 6일 정오까지 우열을 가릴 걸세. 그 결과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내 유산 상속권을 주려고 하네.

다섯째, 작품 주제에 관해서. 당연한 소리겠지만 자네들이 써야 하는 건 탐정소설일세. 심사를 맡은 쪽에서도 어디까지나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주기 바라네. 덧붙여, 작품 내용에 관해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네.

다섯째, 작품 주제에 관해서. 당연한 소리겠지만 자네들이 써야 하는 건 탐정소설일세. 심사를 맡은 쪽에서도 어디까지나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주기 바라네. 덧붙여, 작품 내용에 관해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네.

둘째. 닷새 동안 비서인 이노와 구로에 선생을 제외한 자네들은 원칙적으로 이 저택에서 한 걸음도 밖에 나가서는 안 되네. 자네들 가운데는 이런저런 일정이 잡혀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특히 바쁜 우타야마에게는 미안한데, 이번에는 힘들더라도 이쪽 사정에 따라주면 좋겠네.

셋째. 이 저택에 머무는 닷새 동안 유산 상속자 심사와 선발이 이루어질 것이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후보자는 네 명. 자네들 네 명은 이 기간 안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4월 5일 오후 10시를 기한으로 삼아 심사 대상이 될 소설을 한 편씩 써야 하네.

내 전 재산 가운데 반을 지금까지 공언한 대로 미야가키 상기금에 충당할 걸세. 그리고 나머지 반을 한 개인에게 물려주려고 하네.
이 개인의 이름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네. 그 주인공을 이제 심사할 작정이야.

"I......상속권을 주려고 하네. 심사를 맡을 사람들에겐 물론 상응하는 액수의 보수를 약속하지.

그런데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겐 현재 피붙이가 없네. 결혼도 한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진즉부터 내가 죽은 뒤 이 재산을 미야가키 요타로라는 이름을 붙인 문학상제정과 운영을 위한 기금으로 쓰도록 공언해왔지. 그런 내용을 담은 정식 서류도 조만간 작성할 셈이었고. 하지만 지금 나는 이 계획에 약간 변경을 가할 생각이네.

이번에 환갑축하 모임이라고 해서 자네들을 이곳으로 부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내 유산 상속자를 자네들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일세. 상속 후보가 될 사람은 앞에서 내가 걱정거리라고 이야기한, 스자키, 기요무라, 후나오카, 하야시, 바로 이 네 명이네.

우선 작품 무대는 이 집, 미로관으로 설정할 것. 등장인물로는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을 내세울 것. 그 가운데는 물론 나 미야가키 요타로도 포함되겠지.

첫째. 내 자살을 경찰에 알리는 건 앞으로 닷새 뒤, 4월 6일 정오로 하게. 그전에는 결코 외부인을 이 저택에 들여서는 안 되네. 닷새쯤이라면 뭐 내 시체도 그리 심하게 부패하지는 않을 걸세.

넷째. 작품의 규정 매수는 4백자 원고지로 계산해서 1백 매 정도로 하겠네. 사실은 장편을 쓰게 하고 싶지만 이런 연출을 한 이상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겠지. 닷새 동안에 1백 매.

미야가키 요타로를 20대 후반부터 십 년 가까이 성실한 비서로서 모셔온 이 남자는 작가 미야가키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변호사 자격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성격에맞지 않다는 이유로 변호사 일을 마다하고, 평소에는 도쿄에서 사법시험 준비생들을 위한 학원 강사로 일한다고 한다.

"역시 미야가키 선생님답지 않아? 선생님께서 자살하신 건 물론 충격이지만, 그냥 죽지는 않겠다는 건 이런...... 아, 실언을 했네. 어쨌든 일단 우리는 선생님께서 가능성을 인정해주신 점을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

일곱 번째. 아니, 여섯 번째인가? 원고 집필은 각자 배정받은 방에서 준비되어 있는 워드프로세서로 할 것. 글씨를 잘 쓰느냐 못 쓰느냐가 작품 평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네. 자네들 네 명 모두 요즘 분명히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하고 있겠지. 그러니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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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김선재.임재근.정성일 지음 / 문화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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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5]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구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나와 인연이 닿았던 두 사람이 잠들어 있다. 한 사람은 중학교 동창인 ㅎㅇㅇ 상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ㅅ대학교 ROTC 동기였던 ㅂㅁㅁ 중위다.

두 사람과 맺었던 인연의 깊이는 서로 달랐다.

ㅎㅇㅇ 상사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지만,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같은 학교를 다녔어도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이는 아니었고, 내 기억 속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다.

그가 나와 같은 중학교를 다닌 동창이었다는 사실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뒤에야 알았다. 텔레비전과 신문에 그의 이름과 얼굴이 나오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오래전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조용한 친구였다. 학교에서는 기억에 뚜렷하게 남지 않을 만큼 조용했던 한 사람이 훗날 서해 바다에서 나라를 지키다 전사했고, 나라가 기억하는 영웅이 되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알지 못했던 동창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ㅎㅇㅇ 상사는 우리 마님과도 같은 중학교 동창이다. 마님 역시 그와 특별히 가까이 지낸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에게 그는 같은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던 동창이다.

반면 ㅂㅁㅁ 중위는 전혀 다른 인연이다.

그는 ㅅ대학교 ROTC 동기 가운데서도 나와 가까웠던 친구 중 하나였다. 함께 장교가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고, 서로의 성격과 사람됨도 잘 알고 지냈다.

군 복무 중 나는 연천 전곡에 있는 공병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저탐시설, 즉 레이더 관련 시설공사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굴삭기 기사가 내게 물었다.

“ROTC 출신입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다시 물었다.

“ㅅ대학교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곧바로 물었다.

“ㅂㅁㅁ을 아십니까?”

“잘 압니다. 친했던 동기입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 그분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죽었습니다. 자살했다고 합니다.”

순간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친했던 동기가 죽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자살했다는 말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친구는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ㅂㅁㅁ 중위의 성격과 모습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그분이 말했다.

“제가 그 아이 외삼촌입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ㅂㅁㅁ 중위의 외삼촌이라고 밝혔다.

친했던 동기의 죽음을 공식적인 연락이나 다른 동기의 전언이 아니라, 군부대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그의 외삼촌에게서 처음 들었다. 굴삭기 소리와 공사장의 먼지 속에서 들었던 그 말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 세월이 흘렀다.

텔레비전에서는 ㅂㅁㅁ 중위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ㅅ대학교 학군단 뒤편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오랜 노력 끝에 ㅂㅁㅁ 중위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현충원으로 들어오던 날 여러 ROTC 동기들이 함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친했던 동기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후에 나는 대전에 사는 ㅅ대학교 ROTC 동기 한 사람과 함께 ㅂㅁㅁ 중위의 묘소를 찾았다. 그 친구는 나와도 가까웠고, ㅂㅁㅁ 중위와도 친하게 지냈던 동기였다. 젊은 시절에는 우리 세 사람이 모두 가까이 지냈다.

세 사람이 함께했던 대학과 학군단 시절은 이미 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살아남은 두 사람이 먼저 떠난 한 친구를 찾아 현충원의 묘소 앞에 서 있었다.

그가 현충원으로 들어오던 날 함께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뒤늦게나마 전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평소에도 가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현충원에서는 구암사에서 나온 분들이 연중무휴로 무료 국수 보시를 하고 있다. 우리는 작은 금액이나마 시주를 하고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돌아오곤 한다.

ㅎㅇㅇ 상사는 나뿐 아니라 마님에게도 중학교 동창이다. 그래서 마님과 함께 그의 묘소를 직접 찾아가 본 적도 있다.

학창 시절에는 기억조차 희미했던 친구였지만, 묘소 앞에 서니 같은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인연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친구를, 마님과 함께 현충원에서 뒤늦게 찾아간 셈이었다.

오늘도 마님과 함께 현충원에 가서 국수를 먹고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ㅎㅇㅇ 상사도, ㅂㅁㅁ 중위도 찾아보지 못했다.

한 사람은 학창 시절의 기억조차 희미한 중학교 동창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학과 학군단 시절을 함께 보낸 가까운 ROTC 동기다.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나와 인연을 맺었고, 서로 다른 사연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모두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현충원에 갈 때마다 반드시 두 사람을 찾는 것은 아니다. 국수를 먹고 산책을 하다 그냥 돌아오는 날도 있다. 오늘도 그랬다.

그래도 그곳 어딘가에 두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다음에 현충원을 찾을 때는 국수만 먹고 돌아오지 말아야겠다.

ㅎㅇㅇ 상사에게는 마님과 함께 다시 찾아가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동창으로서 인사를 건네고 싶다.

ㅂㅁㅁ 중위에게는 함께 묘소를 찾았던 그 동기와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현충원에 들어오던 날 함께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말을 다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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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김선재.임재근.정성일 지음 / 문화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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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안장자들의 삶을 발굴하고, 국가폭력과 군 의문사,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대전현충원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 듯한 제목과 달리, 실제 인물 선정은 저자들의 시민운동, 진보적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세월호 순직교사와 여러 군 의문사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도, 북한의 무력도발에 맞서 전사한 제2연평해전 장병들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선정 기준의 대표성과 균형성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국가의 잘못을 기록하는 일과 국가를 지키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 대한민국 현대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역사이며, 함께 조명될 때 비로소 국립현충원의 의미도 온전히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는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인물 선정과 역사 서술의 균형성에서는 일정부분 한계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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