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바람, 번개와 탁류 그리고 수차가 연주하는 괴이하고도 떠들썩한 음악에 감싸인 긴 하룻밤.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난 몇 가지 일은 그들이 품은 불안감을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탑에서 떨어진 한 여자. 사라진 그림 한 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자취를 감춘 한 남자.

폭풍우에 희롱당한 하룻밤의 끝.
그때가 되어서야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이상한 마지막 형태를 그들 앞에 드러냈다.

요란스레 몸을 떨며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숲의 나무들. 불어난 강의 거센 물살. 시커먼 모습으로 땅에 웅크린 저택, 그 옆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세대.......

그리고 그 폭풍우의 밤은 새벽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한곳에 엉긴 두툼한 구름들이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사키다."
"그럴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몸을 일으키며 얼굴이 흰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왼손 약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오른손으로 비틀면서 말했다.
"마사키 씨의 그 묘안석 반지 자국이겠죠."

애벌레 사체와도 닮은 잿빛 물체. 부자연스럽게 끊긴 밑동에는 응고된 피가 엉겨 있었다.
"절단면의 상태로 보아서 오래된 것 같지는 않군요. 잘린 지 두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남자 한 명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휠체어 뒤에 바짝 붙어 선 새하얀 네글리제 차림의 아리따운 소녀. 그 소녀를 보호하듯 두 남자가 양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약간 뒤에 선 두 남자. 남자들은 모두 잠옷 위에 뭔가를 걸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쪽에 남녀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하나.

새어나온 강렬하고도 야릇한 냄새에 모두 코를 막았다. 동시에 구역질을 한 사람도 분명 있었으리라.
단백질이 타는 냄새였다. 그리고 일제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냄새가 어디서 발생했을지 똑같은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마사키......."
휠체어를 탄 남자가 괴로운 듯이 신음했다.
......맙소사."

그리고 폭풍우가 걷힘과 동시에 그날 밤의 ‘사건‘은 하나의 ‘해결‘ 속에 묻혔다.

...아아."
바닥을 뒹구는 둥근 물체를 보며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말을 흘려냈다.
"어떻게 이런 짓을."
그것은 사람의 잘린 머리였다.
새카맣게 불타서 흰 연기가 쉭쉭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몽땅 탔고 눈, 코, 입 전부 문드러져서 형체를 잃었다.
한편 남자가 쥔 불쏘시개 끝에도 물체 하나가 마치 꼬치처럼 꽂혀 있었다.

‘탑‘에서 떨어진 불행한 여자. 도난당한 그림. 자취를 감춘 수상한 남자. 그 남자를 쫓다가 끝내 소각로에서 토막 시체로 불탄 채 발견된 한 남자.

먼저 굴러 나온 머리와 마찬가지로 불에 타서 새카맣고 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인간의 팔. 아무래도 왼팔 같았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손에 손가락 하나가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엄지손가락부터 헤아려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왼손 약손가락.
소각로 안에서는 인간의 시체 한 구가 불타고 있었다.
머리, 몸통, 양팔, 양다리. 여섯 토막으로 잘린 하나의 몸이.

남자는 소각로 속을 헤집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이었지만 불쏘시개 자루를 쥔 그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불타는 물체 하나를 갈고리로 찍어서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9월 들어서 대체로 좋은 날씨가 이어졌지만, 어젯밤 뉴스에서는 태풍 몇 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28일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지금의 이 평온은 폭풍 전야의 고요일까.

야윈 몸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가슴 복판에서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지는, 말로 다할 수 없고 도망칠 길도 없는 전율.

산골짜기에 있는 이곳은 세상의 소란에 아랑곳없이 한적했다. 골짜기 물은 막힘없이 흘러갔고 세대의 수차는 쉴 새 없이 돌았다. 저택에는 나와 유리에, 구라모토 세사람이 조용히 살고 있었다. 통근하는 가정부 말고 찾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죽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취를 감춘 한 명의 남자.. 유리에라는 이 소녀의 마음에도 그 사건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상처라는 형태로.
요 1년 사이 나도 변했지만, 그녀 또한 상당히 변했다.

필시 현재의 나,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내게는 얼굴이 없다. 나는 내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이 저택 주인의, 원래 있어야 할 ‘얼굴‘을 본뜬 하얀 가면.
살에 착 감기는 고무의 감촉. 살아있는 얼굴에 쓰는 차가운 데스마스크.......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피로 물든 폭풍우의 그 밤으로부터.
파이프담배를 피우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1년 전의 그날 밤으로 사고의 촉수를 가만히 뻗었다. 그날 일어난 여러 일들, 그리고 그 후.......

생각해보니 작년 오늘, 9월 28일도 지금과 비슷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도 대형 태풍이 접근하고 있다고 뉴스에서 보도했다. 그리고 예보대로 몰아닥친 그거센 폭풍우.

"규슈의 오이타 현경에 있는 지인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니무라 님은 기묘한 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런 남자가."
"작년에 일어난 사건에 흥미가 있나 봅니다. 어제 갑자기 니무라 님을 찾아와서 사건에 관해 이것저것 묻더니 이곳 위치를 확인하고 내일 가봐야겠다고 했답니다.
니무라 님도 폐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인의 동생이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며 미안해하셨습니다."

거한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어깨가 실팍하고 넓은 데다 키도 큰 남자다.
올백으로 넘긴 백발성성한 머리카락. 넓고 각진 이마. 쌀알처럼 조그만 눈에 핏기 없는 두툼한 입술.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름이 두드러진 창백한 얼굴에 웃음 한 번 짓는 법이 없었다. 귀에 잘 들어오는 바리톤 목소리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 사람 이름은?"
"시마다라는 남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에게는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집사‘라는 명칭이 잘 어울렸다. 주인을 모시면서 그 뜻에 거스르는 일 없이 묵묵히 저택을 관리한다. 그리고일에 자신의 감정을 일절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재능이다. 구라모토라는 이 남자는 그러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1년 전 그날 밤, 불가능한 상황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 남자가 유령처럼 이 저택을 배회하지 않는 한.
나와 유리에는 한동안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하얀 가면 위에서 뭘 보고 있을까)

구라모토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경찰의 니무라 님 전화였습니다."
니무라라면 오카야마 현경 수사 1과의 경부다. 1년 전에 이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맡아 수사했다.

9월 28일. 그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세 사람이 이 저택을 찾아오는 오늘만은.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방문자를 환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 외진 곳에서, 그것도 마을에서 뚝 떨어진 산속에서 이런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살겠는가.

"어떻게 할까요?"
"되돌려 보내."
"알겠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알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한다는 점에서는 구라모토와 마찬가지로 고마운 존재지만, 필요 이상으로 주눅 들어 있는 태도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구라모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때때로 나를 몹시 짜증나게 했다.

이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이다. 9월 28일. 후지누마 잇세이의 기일인 오늘 딱 하루.
기일이라고 하면 오늘은 예전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일 9월 29일은. 그렇다, 일찍이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였던그 남자, 마사키 신고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9월 28일. 올해도 어김없이 이날이 돌아왔다. 오후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손님 네 명이 저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그리고 후루카와 쓰네히토.

덜커덩, 덜컥.......
그리고 아련한 물소리에 섞여 건물 서쪽에서 돌아가는 수차 소리. 평온한 아침이었다.
어젯밤 뉴스에서 태풍 몇호인지가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오늘 오후에는 주고쿠 지방에도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다.
가면.
필시 현재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후지누마 기이치의 삶을, 아니 존재의 전부를 상징하는 물건.
가면.
그렇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저주스러운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가면을 쓴다.

그가 자신의 그런 심정을 부정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불문곡직하고 그들의 방문을 거부할 수도 있다. 요 몇 년 그러지 않은 것은 아마 양심의가책 비슷한 감정 때문이리라.
(어쨌거나......)그는 눈을 감은 채 갈라진 입술로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오늘도 올 것이다, 기정사실이니 하는 수 없지)이제 와서 자신의 굴절된 심리를 분석할 마음 따위 없었다. 그들의 방문이 성가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그뿐이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그러고 얼마 뒤 그 사람, 후지누마 기이치가 유리에를 거두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고이치로가 기이치에게 미리 부탁을 해두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후지누마 기이치. 시바가키 고이치로가 일찍이 스승으로 섬겼던 화가 후지누마 잇세이의 외동아들.

원형의 넓은 방이다. 아래층 식당 천장이 2층까지 뚫려 있으니 정확하게는 지상 3층인 셈이다.
벽 색깔은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차분한 회백색. 바닥에는 털이 긴 연보랏빛 융단이 깔려 있고, 중후한 진갈색 판자를 댄 천장 복판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낮인데도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창문이 너무 작은 탓이다.

한편 마사키는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열정은 남달랐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는 법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우연히 후지누마 잇세이의눈에 띄어서 대단한 호평을 들었다. 이것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회계사사무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잇세이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이 수차는 마치......"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내 말이 없던 기이치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마치?"
쉰 목소리가 가면 틈으로 새어나왔다.
"마치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 이 공간에 정지시켜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12년 전의 사고......)(하지만 억울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덜커덩, 덜컥........
그칠 줄 모르고 돌아가는 수차 소리가 그날 밤의 파멸의 외침과 겹쳤다.

"그래, 유리에는 내내 마음을 닫고 살았지. 12년 전에 그 아이 아버지가 죽고 이 저택에 살기 시작한 뒤로 줄곧."
"하지만 후지누마 씨, 그건......."
"알아. 내 탓이지. 내가 유리에를 여기, 저 ‘탑‘ 위에 가뒀어. 그 애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기이치는 가면 아래의 눈으로 친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이다.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다, 그건 아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그의 얼굴에서는 역시 옛날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나쁘고 눈빛도 달랐다.

"음, 후지누마 씨한테 유리에 씨는 잇세이 선생님이 남긴 예술작품과 같은 존재 아닌가요? 유리에 씨를 잇세이 선생님이 그린 풍경들 속에 가둬두고 싶었다, 그런 거죠?"
"아아......."
기이치는 헐떡이듯이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쥐어짰다.
"넌 역시 시인이야."

이 폐쇄된 시간과 공간에서 그녀를 그만 놓아주고 싶다고 나도 가끔 냉정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유리에는 말없이 자신이 오랫동안 갇혀 지낸 ‘탑‘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옆얼굴에서 그녀의 아버지 시바가키 고이치로의 모습을 보았다.

오카야마 현 북부. 수차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위치한 A** 마을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은 더 들어와야 하는 산간벽지에 있다. 주인의기괴한 외모에 빗대어 ‘가면 저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후지누마 잇세이의 제자 중 하나였던 그. 열정과 진지함, 그리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기술을 지녔음에도 결국은 스승의 작품을 흉내 내는 것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남자. 너무 이른 죽음을 맞이한 그의 유일한 걸작은 딸 유리에이리라.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덜커덩, 덜컥, 덜커덩.......
그날 밤. 1973년 12월 24일 밤, 한 차에 탄 세 명의 남녀. 후지누마 기이치, 마사키 신고, 그리고 마사키의 약혼녀 호쓰타 게이코.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 당시 고베에 있던 후지누마 저택의 파티에 함께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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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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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총괄]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 제주 4·3과 시대의 폭력이 개인과 가족의 내면에 남긴 상처

1. 도서 개요
가. 도서의 기본 성격
ㅇ(도서성격)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은 제주 4·3의 학살 기억과 생존자의 상처를 중심축으로 삼되, 권력 부패에 대한 풍자, 1970년대 산업화와 언론 통제, 도시 하층민의 삶, 인간관계의 속물성까지 함께 다루는 작품집임.
ㅇ(핵심내용) 작품집은 국가폭력과 시대의 부조리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족관계, 고향 기억, 사랑, 자존심, 생활 감각, 자기 정체성까지 훼손한다는 점을 여러 작품을 통해 보여줌.
ㅇ(검토방향) 작품집 전체는 권력의 부패와 책임 회피를 풍자한 작품, 제주 4·3을 직접 증언하는 작품, 그 상처가 개인의 내면과 고향 감각 속에 파편적으로 남은 작품, 그리고 산업화 시대의 다른 사회적 고통을 다룬 작품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음.
나. 작가 소개
ㅇ(작가개요) 현기영은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소설가로,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은 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ㅇ(문학적배경) 현기영 문학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제주 4·3의 기억임. 그는 오랫동안 침묵과 금기의 영역에 놓여 있던 제주 4·3의 상처를 구체적인 인물, 장소, 방언, 가족의 기억을 통해 문학적으로 복원해 온 작가임.
ㅇ(주요작품)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순이 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누란』 등이 있음.
ㅇ(핵심의미) 현기영은 제주 4·3을 단순한 지역사나 과거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국가폭력과 공동체 붕괴, 가족의 침묵, 생존자의 죄책감이라는 보편적 인간 문제로 확장한 작가임.
다. 작품집의 전체 인상
ㅇ(전체인상) 『순이 삼촌』은 편안하게 읽히는 작품집이 아님. 강한 역사적 증언의 힘을 가진 작품과, 난해한 이미지 및 의식의 흐름을 통해 인물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주는 작품이 함께 놓여 있음.
ㅇ(서사특징)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처럼 사건과 인물이 선명한 작품도 있고, 「초혼굿」, 「거울앞에서」, 「아버지」처럼 기억, 상징, 공포, 환상이 뒤섞여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음.
ㅇ(핵심의미) 작품집의 중심은 결국 “상처가 어떻게 남는가”에 있음. 죽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살아남은 사람, 기억하는 사람, 말하지 못한 사람, 죄책감을 안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깊게 자리 잡고 있음.

2. 작품별 핵심 정리
가. 「소드방놀이」
ㅇ(핵심의미) 권력층의 부패와 책임 회피, 보여주기식 처벌의 위선을 풍자한 작품임. 진짜 책임져야 할 권력자는 뒤로 숨고, 백성의 분노는 하급자나 약한 대상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통해 부조리한 권력 질서의 잔혹함을 드러냄.
나. 「순이 삼촌」
ㅇ(핵심의미)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았으나 남편과 자식을 잃고 평생 트라우마에 갇혀 살아간 순이 삼촌의 비극을 통해, 살아남은 자가 겪는 죽음보다 긴 고통을 증언한 작품임.
다. 「도령마루의 까마귀」
ㅇ(핵심의미) 군경과 산사람의 폭력 사이에 놓인 민간인의 고통을 보여주며, 남편의 시신을 지키려는 귀리집의 행위를 통해 폭력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엄을 드러낸 작품임.
라. 「해룡 이야기」
ㅇ(핵심의미) 살기 위해 서북군과 살림까지 차린 어머니의 생존을 수치로만 기억한 아들의 죄책감을 통해, 생존의 절박함을 개인의 도덕 문제로 몰아간 시대의 잔혹함을 드러낸 작품임.
마. 「아내와 개오동」
ㅇ(핵심의미) 1970년대 언론 통제 속에서 지식인의 좌절이 가정의 생활고와 아내의 노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통해, 시대의 억압이 한 가정의 일상까지 무너뜨리는 방식을 보여준 작품임.
바. 「꽃샘바람」
ㅇ(핵심의미) 농촌 출신 여성 노동자 인숙의 실직, 낙태, 방황을 통해 1970년대 산업화가 가난한 여성의 몸과 삶에 어떤 고통을 떠넘겼는지를 보여준 작품임.
사. 「초혼굿」
ㅇ(핵심의미) 고향에 닿지 못하거나 고향에서 살아내지 못한 두 젊은이의 죽음을 통해, 개인의 취약한 내면과 제주 4·3의 상흔이 겹쳐질 때 고향이 안식처가 아니라 죽음의 공간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임.
아. 「동냥꾼」
ㅇ(핵심의미) 몰락한 친구를 돕는 행위 이면에 숨어 있는 돈, 열등감, 우월감, 위선적 동정심을 드러내며, 타인의 불행 앞에서도 순수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물성을 포착한 작품임.
자. 「거울앞에서」
ㅇ(핵심의미) 누이를 기다리는 완주의 하루를 통해 가족의 부재, 실패한 사랑,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뒤섞이는 내면을 보여주며, 기다림이 오히려 상실과 무력감을 확인하는 과정임을 드러낸 작품임.
차. 「아버지」
ㅇ(핵심의미) 부조리한 시대를 바꾸려 했던 아버지가 산폭도라는 낙인 속에 지워지고, 그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아이가 공포와 수치, 죄책감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는 비극을 다룬 작품임.

3. 전체 핵심 의제
가. 권력의 부패와 책임 떠넘기기
ㅇ(권력의위선) 「소드방놀이」는 부패한 권력이 자기 책임을 감추기 위해 약한 사람이나 하급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구조를 풍자함.
ㅇ(보여주기식처벌) 작품 속 처벌은 정의의 실현이라기보다 백성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의식처럼 제시됨. 이는 책임져야 할 자는 뒤로 숨고, 가까이 보이는 약한 대상만 처벌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냄.
ㅇ(핵심의미) 이 작품은 작품집 전체의 출발점에서 권력의 본질적 문제를 제기함. 이후 4·3, 산업화, 언론 통제의 문제도 결국 힘 있는 자의 책임 회피와 약한 자에게 전가되는 고통이라는 구조와 연결됨.
나. 제주 4·3과 살아남은 자의 상처
ㅇ(상처의지속) 작품집은 제주 4·3을 과거의 종료된 사건으로 다루지 않음. 4·3은 생존자와 자식 세대, 고향의 땅에 죄책감, 침묵, 공포, 수치의 형태로 계속 남아 있음.
ㅇ(작품별양상) 「순이 삼촌」은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를, 「도령마루의 까마귀」는 민간인의 극단적 고통을, 「해룡 이야기」는 생존의 대가를 수치로 떠안은 어머니를, 「아버지」는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아이의 죄책감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이 작품집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만이 아님. 더 무거운 것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 기억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을 계속 지배한다는 점임.
다. 가족의 언어가 공포와 수치로 바뀌는 과정
ㅇ(가족언어의변질) 이 작품집에서 ‘삼촌’, ‘아버지’, ‘어머니’ 같은 가족의 말은 따뜻한 호칭으로만 남지 않음. 시대의 폭력과 낙인 속에서 그 말들은 공포, 수치, 죄책감이 덧씌워진 이름으로 바뀜.
ㅇ(작품별양상) 「순이 삼촌」의 ‘삼촌’은 학살 생존자의 상처를 품은 이름이 되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산폭도라는 낙인에 가려지며, 「해룡 이야기」의 어머니는 생존의 절박함보다 수치의 대상으로 기억됨.
ㅇ(핵심의미) 작품집은 국가폭력과 시대의 부조리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가장 따뜻해야 할 말들까지 공포와 침묵으로 바꾸어놓았음을 보여줌.
라. 고향의 상실
ㅇ(고향의변질) 작품집에서 고향은 따뜻한 향수의 공간이 아님. 옴팡밭, 도령마루, 불탄 마을, 텅 빈 운동장, 사라봉 자살바위는 모두 학살과 죽음, 상처와 증언의 공간으로 나타남.
ㅇ(귀향의불가능) 「초혼굿」과 「거울앞에서」에서 고향은 돌아가면 위로받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의 불안과 상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소임.
ㅇ(핵심의미) 현기영에게 고향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기억해야 하지만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장소임. 고향은 회복의 공간이 아니라 상처와 증언의 공간으로 남음.
마. 시대폭력에 사라진 남성들과 여성에게 떠넘겨진 생존의 몫
ㅇ(남성의소멸) 이 작품집에서 남성들은 단순히 무력한 존재로만 그려지지 않음. 4·3의 폭력 속에서 죽거나 산으로 들어가고, 언론 통제와 생활의 압박 속에서 침묵하거나 무너지는 방식으로 시대의 한복판에서 밀려남.
ㅇ(여성의몫) 남성들이 죽거나 사라지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자리에서,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 시신의 수습, 몸의 수치, 자식의 오해, 낙태와 노동의 고통까지 떠안음.
ㅇ(작품별양상) 「도령마루의 까마귀」의 귀리집은 죽은 남편의 얼굴을 지키려 하고, 「해룡 이야기」의 어머니는 살기 위해 몸과 삶까지 내몰리며, 「꽃샘바람」의 인숙은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실직과 낙태를 홀로 감당함.
ㅇ(핵심의미) 작품집은 시대의 폭력이 남성들을 제거하거나 침묵시키고, 그 뒤에 남겨진 생존의 책임과 수치, 생활의 무게를 여성들에게 떠넘겼음을 보여줌.
바. 침묵당한 역사의 문학적 증언
ㅇ(침묵의구조) 작품 속 인물들은 자주 말하지 못함. 순이 삼촌은 학살의 기억을 온전히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가족은 아버지를 숨겨야 하며, 중호의 어머니는 자기 생존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받지 못함.
ㅇ(증언의문학) 그러나 작품 자체는 그 침묵을 대신 말함. 현기영의 문학은 공식 기록이 외면하거나 늦게 말한 것들을 인물의 기억과 몸, 방언과 장소를 통해 되살림.
ㅇ(핵심의미) 이 작품집은 문학이 침묵당한 역사를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 문학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살아남은 사람의 고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듦.

4. 문학적 특징과 한계
가. 역사적 증언성과 리얼리즘
ㅇ(구체성) 작품집은 추상적 이념 논쟁보다 구체적인 인물, 장소, 비극적 사건을 앞세움. 독자는 역사적 폭력을 관념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과 가족의 붕괴, 마을의 공포로 체감하게 됨.
ㅇ(서사성)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는 비교적 선명한 서사 구조를 통해 제주 4·3의 폭력과 민간인의 고통을 강하게 전달함.
ㅇ(핵심의미) 현기영의 강점은 역사적 사건을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장소, 가족의 이야기로 바꾸어 보여주는 데 있음.
나. 풍자와 권력 비판
ㅇ(풍자성) 「소드방놀이」는 직접적인 역사 증언 방식과 달리 풍자적 형식을 통해 권력의 부패와 책임 회피를 비판함.
ㅇ(권력비판) 이 작품은 권력이 정의를 실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책임을 감추고 백성의 분노를 조절하려는 방식을 드러냄.
ㅇ(핵심의미) 「소드방놀이」는 작품집 전체에서 시대폭력의 뿌리에 권력의 부패와 책임 회피가 놓여 있음을 암시하는 출발점 역할을 함.
다. 상징과 의식의 흐름
ㅇ(상징성) 「초혼굿」, 「거울앞에서」, 「아버지」는 살, 넋, 바다, 자살바위, 거울, 손등의 반점, 연못, 검은 점, 산불 같은 상징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드러냄.
ㅇ(난해함) 이 작품들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또렷하게 설명하기보다, 기억과 공포, 환상과 감각을 뒤섞어 보여주기 때문에 독해가 쉽지 않음.
ㅇ(핵심의미) 그러나 이러한 난해함은 단순한 약점만은 아님. 정리되지 않은 트라우마와 붕괴 직전의 내면 상태를 독자가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방식이기도 함.
라. 작품집의 한계
ㅇ(완성도의편차) 묵직한 서사적 타격감을 주는 작품과 난해한 심리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 혼재되어 있어 작품 간 몰입도와 완성도의 편차가 존재함.
ㅇ(독해의피로감) 특히 「초혼굿」, 「거울앞에서」, 「아버지」 일부 대목은 상징과 환상, 의식의 흐름이 강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바로 파악하기 어렵고 독해의 피로감을 줌.
ㅇ(핵심의미) 그러나 이 편차는 작품집 전체의 약점만은 아님. 역사적 증언, 권력 풍자, 사회 비판, 심리 묘사, 상징적 서술을 다양하게 시도한 흔적으로도 볼 수 있음.

5. 현재적 시사점 및 종합 평가
가. 공적 시스템의 책임
ㅇ(구조적책임) 『순이 삼촌』은 폭력과 방관이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 이는 국민의 생명과 일상을 보호해야 할 공적 시스템의 책임을 다시 묻게 함.
ㅇ(책임행정의필요) 「소드방놀이」는 책임 있는 자가 뒤로 숨고, 현장의 하급자나 약자가 책임을 대신 뒤집어쓰는 구조를 풍자함. 이는 오늘의 공적 시스템에서도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보여주기식 조치가 아니라 실질적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시사함.
ㅇ(사후회복) 국가폭력의 피해는 사건이 끝났다고 사라지지 않음. 살아남은 사람의 트라우마, 가족의 침묵, 지역 공동체의 불신과 수치까지 이어짐. 따라서 공적 시스템은 사건 처리뿐 아니라 기억, 치유, 명예회복, 재발 방지까지 책임져야 함.
ㅇ(핵심의미) 이 작품집은 행정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단순한 숫자나 사건으로 다루는 순간, 가장 깊은 고통이 누락될 수 있음을 경고함.
나. 현장을 보는 리더십과 기록의 중요성
ㅇ(현장감각) 작품 속 고통은 모두 현장에 있음. 옴팡밭, 도령마루, 공장, 불탄 마을, 가난한 방 안이야말로 정책과 제도가 실제로 닿아야 할 자리임.
ㅇ(반면교사) 현실을 알고도 움직이지 못하거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태도는 또 다른 방관이 될 수 있음. 진정한 리더십은 가장 취약한 현장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보고 실제 해결책으로 연결하는 데 있음.
ㅇ(기록의역할) 문학은 공식 기록이 놓친 감정과 침묵, 죄책감과 수치를 복원함.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모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폭력과 방관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감각을 유지하는 일임.
다.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기록한 역사 소설집이 아니라, 권력의 부패와 국가폭력, 산업화의 그늘과 생활의 압박이 한 개인의 내면과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치열한 문학적 보고서임.
ㅇ(핵심정리) 이 작품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 기억의 고통임. 순이 삼촌은 학살 이후에도 죽지 못한 채 살아가고, 해룡 이야기의 어머니는 생존의 수치를 떠안으며, 아버지의 아이는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무서워했던 기억을 평생 죄책감으로 안고 감.
ㅇ(최종정리) 『순이 삼촌』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침묵과 죄책감 속에 방치된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끝까지 추적함으로써,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맞서 기억을 보존하는 문학의 역할을 증명함. 이 작품집은 과거의 비극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사회와 공적 시스템이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책임져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묻는 작품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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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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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아버지」
: 부조리한 시대를 바꾸려 했던 아버지와 그 기억을 감당하지 못한 아이의 공포와 죄책감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아버지」는 제주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조리한 시대 현실에 맞서려 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어린 시절의 공포와 수치, 그리움과 죄책감 속에서 기억하는 화자의 내면을 다룬 작품임.
ㅇ(핵심내용) 열 살 무렵 고향을 떠난 화자가 오래도록 귀향하지 못한 이유를 되짚으며, 불탄 마을과 아버지의 은밀한 방문, 산불과 불탄 시신의 기억이 아이에게 어떻게 지울 수 없는 공포로 각인되었는지를 보여줌.
ㅇ(검토방향) 아버지의 객관적 행적을 추적하기보다, 부조리한 시대를 바꾸려 했던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산폭도’라는 낙인으로 왜곡되고, 그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화자에게 어떻게 공포와 죄책감으로 남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함.
나. 제목의 의미
ㅇ(제목의미) 제목 「아버지」는 단순한 가족 호칭이 아니라, 시대의 폭력 속에서 가족에게조차 온전히 불릴 수 없었던 금기된 존재를 가리킴.
ㅇ(부재의아버지) 작품 속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으로 안정적으로 머무는 가장이 아니라, 산에서 몰래 내려왔다 다시 사라지는 사람임. 그는 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혈육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두려운 비밀임.
ㅇ(핵심의미)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보호자의 이름이면서도, 산폭도와 공비라는 낙인 속에 가려진 이름임. 작품은 한 아이가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마음 놓고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비극을 보여줌.

2. 핵심 서사와 인물 분석
가. 화자, 기억을 감당하지 못한 아이
ㅇ(고향회피) 화자에게 고향은 따뜻한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와 4·3의 공포가 불길한 감각의 파편으로 묻혀 있는 기피의 공간임.
ㅇ(아이의공포) 어린 화자는 아버지가 왜 산에 가야 했는지, 아버지가 무엇에 맞서려 했는지 이념적으로 이해하지 못함. 그는 그 모든 상황을 몸이 느끼는 원초적 공포와 불안으로 받아들임.
ㅇ(모순과죄책감) 화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무서워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 하면서도 그 사실이 드러날까 회피함. 이 모순된 감정은 훗날 깊은 죄책감으로 고착됨.
ㅇ(핵심의미) 화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시대의 언어가 덧씌운 공포를 먼저 받아들인 아이임. 작품의 비극은 바로 그 어린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는 데 있음.
나. 아버지,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려 했던 존재
ㅇ(아버지의위치) 아버지는 단순히 시대의 폭력에 밀려 산으로 들어간 수동적 피해자로만 볼 수 없음. 그는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질서와 가진 자들의 공고한 기득권에 맞서, 잘못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
ㅇ(변혁의좌절) 그러나 아버지가 맞서려 했던 질서는 너무 강고했고, 그 뜻은 현실의 폭력 속에서 꺾임. 결국 그는 가족에게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국가와 마을의 시선 속에서 ‘산폭도’ 또는 ‘공비’라는 이름으로만 남게 됨.
ㅇ(은밀한방문) 아버지는 아이가 잠든 칠흑 같은 밤에 몰래 집을 찾아오며, 가족 안에서도 그의 방문은 침묵 속에 은폐됨. 이는 아버지가 가족에게조차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작품의 비극은 아버지가 단순히 죽었다는 데 있지 않음. 세상을 바꾸려 했던 아버지의 뜻은 지워지고, 어린 화자에게는 그 아버지가 공포와 수치, 죄책감의 대상으로만 각인되었다는 데 있음.
다. 연못과 검은 점, 아이 마음속에서 자라난 공포
ㅇ(공포의확대) 연못과 산기슭의 검은 점은 실제 사건의 단서라기보다, 4·3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아이의 마음속에서 괴물처럼 부풀려진 맹목적 공포를 상징함.
ㅇ(연못의의미) 연못은 구체적인 비밀을 감춘 장소가 아니라, 어린 화자가 감당하지 못한 공포와 불안을 끌어안는 내면의 장소임.
ㅇ(검은점의의미) 산기슭에서 시작된 검은 점과 굴뚝도깨비 같은 이미지는 아버지, 산, 공비, 산불의 기억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뒤엉키며 커져가는 과정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연못과 검은 점은 역사적 폭력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가 그것을 감각과 환상, 공포의 이미지로 받아들였음을 드러내는 장치임.
라. 산불과 불탄 시신
ㅇ(불과물의대비) 산불은 폭력과 죽음, 불탄 고향과 지워진 아버지의 흔적을 상징함. 반대로 산에서 아버지가 물을 이끌고 내려오기를 바라는 환상은 그 불과 공포를 씻어내고 싶은 아이의 무의식적 갈망임.
ㅇ(환상의좌절) 그러나 비는 오지 않고, 물도 흐르지 않으며, 산불은 꺼지지 않음. 아이의 환상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결국 학교 운동장에는 불탄 공비의 시체가 전시됨.
ㅇ(아버지의소멸) 아버지는 죽어서도 아버지로 돌아오지 못함. 가족의 이름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탄 공비의 시체라는 공포의 이미지로만 남음.
ㅇ(핵심의미) 이 장면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실을 보여줌. 시대는 한 사람의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가 품었던 뜻과 이름, 가족에게 돌아올 권리까지 함께 지워버림.

3. 작품의 핵심 주제
가.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아버지와 이름의 훼손
ㅇ(아버지의뜻) 아버지는 단순한 도피자나 범죄자가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 현실과 기득권 질서에 맞서려 했던 인물로 볼 수 있음.
ㅇ(낙인의폭력) 그러나 그의 뜻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시대의 언어 속에서 ‘산폭도’나 ‘공비’라는 이름으로 덮여버림.
ㅇ(이름의박탈) 아버지는 가족에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지만 시대의 언어 속에서는 위험한 존재로 불림. 이는 4·3이 생명뿐만 아니라 가족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와 관계마저 파괴했음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작품은 4·3의 비극이 사람의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의 뜻과 이름까지 왜곡하고 지워버렸음을 보여줌.
나. 그리움과 공포가 뒤섞인 아버지의 기억
ㅇ(복합감정) 화자는 아버지를 단순히 그리워하지 않음. 그는 아버지를 기다리면서도 무서워하고, 아버지가 찾아오기를 바라면서도 그 방문이 가족을 위험하게 할까 두려워함.
ㅇ(수치와죄책감) 아버지가 산폭도 또는 공비로 불리는 상황에서 아이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함.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숨기려 했던 감정은 훗날 죄책감으로 되돌아옴.
ㅇ(핵심의미) 이 작품의 아버지는 사랑과 공포, 그리움과 수치, 기다림과 회피가 한꺼번에 뒤엉킨 존재임. 작가는 이 복합감정을 통해 국가폭력의 상처가 아이의 내면에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보여줌.
다. 아이의 시선으로 경험한 역사적 폭력의 왜곡
ㅇ(아이의인식) 어린 화자는 이념이나 정치, 토벌과 산사람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함. 그는 아버지의 땀 냄새, 할머니의 침묵, 검은 점, 연못, 산불, 불탄 시체 같은 감각적 이미지로 사건을 받아들임.
ㅇ(파편적서술) 사건을 논리적 인과로 설명하지 않고 아이의 감각, 환상, 공포가 뒤섞인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역사적 폭력이 개인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주는 작법임.
ㅇ(핵심의미) 작품의 파편적 서술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감당하지 못한 역사적 폭력이 기억 속에서 어떻게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굳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임.
라. 불과 물의 대비
ㅇ(불의이미지) 산불, 불탄 마을, 불탄 시신은 시대의 폭력과 죽음, 지워진 아버지의 흔적을 상징함.
ㅇ(물의이미지) 반대로 연못과 산에서 내려오는 물의 환상은 그 불을 끄고 죽음의 흔적을 씻어내고 싶은 아이의 바람을 상징함.
ㅇ(좌절된정화) 그러나 물은 실제로 흐르지 않고, 비도 오지 않음. 불은 꺼지지 않으며, 아버지는 결국 불탄 공비의 시체라는 이미지로 남음.
ㅇ(핵심의미) 작품은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 아이가 바라는 정화와 구원이 현실에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줌.

4. 종합 평가
가. 최종 평가
ㅇ(작품의의) 「아버지」는 4·3을 거시적 역사로 다루기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한 아이의 내면을 통해 국가폭력이 한 인간의 심연에 남긴 흉터를 미시적으로 짚어낸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밤중의 방문, 땀 냄새, 연못, 검은 점, 산불, 불탄 시신 같은 이미지 속에 남겨둠으로써 기억의 불확실성과 상처의 깊이를 드러냄.
ㅇ(한계평가) 서사가 파편화된 이미지와 환상 위주로 전개되어 독해가 까다로울 수 있으나, 이는 정리되지 않은 채 불쑥불쑥 되살아나는 트라우마의 성질을 그대로 활자화한 결과임.
ㅇ(최종정리) 이 작품은 부조리한 시대를 바꾸려 했던 아버지가 ‘산폭도’라는 낙인 속에 지워지고, 그 뜻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아이가 공포와 수치, 죄책감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는 작품임. 작품은 제주 4·3이 한 사람의 죽음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과 뜻, 그리고 가족의 사랑까지 공포와 침묵, 죄책감으로 바꾸어놓은 폭력이었음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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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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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거울앞에서」
: 잃어버린 가족과 고향 앞에서 텅 빈 내면을 마주하는 무력한 기다림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거울앞에서」는 뚜렷한 사건 전개보다 완주라는 인물의 불안한 의식 흐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심리 소설임.
ㅇ(핵심내용) 작품은 누이를 기다리는 하루의 시간을 통해, 가족의 부재, 동생 완석의 행방불명, 실패한 사랑,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한 사람의 내면에 어떻게 뒤섞이는지를 보여줌.
ㅇ(검토방향) 사건의 결말을 추적하기보다, 기다림 속에서 완주의 공허와 무력감이 파편화되어 드러나는 과정을 따라가야 함.
나. 제목의 상징적 의미
ㅇ(상징적거울) 작품 속에 실제 거울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라진 사람들과 잃어버린 장소들이 완주의 텅 빈 내면을 되비추는 상징적 장치로 기능함.
ㅇ(핵심의미) 「거울앞에서」는 거울을 보는 행위가 아니라, 완주가 기다림 속에서 자기 삶의 결핍과 붕괴 직전의 불안한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작품의 방식을 압축한 제목임.

2. 핵심 서사와 인물 분석
가. 완주, 무력한 기다림 속에 갇힌 인물
ㅇ(현재상황) 완주는 종일 누이를 기다리지만, 이는 희망이라기보다 자기 삶의 결핍과 무력함을 유예하는 회피 행위에 가까움.
ㅇ(내면의흔들림) 기다림 속에서 동생 완석, 인정과의 어긋난 관계, 고향의 기억이 두서없이 떠오르며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텅 빈 자신을 확인함.
나. 누이와 완석, 가족의 부재가 만든 불안
ㅇ(누이의부재) 누이의 부재는 완주의 생활을 유지하던 최소한의 일상적 질서가 무너졌음을 뜻함.
ㅇ(완석의행방) 수배 중인 동생 완석과 형사의 요구 사이에서 가족은 안식처가 아닌 불안과 죄책감, 무력감의 근원으로 작용함.
다. 인정, 실패한 사랑과 메마른 욕망
ㅇ(관계의파탄) 약혼녀 인정과의 어긋난 기억은 사랑의 회복이 아니라 채워지지 못한 욕망과 실패한 관계의 찝찝함으로 남음.
ㅇ(거울의역할) 인정과의 기억은 과거 사랑의 아름다운 회상이 아니라, 완주가 현재 얼마나 공허하고 메마른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되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로 작용함.
ㅇ(핵심의미) 인정은 완주의 결핍을 채워주는 인물이 아니라, 과거의 욕망과 현재의 공허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드러내는 존재임.
라. 고향, 사라진 여름과 손등의 반점
ㅇ(고향상실) 완주에게 고향은 향수의 공간이 아니라 불탄 마을, 어둠, 텅 빈 운동장 같은 불길하고 파편화된 상실의 이미지로 남아 있음.
ㅇ(벌레반점) 결말부 손등에서 짓이겨진 작은 벌레의 푸른 흔적은 이미 잃어버리고 희미한 자국으로만 남은 고향과 어린 시절의 상실감을 압축하는 상징임.

3. 작품의 핵심 주제
가. 기다림의 역설과 무력함
ㅇ(기다림의본질) 완주는 누이, 동생, 과거의 사랑을 기다리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함. 기다릴수록 잃어버린 것들만 더 명확해지고, 그는 절대적 무력감 속에 놓임.
나. 파편화된 내면과 4·3의 그림자
ㅇ(역사적잔상) 작품은 4·3을 직접 언급하지 않음. 그러나 불탄 마을, 어둠, 텅 빈 운동장 같은 이미지는 현기영 작품세계의 맥락 속에서 제주 4·3의 그림자를 강하게 떠올리게 함.
ㅇ(고향의의미) 이 작품에서 고향은 회복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적 폭력과 상실의 기억이 희미한 감각으로 남은 장소임. 완주는 고향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도, 완전히 잊지도 못한 채 그 잔상 속에 갇혀 있음.
ㅇ(서술방식) 독자가 소설을 난해하게 느끼는 이유는 작품이 사건을 인과관계에 따라 정리해 설명하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과 불안으로 흐트러진 완주의 의식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임.
ㅇ(핵심의미) 의식의 흐름 기법은 사건의 앞뒤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바로 그 혼란을 통해 완주의 붕괴 직전 내면을 직접 체험하게 함.

4. 종합 평가
가. 최종 평가
ㅇ(작품의의) 「거울앞에서」는 거대한 서사 대신 심리에 집중하여, 가족의 실종과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공허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임.
ㅇ(한계평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많이 기대고 있어 사건의 인과관계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고, 독자는 누가 왜 사라졌는지, 완주가 무엇을 정확히 기다리는지 곧바로 파악하기 어려움. 이 때문에 서사적 타격감은 약하고 독해의 피로감이 크게 느껴질 수 있음.
ㅇ(최종정리) 이 작품은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의 부재와 실패한 사랑, 어두운 고향의 기억 속에서 붕괴 직전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심리적 체험에 가까움. 결말의 푸른 벌레 흔적처럼, 완주에게 고향과 어린 시절은 이미 사라지고 희미한 자국으로만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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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한낮, 어느 틈엔가 들물은 노출이 심했던 사진처럼 온통 하얗게 완주를 에워쌌다. 바닷물은 점점 물높이를 키우면서 그가 앉은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헤엄칠 줄도 모르는 내가 왜 겁도 없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있었을까? 그때 마침 지나가던 뗏마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한없이 넓은 캔버스처럼 흰 반사광을 입은 바닷물에 에워싸인채 꼼짝도 않고 앉아서 낚싯줄을 응시하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밀짚모자로 그늘진 옆얼굴, 네거필름 같은 얼굴, 살점이 벗겨져내린 희디흰 해골, 아마 그때 난 막연히 죽음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생이별이란 생초목에 불난다더니, 하여간 지독한 거였지. - P302

모든 집들이 저 어둡고 질펀한 평면의 품 안으로 여며들고 있다. 능선 위 잎 털린 나무마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목탄화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 어째서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나? 왜 밤마다 어둠은 내려와 염하는 어두운 손길로 사물들을 조그맣게 싸서 빛과 운동이 빠져나간 가공의 의뭉한 뭉치로 만들어버리는가? - P303

인정이를 만난 것도 말하자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그건 연분도 숙명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일 뿐. 자, 그러니 인정이 이젠 미련 없이 너를 저 익명의 시절로 돌려보내주마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완석이 녀석이 죽어서 돌아오건 살아서 돌아오건 난 기다려야 해. 막무가내로 기다려야 해. 완석이도, 인정이너도, 완석이를 찾던 최 형사도 발이 끊긴 이 방구석에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기다리는 거다. 이긴 겨울 내내. - P304

그런데 누이는 오늘도 안 오니 어찌 된 일일까? 이번엔 누이마저발이 끊기나? 누이 차롄가? 완주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듯 답답하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나? 새로 시작했다는옷장사, 넓은 비닐천 위에 싸구려 옷을 가득 쌓아놓고 팔다가 단속반이 먼발치로 보이기만 해도 비닐천의 네 귀퉁이에 달린 끈을 끌어모아 등에 들쳐메고 냅다 도망치는 그런 장사, 그게 또 거덜나고말았나? 아기침대를 만들어 팔다가 폭삭 망하고 나서 비옷장사, 과일행상, 채소장사, 포장마차 술장사, 매형이 손수레를 끌고 누이가뒤에서 밀고, 나중에는 손수레마저 도둑맞고...... 이제 매형은 취중에 누이에게 손찌검까지 한단다. 한달 보름 전 일요일날 찾아와서 십오만원을 빌려가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던 누이 - P304

이때 문득 오른쪽 손등에 초록색 반점이 하나 뚝 떨어졌다. 뭘까? 아주 조그만 풀벌레. 하도 작아서 발이 안 보일 지경이다. 여태 이런 여름것이 살아 있었다니.
완주는 별생각 없이 왼쪽 손가락으로 그 곤충을 부드럽게 누른 채옆으로 칙 그어버린다. 그러자 벌레는 없어지고 대신 손등에 푸른잔디 잎새 같은 흔적만 남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치 그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P305

나는 열살 때 고향을 등진 후 여태껏 찾아가본 일이 없다. 게다가 어지간히 방심한 상태가 아니면 고향 추억에 잠기는 일도 퍽 드문 편이다.
죽어 있는 마을,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으로 지워진 마을, 노형리 함박이굴이라는 지리상의 대견한 장소에서 조그만 반점으로 응축되어 내 상상 속으로 옮아와버린 지금, 고향이란 게 대체 무얼까? 아이 시절의 그 여름밤같이 새깜깜한 망각이고향의 윤곽을 헐고 안으로 함몰시킨 뒤 최후로 운동장의 흰 반점만을 나에게 남겨준 듯이 여겨진다. 오랜 방학으로 텅 비어 있던운동장, 불타버린 마을을 벗어나며 마지막으로 본 그 희디희던 운동장 말이다. - P308

그런데 운동장의 넓은 백색은 조용히 유동하며 복판의 흑점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산폭도라고 했다. 미친 짓, 개죽음이라고 했다. 맹목적인 정열이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타올랐던 끔찍한 불꽃, 그러나 이제 그는 검게 타버린나뭇등걸처럼 꺼버덩 나둥그러져 있었다. 타버린 숯이었다. 그냥숯이었다. - P309

사람들은 그 송장이 너무 타버려서 누군지 통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게 내 아버지라고 귀띔해주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게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돼버렸나? - P309

그러다가 나는 이 연못과 딱 마주쳤던 거였다. 쇠고삐 쥔 손을얼른 뒤로 돌리며 주춤 물러섰다. 풀숲에서 뱀을 만날 때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연못이, 이쪽 방심상태를 얕잡고 홀연 틈입해온 부정한 길짐승같이 느껴졌던 거였다. 맞았어, 맞았어. 나는 너무멀리 와버렸던 거야. 마을에서 너무 멀리 나가면 산사람들이 나타나서 잡아간다고 했지. 정말 산은 한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선 듯했다. 연못을 내 소유로 결정한 그날부터 나에게 이러한 낯선 소심증이 들쑤시고 일어나고 말았다. - P312

그런데도 과연 이 비밀을 어린아이의 조그만 가슴속 어둠에다가두고 묵힐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반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끔 손으로 확인해보곤 하는 허리띠 고리나 속돌 두낱처럼 외부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연못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엄청났다. - P313

닷새 전 한밤중에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그렇다. 두어달에 한번쯤 몰래 찾아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잠든 여름밤 그 칠흑 같은 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집에 당도하였고, 설핏 잠이 깨었을 때는 이미 내 머리맡을 등지고 앉아 있던 거였다. 그날밤도 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아버지가 와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진 등 뒤에서 자는 척하고 귀를 바싹 기울였다. (할머니는 뾰족 세워진 내 한쪽 귀를 여느 때처럼 손바닥으로 닫아주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몸에선 쉬어빠진 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등잔불이 뿌지직뿌지직 타들어갔다. - P314

"당장 읍내 형님한테로 이살 가야 한다니깐요. 내 참, 동네가 온통불질러진다니깐 그러네."
마술에 걸린 듯 불끈거리던 악력, 아버지는 빈 담뱃갑을 찌그러뜨리는 대신 다른 뭐를 찌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아버지, 아버지.
왜 이사를 가야 해요?
하지만 아침에 막상 토끼눈같이 눈이 빨개진 할머니를 보자, 나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 P315

이제는 그 새까만 점이 자라는 시간이다. 무척 먼 곳, 분명 산사람들이 산다는 산기슭에서부터 점은 구르기 시작했다. 어둠 위를부드럽게 뒹군다. 고무공같이 가볍게 튀어오른다. 풀썩 물크러지기도 하고 다시 어둠을 뭉치면서 떼굴떼굴 뒹굴어 왔다. 때는 대개자정 무렵이었는데 밤이 거듭할수록 그 점은 매일 조금씩 커졌다.
또 그만큼 동네와 거리도 가까워진 듯하였다. 그것은 소리로 치면, 둥둥 커져가는 북소리라고 할까. 오밤중을 뭉쳐 먹으며 매일 자라나는 이놈은 대체 무얼까?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내 상상력을 먹고 살찌는 걸까? 아버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호미를 가져오라구 했잖니?" - P316

그 백회벽은 아이들의 손이 닿는 높이까지 빈틈없이 낙서로 채워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크레용 글씨가 열기로 끈적거렸다. 63÷9=7, 머리 긴 사람의 얼굴, 때 묻은 성기를 지웠다. 이렇게 한낮을구석구석 허비하면서 나는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그 까만 점이 자라는 것이다! - P318

사마귀점만 하던 게 호박 크기가 되자, 그 어둠 덩어리는 요 며칠 사이에 아주 성급하게 자라났다. 장독만큼 커지고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전혀 감당 못할 어떤 엄청난 결과를 향해서 막무가내로 커가는 거였다. 두려웠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이제는 두려웠다. 열살 나이에는 도시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질문으로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어둠 덩어리는 동구 앞 늙은 팽나무 밑을지나자 길쭉한 원통이 되어 굴러왔다. 제재소 앞에 쌓인 굵은 통나무들 중 하나가 떨어져 떼굴떼굴 뒹구는 모양과 흡사했다. - P318

산에서 아버지가 왔어. 설핏 잠들었던 할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목이 바싹 말라붙어서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나쁜 꿈을 꾼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푸슬거리며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나갔다. 외양간에서 소 되새김질 소리가 들렸다.
마당을 가로질러 찍찍 고무신 끄는 소리, 뜰 한 귀퉁이에서 소변보는 눈치더니 곧 돌아왔다. 그런데 저것 봐, 저기 빨간 게 뭐야?
문밖에 아버지가 와서 담배 피우고 있잖아. 무서워, 무서워. 할머니가방금 들어온 문밖 어둠속에 뱀딸기같이 붉은 점이 타고 있지 않은가. 그 선을 타고그러나 그건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담뱃불이 아니었다.
멀리 컴컴한 산에 찍혀 있는 산불이었다. 그날밤부터 산불이 타기시작했다. - P319

그때였다. 바로 곁에서 첨벙 물 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숨어서돌멩이를 던진 게 분명했다. 들켰구나.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큰일 났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후회가 바늘끝처럼 날카롭게 일어났다. 두번째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물살에 세차게 박히는 것으로 보아 힘껏 팔매 친 모양이다. 적은 보이지 않고 나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다. 호흡을 멈춘채돌이 날아온 곳과 반대 방향으로 황망히 헤엄쳐갔다. - P320

붙잡고 있는 물 묻은 내 오른손을 지그시 밟아 누르는 맨발이 보였다. 발등에 뿌옇게 흙먼지가 올라앉아 있다.
"도루 들어가!"
더러운 발의 명령에 나는 순순히 복종했다.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물러가면서 완실이를 치어다본다. 머리 위로 힘차게 굽혀 치켜올린 오른 손아귀에서 조약돌 한개가 반짝거렸다. 움켜쥔 그 손도아슬아슬한 정점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이마로달려들고 싶은 듯이 돌멩이는 손아귀에서 바둥거린다. - P321

그런데 잠시 후 완실이는 치켰던 팔을 내려뜨렸다. 조약돌을 다른 손에 옮겨 쥐더니 땀이 뺀 손바닥을 바지에다 쓱쓱 문지른다.
다시 바른손에 쥐고서 무게를 가늠해보듯 조약돌을 흔들흔들해 보인다. 조약돌의 표면이 둥글고 매끈한 게 아주 여물어 보인다.
"년 독 안에 든 쥐야!"
그 음성은 정말 쥐 한마리 든 빈 독 안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이상스럽게 웅덩이 안에 횡횡 울려퍼졌다. - P321

자맥질하고 말았다. 텅 빈 수면, 텅 빈 수면은 불안하다.
완실이는 빈 수면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고 있으리라. 고함지르며 이 바위 저 바위로 길길이 날뛰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물속에선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가슴이 몹시 뛰고, 비슷한 속도로 귓속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조급하게 일어났다. 기다란 물풀이 허벅다리에 흐느적 스쳐갔다. 어두운 물바닥을 더듬어 돌멩이를 찾았다. 멀렁한 진흙이 만져지고 손끝에 차인 자갈이 탁하고음산한 소리를 냈다. 물때가 묻어 미끌미끌한 돌멩이 두개를 움켜쥐자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 P324

저건 영락없이 밤에 본 굴뚝도깨비야. 사타구니 밑으로 시꺼먼검댕을 흩날리던 그 굴뚝도깨비가 저놈일지도 몰라. 아니다, 아니다. 그건 밤에 먼 산에서 걸어내려오던 아버지였어. 두어달에 한번쯤 찾아오는 아버지. 내가 잠든 여름밤, 참 먼 곳에서 칠흑 같은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자꾸자꾸 커지면서 집 앞에 당도했던거다. 덩덩 북소리처럼 커지던 굴뚝도깨비, 다락같이 큰 키, 사마귀 같은 점이 굴뚝도깨비로 다 자라버렸는데도 아버지는 종내 오지 않았다. 그렇다. 이젠 들켜버린 거다. 비밀은 그 부정한 몸을 노출시켰다. 아버지는 머리가 긴 산폭도였다! 읍내 순경 세명이 차를타고 와 할머니를 만나고 간 저녁에 나는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산불이 타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도깨비를 만난 요전날 밤에 깜깜한 문밖 어둠속에 담뱃불똥처럼 찍혀 있던 붉은 점이었다. - P326

빨갱이 산폭도들이 습격해온단다. 낮에도 산불이 타는 것을 알 수있었다. 낮에 보면 서편 산등성이에 시꺼멓게 불탄 자리가 소 잔등에 생긴 버짐같이 흉스러웠다. 산불의 열도를 돋우며 여름 해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산불이 탄다. 산은 아득하게 멀었지만, 살갗 태우는 낮의 열풍 속에 산불 냄새가 분명 섞여 있는 듯했다. 매캐한 냄새. 거기다가 웬 몸집 큰 산짐승이 불에 그슬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타죽는다. 타 죽는다. 해는 아예 그 둥근 윤곽이 허물어져 완回味실이네 풀뭇집 쇳물 같은 게 너울거리며 중천을 태웠다. - P327

완실이네 풀무간에서 만든 새 바퀴를 단 구루마에 이삿짐을 싣고서 대식이네가 맨 먼저 동네를 떠났다.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불을 놓는단다. 동네가 몽땅 불탈 거란다. - P328

완실이는 여전히 푸른 공중에 까맣게 걸려 있다. 완실아, 이젠 더못 참겠어. 벗어둔 마른 옷가지들이, 광택이 눈부시게 흐르는 바위아래로 금세 미끄러져내릴 것만 같다. 그늘에 벗어놓을걸. 나는 점점 게을러졌다. 더 못 참겠어. 두 다리는 무거운 돌멩이로 채워진자루처럼 바닥으로 늘어지고 몸 구석구석에 쥐가 생기려는지 응어리가 딱딱하게 불거졌다. 물 온도를 전혀 감각할 수 없다. 몸뚱어리가 물에 부풀려 퉁퉁해지고 탁한 물의 농도 안으로 허물어져가는느낌이 더욱 절실해진다. 물의 부력 속은 뻐끔하게 구멍 뚫린 느낌이다. 그 매끄러운 틈새로 몸이 조금씩 빠져들어가는 거다. - P329

번쩍거리는 바윗날, 바위틈새의 시꺼먼 그림자. 햇빛은 벗어놓은 옷을 지속적인 파장으로 짓눌러댔다. 그런데도 바지의 구겨진주름살 갈피마다 짙은 그늘이 우글거린다. 아버지가 꾸겨뜨린 담뱃갑 같구나. 머릿속이 점점 혼미해진다. 허벅다리 살집에 달라붙어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바짓가랑이가 저렇게 볼품없이 찌그러져있다니. 저 바지를 일으켜세우고 그 텅 빈 공동을 양다리로 팽팽하게 채우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몰라.
공회당 앞마당에서 본 산폭도 송장의 흰 아랫도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에 젖은 가마니턱 밑으로 핏기 가신 허벅다리가 비어져나와 있었지. 무성하게 피어오른 흐린 날씨가 흰 허벅다리를 파먹고 있었지. 누가 송장의 아랫도리를 벗겨놓았나? 사람이 죽으면 바지를 벗겨버리나? 옷이 벗겨졌으니 나도 송장이 되는 걸까? - P329

완실아, 이젠 그만해. 더 참을 수 없어. 이젠 다 끝난 거야. 비가와야 해. 이젠 비가 올 차례야. 저 산불을 꺼야지. 비가 억수로 쏟아져야지. 그래, 완실아, 비가 오는 거야. 자, 봐, 사물의 맨 말미에서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야. 노여운 죽창처럼 빗줄기가 무섭게 내리꽂히는 거야. 타버린 잿가루가 풀썩풀썩 튀어오르고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하다. 창호지에 번지는 시원한 누기. 완실아, 우리는 밤새도록 물이 시내를 타고 먼 산에서 마을까지 천천히 걸어오는 꿈을 꾸었지. 아침에 깨어나서 산골짝마다 번쩍거리는 흰 물줄기를보고 말리라. 고운 물을 한아름 덩실 안고 흘러가는 시내를 보고말리라. 산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가뭄 타던 산. 그 사람들이 산불까지 놓았어. 산불을 끄고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아침에 아이들은 길에 괸 물을 튀기며 냇가로 내달을 거야. - P330

뜨거운 하상은 수증기와 흙탕물이 범벅이 되어 뭉게뭉게 부풀어오른다. 물은 점점 수역을 넓히면서 사방으로 질펀한 공간을 터놓는다. 백발의 수로(水路)노인은 어디 있나? 내가 터지면 수로노인이 선두에서 물의 진행을 이끈다던데. 그런데 저게 뭐야? 더러운흙탕물의 선두에 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폭도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다!
아버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손에 쥔 피 묻은 죽창으로 앞물을 두들겨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다. 갈라진 물무리들은 왈칵왈칵 사방으로 퍼져 메마른 모래와 자갈을 빈틈없이 먹어치운다. - P331

나는 어느새 죽을힘을 다해서 물가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고막은 내가 일으키는 물소리에 뒤덮여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때 머리 정수리에 짧고 강한 충격이 왔다. 완실이의 팔맷돌이었다. 대번에 나의 동작은 꺾이고 긴장이 썰물처럼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향긋한 피 냄새. - P331

그러나 그건 환각이었을 뿐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시냇물도 흐르지 않았다. 산불도 꺼지지 않았다. 한밤중 불붙은 그 산에서 산폭도들이 산불을 옮겨왔다. 마을은 불타고 그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불에 탄 공비의 시체 하나가 전시되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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