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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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눈을 따라 다시 유럽의 도시를 걷다
― 『유럽도시기행 3』을 읽으며

나는 유시민의 글을 오래 읽어왔다.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국회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되던 시절부터 그의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했다.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한때는 유시민이 자기 생각과 편견에 지나치게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아 그의 글에서 조금 멀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금도 새 책이 나오면 거의 빠짐없이 읽고 있다.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문장으로 풀어내는지는 늘 궁금하다.

『유럽도시기행』 1권과 2권도 처음에는 종이책으로 구입해 읽었다. 읽는 동안에는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책의 깊이가 아주 깊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한 번 읽은 뒤 계속 책장에 두고 자료처럼 다시 찾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 두 권 모두 중고로 팔았다. 그래서 3권이 나왔을 때는 종이책 대신 전자책을 기다렸다가 구입했다. 어차피 앞선 두 권도 책장에 남아 있지 않았고, 요즘은 전자책이 필요한 단어나 지명을 검색하기에도 훨씬 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유시민의 책을 소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비롯해『경제학 카페』,『청춘의 독서』등 예전에 나온 그의 책들은 대부분 종이책으로 가지고 있다. 유시민을 오래 좋아해왔고, 그의 책 역시 적지 않게 읽고 모았다. 다만 최근에 나온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럽도시기행』처럼 책에 따라서는 읽고 난 뒤의 활용도와 소장 가치를 따져 종이책으로 남길지 전자책으로 읽을지를 달리 선택하고 있다.(얘네들은 중고책으로 팔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정수일 교수의 책은 처음부터 종이책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두 분의 책은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다시 펼쳐보게 되는 자료의 성격이 강하다. 책꽂이에 권별로 나란히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크고, 이미 종이책으로 모으기 시작한 시리즈를 계속 채워가는 맛도 있다.

물론 책을 모으는 즐거움과 출판 방식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유홍준의 일본 답사기 5권이 나왔을 때 나는 새로운 내용인 줄 알고 목차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덥석 구입했다. 그러나 막상 받아보니 앞서 나온 3권과 4권의 교토 관련 내용을 발췌해 작은 판형으로 다시 엮은 책이었다. 기존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분명히 알 수 있게 밝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일로 한동안 유홍준과 창비출판사를 사기꾼이라 마음속으로 욕하며 살기도 했다. 반면 제주편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의 표지만 바꿔 낸 감귤 에디션은 기존 7권과 같은 내용이라고 미리 알렸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소장용으로 다시 샀다. 같은 책을 또 사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지만, 같은 책인지 모르고 또 사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유럽도시기행 3』을 읽기 시작하며 알라딘 북플에 올라온 여러 독자의 리뷰도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악평이 많았다. 저자가 짧은 기간 동안 유명 관광지만 둘러봤다는 지적, 현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는 지적, 역사 설명이 인터넷 검색 수준이라는 비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나치게 많이 담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일부 지적에는 공감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나 역시 이 시리즈가 깊이 있는 역사서나 장기 체류형 여행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까지 낮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애초에 이 책에서 현지인의 삶을 깊이 취재한 기록이나 새로운 역사 연구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유시민의 눈을 따라 도시를 바라보고, 그가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함께 따라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였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골목과 시장을 찾아다니고, 누군가는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또 누군가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중심으로 여행하고, 누군가는 역사 유적을 따라 도시를 걷는다. 어느 하나만이 올바른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행기를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록한다.

김용택의 시를 읽으며 왜 섬진강과 시골 이야기만 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그것이 바로 김용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시민의 책을 읽으며 왜 역사와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고 비판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원래 역사와 정치, 국가와 시민사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 관점이 지나치게 반복되어 도시 자체가 가려졌는지를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치 이야기가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책의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유시민이라는 저자의 개성에 가깝다.

물론 저자의 개성과 책의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다. 『유럽도시기행』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나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 관련 저술처럼 한 장소와 문명을 깊고 촘촘하게 파고드는 책은 아니다. 깊이에서는 분명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책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유럽을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시민이라는 한 사람이 바라본 유럽을 함께 걸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유홍준에게서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고, 정수일 교수에게서는 문명이 만나고 이동한 길을 배운다. 유시민에게서는 그가 바라본 역사와 도시의 풍경을 만난다. 작가마다 걷는 길이 다르고, 독자는 그 길 가운데 자신이 가보고 싶은 길을 함께 걸으면 된다. 자기 취향과 맞지 않는 길이라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 모든 여행기가 모든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직 『유럽도시기행 3』을 읽는 초반이지만, 지금까지의 느낌은 앞선 두 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깊고 방대한 역사서를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유시민이라는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 유럽의 도시를 함께 걷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나는 그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한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즐거운 독서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고, 여행기에도 하나의 정답은 없다. 유홍준의 답사와 유시민의 도시기행은 애초에 출발점이 다르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여러 작가의 여행기를 읽는 재미가 생긴다. 『유럽도시기행 3』은 깊고 묵직한 자료집은 아닐지라도, 유시민의 눈으로 도시의 역사와 풍경을 함께 바라보게 해주는 책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하나씩 비교해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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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의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뽀르투를 다녀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이었으나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어 문명사의 진로를 크게 바꾸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를 이루고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었지만, 경제와 정치 등 여러 면에서 이웃 나라들보다 뒤처져 있다.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에서는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반드시 보아야 할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전보다 ‘놀러 다닌 이야기‘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다녀본 도시 중에 고르라면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 가운데 하나를 뽑겠다. 체류 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면 바르셀로나, 보름 정도면 리스본, 열흘 이내라면 뽀르투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재미난 곳은 바르셀로나, 제일 독특한 도시는 뽀르투였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문화양식의 차이가 분명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 속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땅을 되찾았지만, 언어와 건축과 예술 등 문화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의 흔적이 남았다. 피레네산맥 동쪽의 유럽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도 소문만큼 치안이 나쁘지는 않았고, 리스본과 뽀르투는 긴장을 풀고 다녀도 괜찮았다.

마드리드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스페인어는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루어 낸 까스띠야 왕국의 언어인 ‘까스떼야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까딸루냐말인 ‘까딸란‘이 제1공용어이고 스페인어는 제2 공용어다. 리스본과 뽀르투 사람은 다 포르투갈어를 쓴다. 세 언어 모두 경음이 흔하다. ‘c‘는 ‘‘이나 ‘ㅆ‘, ‘t‘는 ‘ㄷㄸ‘, ‘p‘는 ‘ㅂ‘ 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규칙에따르면 ‘c’는 ‘ㅋ‘이나 ‘ㅅ‘, ‘t‘는 ‘ㅌ‘, ‘p‘는 ‘ㅍ‘으로 적어야 한다. 뜻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듣는 맛이 크게 달라진다.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무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문어 때문이었다. 문어는 스페인어로 ‘뿔뽀(pulpo)‘, 포르투갈어로 ‘뽈보(polvo)‘인데 우리는 여행을 다니며 줄곧 이탈리아어 ‘뽈뽀(polpo)‘를 썼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뿔뽀, ‘뽈보‘, ‘뽈뽀‘는 쫄깃한 식감을 전해 주지만 ‘풀포‘, ‘폴보‘, ‘폴포‘는 그렇지 않다. 축 늘어져 맛이 없는 것 같다. ‘따빠(tapa)‘와 ‘삔초(pincho)‘도 마찬가지다. ‘타파‘와 ‘핀초‘는 맛이 없는 소리다. 쎄비체(cebiche)와 ‘깔라마리(calamari)‘도 그렇다. ‘세비체‘나 ‘칼라마리‘라고 하면 입안에 군침이 돌지 않는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식 이름뿐 아니라 사람과 지역 등 고유명사도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었다. 다만 널리알려진 단어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을 따랐다. 예컨대 피카소,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봐. 걸음을 아예 멈추면 더 좋아. 가까이 있는데도 몰랐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이미 지나간 것과 돌이킬 방법이 없는 일은 잊고, 영원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을 접고, 내일에 대한 근심을 던져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봐. 오늘, 이 순간을 즐겨.

피낯선 도시의 새로운 길을 걸으며, 가슴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껴안아 봐. 삶은 길 위에 있는지도 몰라.‘ 독자들도 그런 환청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2026.08.05인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열여섯 시간 걸려 ‘아돌포 수아레스 마드리드-바라하스 공항‘에 안착했다. 북한 영공을 우회하고 우크라이나 상공을 피하느라 항로가 예전보다 길어졌다.

‘바라하스(Barajas)‘는 공항이 있는 마드리드 외곽의 동네 이름이라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AdolfoSuárez, 1932~2014)‘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화폐에 조선시대 사람들을 넣었고 광화문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으나 인천 공항에는 아예 사람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인물에 대해서는 소위 ‘국민적 합의‘라는 걸 이루지 못해서 어디에도 넣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이 살짝 부러웠다.

프랑스 파리에는 샤를 드골 공항, 미국 뉴욕에는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 있다. 스페인 국민에게는 수아레스가 그런 의미를 가진사람이다

독재자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철권통치를 시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기독재였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의 예고편이었다. 20세기의 모든 이념이 충돌해 참혹한 비극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의 어린 아들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1938~)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즉위하지 못하게 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을 동원해 무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학살·언론탄압·인신매매 등의 악행을 저질렀던그는 1975년 노환으로 죽었다.

수아레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를 지키면서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을 꾸짖었다. 카메라가 그 광경을 포착해 국민에게 보여주자, 비난 여론이 폭발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스페인 민주화는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사회의 역사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정식 국호가 에스파냐 왕국(Reino de Espana)인 스페인은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유로를 화폐로 쓴다. 국토가 한국보다 다섯배 넓지만, 인구는 5천만 명 정도로 거의 같으며, 평균수명과 1인당 국민소득도 큰 차이가 없다.

한국과 다른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것 같지 않다. 국민 열 명 가운데 여섯 정도는 가톨릭 신도이다. 스페인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 세력이 미약하다.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은 언어·건축·음악·미술·공예 등 거의 모든 영역에 남은 이슬람의 흔적이다.

피스페인은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나뉘는데, 산맥 동쪽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아프리카‘로 취급했다.

스페인은 택시 요금이 싼 편이다. 파리나 런던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느낌으로는 서울 택시 요금과 비슷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요금이 더 저렴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이번처럼 자주 택시를 탄 적은 없었다.

마드리드도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미술관과 공연장뿐만 아니라 식당과 술집도 시간을 정해 입장권을 예매해야 하는 곳이 많았다.

콜론은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콜럼버스의 스페인 이름이고 세라노 공작은 이사벨 2세의 외무장관이었다

한때 여왕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그는 1868년 자유주의 혁명군을 이끌고 정부를 공격해 여왕을 프랑스로 쫓아내고 공화정을 세웠다. 군부의 공격에 금방 무너져 왕정복고를 허용했지만, 그 정부는 스페인 최초의 공화정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베리아‘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최초의 인간 집단 ‘이베로‘ 부족은 3,600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거나 해변을걸어서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철기를 들고 남하한 셀따(켈트)족이 이베로 부족과 결합해 오늘의 스페인 사람과 관련이있는 셀띠베로(celtibero) 부족을 형성했다.

피서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 이후에는 게르만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토착민과 손잡고 똘레도에 왕국을 세웠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에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이 ‘무어인‘ 또는 ‘베르베르인‘이라고도 했던 북아프리카 무슬림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부 해안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반도 전역을 점령했다

기독교인들은 북부 산악지역에서 최초의 저항군을 조직한 후 7백 년 동안 싸운 끝에 무슬림을 축출하고 땅을 되찾았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레콩키스타’는 그들이 만든 말이다. 보통 ‘재정복(再征服)‘이라 번역하는데 ‘수복(收復)‘ 또는 ‘탈환(奪還)‘으로 이해하면 된다.

스페인은 147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연합 왕국 창설을 계기로 통합을 향해 나아갔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혼인을 비즈니스로 여겼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혼인도 그랬는데 경위가 특이했다. 왕위 계승권을 빼앗길 위험에 직면해 있었던 둘은 권력 공유에 합의하고 1469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에서 남몰래 혼인했으며, 숱한 위기를 이겨내고 십 년을 버틴 끝에 왕좌에 올라 ‘에스파냐 왕국‘을 창설하고 ‘공동왕‘으로서 각자의 영토를 다스렸다.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신항로 개척을 지원했고 광대한 해외 영토를 확보했다. 에르난 꼬르테스와 프란시스꼬 삐사로가 총과 균으로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과 페루의 잉카제국을 무참히 파괴한 뒤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았다.

자녀는 모두 이웃 나라 왕가와 정략결혼했는데 큰딸 이사벨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들 후안은 병으로 죽었다. 셋째 딸 마리아는 형부였던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혼인했고 막내딸 캐서린은 영국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

정말 가치있는 예술품인지 의심하는 내게 ‘엘체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재와 예술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야. 대중이 좋아하면 가치가 생기는 거야.‘

‘아름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대상 자체인가, 아니면 대상을 포착하는 인간의 감각인가?

‘스페인이 무엇인지 묻지 마.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의 모든 도시에서 네가 보고 겪고 마주치는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스페인 땅에 있는 모든 것, 스페인 사람이 가진 모든 것, 그게 스페인이거든!

바르셀로나에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은 ‘왕의 광장‘ 하나뿐이었다. 안달루시아나 바스끄 지역도 크게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무엇이 스페인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걸까?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찾자면 축구와 음식 정도일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페인은 식당마다 음식 맛이 달랐다. 이름이 같은 음식도 재료와 조리법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커피 맛만큼은 같았다.

꼬르따도는 ‘끊는다’는 뜻인데, ‘따’에 악센트를 넣고 길게 소리를 낸다. 서둘러 우유를 끊으면 꼬르따도가 되고 여유 있게 끊으면 플랫 화이트에 가까워진다. 잔이 작아서 카페라테 수준까지 우유를 넣을 수는 없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어디서나 아메리카노·카페라테·카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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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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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라지는 것은 장터만이 아니었다

갈담장이든 웅천장이든 장터가 쇠퇴한 이유는 시장의 경쟁력이 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터를 찾던 사람들이 먼저 고향을 떠났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장터의 활기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형제들은 대전과 서울, 대천으로 흩어졌고, 사촌들 역시 모두 학업과 직장을 따라 도회지로 떠났다. 부모 세대도 이제 고향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형제분들 가운데 셋째아버지 내외분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넷째아버지 내외분과 어머니는 대천으로 옮겨 사신다. 지금 웅천 성동리에 남아 계신 분은 둘째아버지 내외분뿐이다. 자녀 세대가 떠난 뒤에도 고향을 지키던 부모 세대마저 하나둘 사라지거나 생활이 편리한 도시로 옮겨가면서, 마을은 두 세대에 걸쳐 비어 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 농촌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성동리는 1리, 2리, 3리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가 살던 성동1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중 다섯 명은 어려서부터 함께 뛰놀던 불알친구였고, 나머지 세 명은 안불알 친구들이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만큼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다. 둘째집 사촌여동생은 성동1리의 마지막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가 졸업한 뒤에는 마을에서 더 이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아이의 졸업은 학생 한 명이 줄어든 일이 아니라, 마을의 다음 세대가 거기서 멈추었다는 뜻이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학교가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이 떠난다. 아이들이 떠나면 장터도, 가게도, 마을도 조금씩 활기를 잃는다. 빈집이 늘어나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으며, 저녁 무렵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어느새 기억 속으로만 남게 된다. 농촌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 집집마다 밝혀지던 불빛을 하나씩 잃어가며 아주 천천히 비어 간다.

과거의 인구와 장터의 활기를 다시 그대로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길을 걸어 장을 보러 다녔는지, 어떤 풍경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는지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기록은 사라짐을 막지는 못하지만, 사라진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잊히는 일은 막아준다.

이번 비교를 통해 확인한 것은 갈담장이 크냐, 웅천장이 크냐가 아니었다. 숫자로는 장세를 비교할 수 있었지만,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장터 안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담장과 웅천장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장터의 크기를 따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장터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떠난 뒤 조용해진 마을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다.

성동리 골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한때 여덟 명의 동갑내기가 함께 뛰놀았고, 여러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날을 기다리며 살아갔다는 사실만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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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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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농촌 인구감소의 원인과 지역사회의 변화

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ㅇ(인구유출) 갈담장과 웅천장 생활권의 인구감소는 단순한 출생아 감소가 아니라 학업, 취업, 결혼, 주거 등의 이유로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동한 결과

ㅇ(가족사례) 웅천 성동리에서 함께 살던 가족들도 성장한 뒤 대전, 서울, 대천 등으로 이동하였으며, 고향에 남은 사람은 일부 부모 세대뿐인 상황

* 본인은 대전, 형은 서울, 여동생은 서울, 어머니와 막내는 대천으로 이동

* 셋째아버지 내외분은 모두 별세하였고, 그 집 사촌 세 명도 모두 도회지로 이동

* 둘째아버지 내외분만 웅천 성동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집 사촌 네 자매는 모두 도회지로 이동

* 넷째아버지 내외분은 대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집 사촌 두 명도 대천에서 생활

ㅇ(세대이동) 사촌들을 포함한 자녀 세대 대부분이 학업과 직장을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성동리에 남은 사람은 부모 세대와 일부 고령층으로 축소

ㅇ(반복구조) 한 집안의 자녀들이 모두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농촌의 여러 가정에서 반복되면서 마을 전체의 인구감소로 연결되는 구조


나. 농촌 인구감소의 주요 원인

ㅇ(교육) 상급학교 진학과 다양한 교육기회를 위해 청소년과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여건

ㅇ(일자리) 농업 이외에 안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부족하여 취업과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동하는 구조

ㅇ(생활여건) 의료, 문화, 쇼핑, 교통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도시보다 부족하여 젊은 세대의 정착이 어려운 환경

ㅇ(고령화) 젊은 세대의 유출 이후 노년층만 남고 출생보다 사망이 많아지면서 자연감소가 더욱 빨라지는 악순환

ㅇ(중심지집중) 웅천에서 대천으로 이동한 사례처럼 농촌 내부에서도 더 큰 읍이나 도시로 인구가 이동하면서 작은 읍·면과 마을의 공동화 심화


다. 농촌 인구감소가 장터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ㅇ(장터쇠퇴) 장을 보러 오는 주민과 농산물을 내다 파는 농민이 함께 줄어들면서 오일장의 규모와 거래 품목 축소

ㅇ(상권축소) 인구감소로 읍내 점포, 음식점, 다방, 양복점, 전파사 등 과거 장터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생활상권의 소멸

ㅇ(학교감소) 아동 인구 감소로 마을의 초등학생이 사라지고 학교의 통폐합과 폐교로 이어지는 현상

ㅇ(공동체약화) 마을 주민과 친척들이 도시로 흩어지면서 서로의 농사일과 집안일을 돕던 공동체 관계의 약화

ㅇ(빈집증가) 부모 세대가 사망하거나 도시로 이동한 뒤 돌아와 살 사람이 없어 빈집과 폐가가 늘어나는 현상

ㅇ(기억단절) 장터와 학교, 마을길을 함께 기억하는 세대가 줄어들면서 지역의 생활사와 공동체 기억까지 사라질 우려


라. 해결 가능성에 대한 판단

ㅇ(한계) 이미 도시로 이동한 자녀 세대가 일자리와 교육 기반이 부족한 고향으로 모두 돌아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ㅇ(방향) 과거 인구를 완전히 회복하는 목표보다 현재 남아 있는 주민이 불편 없이 생활하고 지역이 지나치게 빠르게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 필요

ㅇ(생활기반) 의료, 교통, 돌봄, 장보기, 문화생활 등 고령 주민에게 필요한 기본생활 서비스 유지가 우선과제

ㅇ(일자리) 농업, 관광, 지역특산물, 소규모 제조업, 원격근무 등을 연계하여 젊은 세대가 일부라도 정착할 수 있는 생계기반 마련 필요

ㅇ(거점유지) 모든 마을에 동일한 시설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웅천과 강진 같은 읍·면 소재지의 의료, 상업, 교통 기능을 지역생활 거점으로 유지할 필요

ㅇ(관계인구) 완전한 귀향만을 요구하기보다 명절과 주말 방문, 빈집 관리, 지역행사 참여, 고향 농산물 구매 등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고향과 계속 관계를 맺는 방식의 확대 필요


마. 종합 판단

ㅇ(개인과 구조) 가족과 친척들이 웅천을 떠난 것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업과 직장, 자녀교육과 생활을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동

ㅇ(농촌현실) 이러한 개인의 선택이 수십 년 동안 집집마다 반복되면서 웅천과 강진을 비롯한 농촌 전체의 인구감소와 장터 쇠퇴로 이어진 결과

ㅇ(해결과제) 농촌 인구감소를 완전히 되돌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남은 사람들의 삶을 지키고 떠난 사람들이 고향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

ㅇ(최종의미) 갈담장과 웅천장의 쇠퇴는 단순히 장터 하나가 작아지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장터를 중심으로 살아왔던 가족과 마을, 생활문화와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사라져 가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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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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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00년 이후 인구감소와 생활권 변화

가. 갈담장 생활권

ㅇ(인구변화) 2000년 약 10,171명에서 2026년 약 6,433명으로 감소

* 감소인원 약 3,738명, 감소율 약 36.8%

ㅇ(지역별 감소) 강진면의 감소율이 가장 높고 운암면의 감소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

* 강진면 2,457명 → 1,375명, 1,082명 감소, 감소율 44.0%
* 운암면 2,141명 → 1,532명, 609명 감소, 감소율 28.4%
* 청웅면 약 1,908명 → 1,211명, 약 697명 감소, 감소율 약 36.5%
* 덕치면 약 1,785명 → 1,111명, 약 674명 감소, 감소율 약 37.8%
* 산내면 약 1,880명 → 1,204명, 약 676명 감소, 감소율 약 36.0%

ㅇ(중심지역) 강진면은 면 소재지와 갈담장, 국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음에도 생활권 내에서 가장 높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운암면) 운암면은 옥정호 주변의 관광 및 주거 여건 등의 영향으로 생활권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생활권변화) 갈담장 생활권 전체 인구는 2000년 대비 약 36.8% 감소하였으나, 운암면의 상대적으로 낮은 감소율로 생활권 전체 감소폭은 제한된 수준


나. 웅천장 생활권

ㅇ(인구변화) 2000년 27,086명에서 2026년 6월 15,618명으로 감소

* 감소인원 11,468명, 감소율 42.3%

ㅇ(지역별 감소) 성주면의 감소율이 가장 높고 남포면의 감소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

* 웅천읍 9,579명 → 5,366명, 4,213명 감소, 감소율 44.0%
* 남포면 7,051명 → 4,661명, 2,390명 감소, 감소율 33.9%
* 주산면 4,009명 → 2,132명, 1,877명 감소, 감소율 46.8%
* 성주면 3,846명 → 1,858명, 1,988명 감소, 감소율 51.7%
* 미산면 2,601명 → 1,601명, 1,000명 감소, 감소율 38.4%

ㅇ(중심지역) 웅천읍은 2000년 대비 4,213명이 감소하였으나 2026년 6월에도 생활권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 유지

ㅇ(성주면) 성주면은 2000년 대비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하여 웅천장 생활권에서 가장 높은 감소율 기록

ㅇ(주산면) 주산면은 46.8% 감소하여 중심지역인 웅천읍보다 높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미산면) 미산면은 38.4% 감소하여 웅천읍, 주산면, 성주면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감소율 기록

ㅇ(남포면) 남포면은 보령시의 중심인 옛 대천시 지역과 바로 인접하여 주거와 생활권을 공유하는 입지적 영향으로 생활권 내에서 가장 낮은 33.9%의 감소율 기록

ㅇ(생활권변화) 웅천장 생활권 전체 인구는 2000년 대비 42.3% 감소하였으며, 특히 성주면과 주산면의 높은 감소율이 생활권 축소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


다. 생활권별 비교

ㅇ(감소인원) 웅천장 생활권은 11,468명이 감소하여 갈담장 생활권 약 3,738명보다 약 3.1배 많은 인구 감소

ㅇ(감소율) 웅천장 생활권의 감소율은 42.3%로 갈담장 생활권 약 36.8%보다 약 5.5%포인트 높은 수준

ㅇ(격차변화) 웅천장 생활권은 2000년 갈담장 생활권의 약 2.7배였으나 2026년에는 약 2.4배 수준으로 격차 축소

ㅇ(중심지역) 웅천읍과 강진면의 감소율은 모두 44.0%로 동일한 수준

ㅇ(주변지역) 중심지역의 감소율은 동일하지만 주변 면 지역에서는 성주면과 주산면의 감소율이 높고, 운암면과 남포면의 감소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두 생활권의 전체 감소율에 차이 발생

ㅇ(입지영향) 남포면은 대천 도심과 인접한 반면 성주면, 주산면, 미산면은 농촌지역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지역별 인구감소 양상에도 차이 발생

ㅇ(현재규모) 2026년 기준 웅천장 생활권 인구는 갈담장 생활권보다 약 9,185명이 많고 약 2.4배 규모

ㅇ(종합판단) 웅천장 생활권은 2000년 이후 갈담장 생활권보다 큰 인구감소를 겪었으나, 2000년 당시 배후인구가 워낙 컸기 때문에 2026년에도 갈담장 생활권보다 두 배 이상 큰 시장 기반 유지


※ 갈담장 생활권의 청웅면, 덕치면, 산내면의 2000년 인구는 강진면과 운암면의 인구감소 비율을 적용한 추정값이며, 해당 지역 통계연보 원자료 확보 시 보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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