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한낮, 어느 틈엔가 들물은 노출이 심했던 사진처럼 온통 하얗게 완주를 에워쌌다. 바닷물은 점점 물높이를 키우면서 그가 앉은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헤엄칠 줄도 모르는 내가 왜 겁도 없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있었을까? 그때 마침 지나가던 뗏마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한없이 넓은 캔버스처럼 흰 반사광을 입은 바닷물에 에워싸인채 꼼짝도 않고 앉아서 낚싯줄을 응시하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밀짚모자로 그늘진 옆얼굴, 네거필름 같은 얼굴, 살점이 벗겨져내린 희디흰 해골, 아마 그때 난 막연히 죽음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생이별이란 생초목에 불난다더니, 하여간 지독한 거였지. - P302

모든 집들이 저 어둡고 질펀한 평면의 품 안으로 여며들고 있다. 능선 위 잎 털린 나무마저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목탄화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 어째서 사물은 저렇게 덧없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나? 왜 밤마다 어둠은 내려와 염하는 어두운 손길로 사물들을 조그맣게 싸서 빛과 운동이 빠져나간 가공의 의뭉한 뭉치로 만들어버리는가? - P303

인정이를 만난 것도 말하자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그건 연분도 숙명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일 뿐. 자, 그러니 인정이 이젠 미련 없이 너를 저 익명의 시절로 돌려보내주마난 기다려야 하는 거야. 완석이 녀석이 죽어서 돌아오건 살아서 돌아오건 난 기다려야 해. 막무가내로 기다려야 해. 완석이도, 인정이너도, 완석이를 찾던 최 형사도 발이 끊긴 이 방구석에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기다리는 거다. 이긴 겨울 내내. - P304

그런데 누이는 오늘도 안 오니 어찌 된 일일까? 이번엔 누이마저발이 끊기나? 누이 차롄가? 완주는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듯 답답하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나? 새로 시작했다는옷장사, 넓은 비닐천 위에 싸구려 옷을 가득 쌓아놓고 팔다가 단속반이 먼발치로 보이기만 해도 비닐천의 네 귀퉁이에 달린 끈을 끌어모아 등에 들쳐메고 냅다 도망치는 그런 장사, 그게 또 거덜나고말았나? 아기침대를 만들어 팔다가 폭삭 망하고 나서 비옷장사, 과일행상, 채소장사, 포장마차 술장사, 매형이 손수레를 끌고 누이가뒤에서 밀고, 나중에는 손수레마저 도둑맞고...... 이제 매형은 취중에 누이에게 손찌검까지 한단다. 한달 보름 전 일요일날 찾아와서 십오만원을 빌려가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던 누이 - P304

이때 문득 오른쪽 손등에 초록색 반점이 하나 뚝 떨어졌다. 뭘까? 아주 조그만 풀벌레. 하도 작아서 발이 안 보일 지경이다. 여태 이런 여름것이 살아 있었다니.
완주는 별생각 없이 왼쪽 손가락으로 그 곤충을 부드럽게 누른 채옆으로 칙 그어버린다. 그러자 벌레는 없어지고 대신 손등에 푸른잔디 잎새 같은 흔적만 남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치 그벌레가 마지막 여름인 것처럼. - P305

나는 열살 때 고향을 등진 후 여태껏 찾아가본 일이 없다. 게다가 어지간히 방심한 상태가 아니면 고향 추억에 잠기는 일도 퍽 드문 편이다.
죽어 있는 마을,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으로 지워진 마을, 노형리 함박이굴이라는 지리상의 대견한 장소에서 조그만 반점으로 응축되어 내 상상 속으로 옮아와버린 지금, 고향이란 게 대체 무얼까? 아이 시절의 그 여름밤같이 새깜깜한 망각이고향의 윤곽을 헐고 안으로 함몰시킨 뒤 최후로 운동장의 흰 반점만을 나에게 남겨준 듯이 여겨진다. 오랜 방학으로 텅 비어 있던운동장, 불타버린 마을을 벗어나며 마지막으로 본 그 희디희던 운동장 말이다. - P308

그런데 운동장의 넓은 백색은 조용히 유동하며 복판의 흑점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산폭도라고 했다. 미친 짓, 개죽음이라고 했다. 맹목적인 정열이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타올랐던 끔찍한 불꽃, 그러나 이제 그는 검게 타버린나뭇등걸처럼 꺼버덩 나둥그러져 있었다. 타버린 숯이었다. 그냥숯이었다. - P309

사람들은 그 송장이 너무 타버려서 누군지 통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게 내 아버지라고 귀띔해주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게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돼버렸나? - P309

그러다가 나는 이 연못과 딱 마주쳤던 거였다. 쇠고삐 쥔 손을얼른 뒤로 돌리며 주춤 물러섰다. 풀숲에서 뱀을 만날 때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연못이, 이쪽 방심상태를 얕잡고 홀연 틈입해온 부정한 길짐승같이 느껴졌던 거였다. 맞았어, 맞았어. 나는 너무멀리 와버렸던 거야. 마을에서 너무 멀리 나가면 산사람들이 나타나서 잡아간다고 했지. 정말 산은 한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선 듯했다. 연못을 내 소유로 결정한 그날부터 나에게 이러한 낯선 소심증이 들쑤시고 일어나고 말았다. - P312

그런데도 과연 이 비밀을 어린아이의 조그만 가슴속 어둠에다가두고 묵힐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반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끔 손으로 확인해보곤 하는 허리띠 고리나 속돌 두낱처럼 외부로부터 완전히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연못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엄청났다. - P313

닷새 전 한밤중에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그렇다. 두어달에 한번쯤 몰래 찾아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잠든 여름밤 그 칠흑 같은 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집에 당도하였고, 설핏 잠이 깨었을 때는 이미 내 머리맡을 등지고 앉아 있던 거였다. 그날밤도 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아버지가 와 있었다. 아버지의 그늘진 등 뒤에서 자는 척하고 귀를 바싹 기울였다. (할머니는 뾰족 세워진 내 한쪽 귀를 여느 때처럼 손바닥으로 닫아주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몸에선 쉬어빠진 땀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등잔불이 뿌지직뿌지직 타들어갔다. - P314

"당장 읍내 형님한테로 이살 가야 한다니깐요. 내 참, 동네가 온통불질러진다니깐 그러네."
마술에 걸린 듯 불끈거리던 악력, 아버지는 빈 담뱃갑을 찌그러뜨리는 대신 다른 뭐를 찌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아버지, 아버지.
왜 이사를 가야 해요?
하지만 아침에 막상 토끼눈같이 눈이 빨개진 할머니를 보자, 나는 아무 말도 물어보지 못하고 말았다. - P315

이제는 그 새까만 점이 자라는 시간이다. 무척 먼 곳, 분명 산사람들이 산다는 산기슭에서부터 점은 구르기 시작했다. 어둠 위를부드럽게 뒹군다. 고무공같이 가볍게 튀어오른다. 풀썩 물크러지기도 하고 다시 어둠을 뭉치면서 떼굴떼굴 뒹굴어 왔다. 때는 대개자정 무렵이었는데 밤이 거듭할수록 그 점은 매일 조금씩 커졌다.
또 그만큼 동네와 거리도 가까워진 듯하였다. 그것은 소리로 치면, 둥둥 커져가는 북소리라고 할까. 오밤중을 뭉쳐 먹으며 매일 자라나는 이놈은 대체 무얼까?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내 상상력을 먹고 살찌는 걸까? 아버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호미를 가져오라구 했잖니?" - P316

그 백회벽은 아이들의 손이 닿는 높이까지 빈틈없이 낙서로 채워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크레용 글씨가 열기로 끈적거렸다. 63÷9=7, 머리 긴 사람의 얼굴, 때 묻은 성기를 지웠다. 이렇게 한낮을구석구석 허비하면서 나는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그 까만 점이 자라는 것이다! - P318

사마귀점만 하던 게 호박 크기가 되자, 그 어둠 덩어리는 요 며칠 사이에 아주 성급하게 자라났다. 장독만큼 커지고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전혀 감당 못할 어떤 엄청난 결과를 향해서 막무가내로 커가는 거였다. 두려웠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게 이제는 두려웠다. 열살 나이에는 도시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질문으로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어둠 덩어리는 동구 앞 늙은 팽나무 밑을지나자 길쭉한 원통이 되어 굴러왔다. 제재소 앞에 쌓인 굵은 통나무들 중 하나가 떨어져 떼굴떼굴 뒹구는 모양과 흡사했다. - P318

산에서 아버지가 왔어. 설핏 잠들었던 할머니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목이 바싹 말라붙어서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나쁜 꿈을 꾼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푸슬거리며 일어나더니 마당으로 나갔다. 외양간에서 소 되새김질 소리가 들렸다.
마당을 가로질러 찍찍 고무신 끄는 소리, 뜰 한 귀퉁이에서 소변보는 눈치더니 곧 돌아왔다. 그런데 저것 봐, 저기 빨간 게 뭐야?
문밖에 아버지가 와서 담배 피우고 있잖아. 무서워, 무서워. 할머니가방금 들어온 문밖 어둠속에 뱀딸기같이 붉은 점이 타고 있지 않은가. 그 선을 타고그러나 그건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담뱃불이 아니었다.
멀리 컴컴한 산에 찍혀 있는 산불이었다. 그날밤부터 산불이 타기시작했다. - P319

그때였다. 바로 곁에서 첨벙 물 튀는 소리가 났다. 누가 숨어서돌멩이를 던진 게 분명했다. 들켰구나.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큰일 났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후회가 바늘끝처럼 날카롭게 일어났다. 두번째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물살에 세차게 박히는 것으로 보아 힘껏 팔매 친 모양이다. 적은 보이지 않고 나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다. 호흡을 멈춘채돌이 날아온 곳과 반대 방향으로 황망히 헤엄쳐갔다. - P320

붙잡고 있는 물 묻은 내 오른손을 지그시 밟아 누르는 맨발이 보였다. 발등에 뿌옇게 흙먼지가 올라앉아 있다.
"도루 들어가!"
더러운 발의 명령에 나는 순순히 복종했다.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물러가면서 완실이를 치어다본다. 머리 위로 힘차게 굽혀 치켜올린 오른 손아귀에서 조약돌 한개가 반짝거렸다. 움켜쥔 그 손도아슬아슬한 정점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이마로달려들고 싶은 듯이 돌멩이는 손아귀에서 바둥거린다. - P321

그런데 잠시 후 완실이는 치켰던 팔을 내려뜨렸다. 조약돌을 다른 손에 옮겨 쥐더니 땀이 뺀 손바닥을 바지에다 쓱쓱 문지른다.
다시 바른손에 쥐고서 무게를 가늠해보듯 조약돌을 흔들흔들해 보인다. 조약돌의 표면이 둥글고 매끈한 게 아주 여물어 보인다.
"년 독 안에 든 쥐야!"
그 음성은 정말 쥐 한마리 든 빈 독 안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이상스럽게 웅덩이 안에 횡횡 울려퍼졌다. - P321

자맥질하고 말았다. 텅 빈 수면, 텅 빈 수면은 불안하다.
완실이는 빈 수면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하고 있으리라. 고함지르며 이 바위 저 바위로 길길이 날뛰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물속에선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가슴이 몹시 뛰고, 비슷한 속도로 귓속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조급하게 일어났다. 기다란 물풀이 허벅다리에 흐느적 스쳐갔다. 어두운 물바닥을 더듬어 돌멩이를 찾았다. 멀렁한 진흙이 만져지고 손끝에 차인 자갈이 탁하고음산한 소리를 냈다. 물때가 묻어 미끌미끌한 돌멩이 두개를 움켜쥐자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 P324

저건 영락없이 밤에 본 굴뚝도깨비야. 사타구니 밑으로 시꺼먼검댕을 흩날리던 그 굴뚝도깨비가 저놈일지도 몰라. 아니다, 아니다. 그건 밤에 먼 산에서 걸어내려오던 아버지였어. 두어달에 한번쯤 찾아오는 아버지. 내가 잠든 여름밤, 참 먼 곳에서 칠흑 같은오밤중을 쉴 새 없이 걸어서 자꾸자꾸 커지면서 집 앞에 당도했던거다. 덩덩 북소리처럼 커지던 굴뚝도깨비, 다락같이 큰 키, 사마귀 같은 점이 굴뚝도깨비로 다 자라버렸는데도 아버지는 종내 오지 않았다. 그렇다. 이젠 들켜버린 거다. 비밀은 그 부정한 몸을 노출시켰다. 아버지는 머리가 긴 산폭도였다! 읍내 순경 세명이 차를타고 와 할머니를 만나고 간 저녁에 나는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산불이 타고 있었다. 그것은 굴뚝도깨비를 만난 요전날 밤에 깜깜한 문밖 어둠속에 담뱃불똥처럼 찍혀 있던 붉은 점이었다. - P326

빨갱이 산폭도들이 습격해온단다. 낮에도 산불이 타는 것을 알 수있었다. 낮에 보면 서편 산등성이에 시꺼멓게 불탄 자리가 소 잔등에 생긴 버짐같이 흉스러웠다. 산불의 열도를 돋우며 여름 해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산불이 탄다. 산은 아득하게 멀었지만, 살갗 태우는 낮의 열풍 속에 산불 냄새가 분명 섞여 있는 듯했다. 매캐한 냄새. 거기다가 웬 몸집 큰 산짐승이 불에 그슬린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타죽는다. 타 죽는다. 해는 아예 그 둥근 윤곽이 허물어져 완回味실이네 풀뭇집 쇳물 같은 게 너울거리며 중천을 태웠다. - P327

완실이네 풀무간에서 만든 새 바퀴를 단 구루마에 이삿짐을 싣고서 대식이네가 맨 먼저 동네를 떠났다.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불을 놓는단다. 동네가 몽땅 불탈 거란다. - P328

완실이는 여전히 푸른 공중에 까맣게 걸려 있다. 완실아, 이젠 더못 참겠어. 벗어둔 마른 옷가지들이, 광택이 눈부시게 흐르는 바위아래로 금세 미끄러져내릴 것만 같다. 그늘에 벗어놓을걸. 나는 점점 게을러졌다. 더 못 참겠어. 두 다리는 무거운 돌멩이로 채워진자루처럼 바닥으로 늘어지고 몸 구석구석에 쥐가 생기려는지 응어리가 딱딱하게 불거졌다. 물 온도를 전혀 감각할 수 없다. 몸뚱어리가 물에 부풀려 퉁퉁해지고 탁한 물의 농도 안으로 허물어져가는느낌이 더욱 절실해진다. 물의 부력 속은 뻐끔하게 구멍 뚫린 느낌이다. 그 매끄러운 틈새로 몸이 조금씩 빠져들어가는 거다. - P329

번쩍거리는 바윗날, 바위틈새의 시꺼먼 그림자. 햇빛은 벗어놓은 옷을 지속적인 파장으로 짓눌러댔다. 그런데도 바지의 구겨진주름살 갈피마다 짙은 그늘이 우글거린다. 아버지가 꾸겨뜨린 담뱃갑 같구나. 머릿속이 점점 혼미해진다. 허벅다리 살집에 달라붙어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바짓가랑이가 저렇게 볼품없이 찌그러져있다니. 저 바지를 일으켜세우고 그 텅 빈 공동을 양다리로 팽팽하게 채우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몰라.
공회당 앞마당에서 본 산폭도 송장의 흰 아랫도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비에 젖은 가마니턱 밑으로 핏기 가신 허벅다리가 비어져나와 있었지. 무성하게 피어오른 흐린 날씨가 흰 허벅다리를 파먹고 있었지. 누가 송장의 아랫도리를 벗겨놓았나? 사람이 죽으면 바지를 벗겨버리나? 옷이 벗겨졌으니 나도 송장이 되는 걸까? - P329

완실아, 이젠 그만해. 더 참을 수 없어. 이젠 다 끝난 거야. 비가와야 해. 이젠 비가 올 차례야. 저 산불을 꺼야지. 비가 억수로 쏟아져야지. 그래, 완실아, 비가 오는 거야. 자, 봐, 사물의 맨 말미에서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야. 노여운 죽창처럼 빗줄기가 무섭게 내리꽂히는 거야. 타버린 잿가루가 풀썩풀썩 튀어오르고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하다. 창호지에 번지는 시원한 누기. 완실아, 우리는 밤새도록 물이 시내를 타고 먼 산에서 마을까지 천천히 걸어오는 꿈을 꾸었지. 아침에 깨어나서 산골짝마다 번쩍거리는 흰 물줄기를보고 말리라. 고운 물을 한아름 덩실 안고 흘러가는 시내를 보고말리라. 산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가뭄 타던 산. 그 사람들이 산불까지 놓았어. 산불을 끄고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산에서 물이 내려온다! 아침에 아이들은 길에 괸 물을 튀기며 냇가로 내달을 거야. - P330

뜨거운 하상은 수증기와 흙탕물이 범벅이 되어 뭉게뭉게 부풀어오른다. 물은 점점 수역을 넓히면서 사방으로 질펀한 공간을 터놓는다. 백발의 수로(水路)노인은 어디 있나? 내가 터지면 수로노인이 선두에서 물의 진행을 이끈다던데. 그런데 저게 뭐야? 더러운흙탕물의 선두에 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폭도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다!
아버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손에 쥔 피 묻은 죽창으로 앞물을 두들겨 갈래갈래 찢어놓고 있다. 갈라진 물무리들은 왈칵왈칵 사방으로 퍼져 메마른 모래와 자갈을 빈틈없이 먹어치운다. - P331

나는 어느새 죽을힘을 다해서 물가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고막은 내가 일으키는 물소리에 뒤덮여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때 머리 정수리에 짧고 강한 충격이 왔다. 완실이의 팔맷돌이었다. 대번에 나의 동작은 꺾이고 긴장이 썰물처럼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향긋한 피 냄새. - P331

그러나 그건 환각이었을 뿐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시냇물도 흐르지 않았다. 산불도 꺼지지 않았다. 한밤중 불붙은 그 산에서 산폭도들이 산불을 옮겨왔다. 마을은 불타고 그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불에 탄 공비의 시체 하나가 전시되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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