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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초크 빈티지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태어났다.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인 열일곱 살 때 최초의 시 <초 한 대>를 썼다.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광명학원 중학부로 다시 편입했다.
1938년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1941년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로 창씨개명하고,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등 훗날 한국인의  애송시가 된 5편의 시를  썼다. 
1943년7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이듬해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받았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큐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는 1871년 후쿠오카현 하카타[博多]에 건립된 근대식 감옥으로 1903년에는 후쿠오카 감옥이었다가 1922년에 후쿠오카 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43년 7월 교토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을 주도하였던 송몽규와 그의 외사촌인 윤동주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들은 각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복역 중 해방을 불과 5~6개월 앞두고 1945년 2월에는 윤동주, 3월에는 송몽규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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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사랑스런 추억-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태어났다.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인 열일곱 살 때 최초의 시 <초 한 대>를 썼다.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한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광명학원 중학부로 다시 편입했다.
1938년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운다. 1941년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로창씨개명하고,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에 입학한다.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등훗날 한국인의 애송시가 된 5편의 시를 썼다. 1943년7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이듬해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 형을 언도받았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큐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 P5

윤동주는 1917년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일제가 패망하기 6개월 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193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일곱 살 윤동주는 시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없다>를 써서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훗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기념해 한정판으로 내고자한 자선 시집이었으나, 일제의 검열을 우려하여 출간되지못하였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1942년 4-6월에 쓴 다섯편의 시를 서울의 친구에게 보낸다. <사랑스런 추억>은 그중 한 시로서,
오늘날 볼 수 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 P12

초한대

초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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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지정 쓰레기장을 청소하고 돌아와 보니 사무소 겸 자택으로 빌린 고가古家 앞에 여자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야나기 약국’의 사모님, 또 한 사람은 가끔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동년배 부인이다.

38살인 나도 어엿한 ‘아저씨’지만, 그런 내가 봐도 ‘아줌마’인 두 사람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던져 온다.

도쿄 도 기타 구의 북동부, 스미다가와 강 상류의 흐름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오가미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두 종류의 명함을 갖게 되었다.

하나에는 ‘조사원·스기무라 사부로’, 다른 하나에는 ‘스기무라 탐정 사무소·스기무라 사부로’라고 인쇄되어 있다.

나는 야마나시 현의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뒤 대학생 때부터 도쿄에서 살았다. 졸업 후에는 아동서 출판사에 취직했고, 편집자로 일했을 때 만난 여성과 결혼하는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가 이끄는 ‘이마다 콘체른’이라는 거대 그룹 기업의 사원으로 전직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지만, 결혼 십일 년 만에 이혼해 이혼 경력을 가진 독신자로 돌아왔고 ‘이마다 콘체른’도 그만두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살아 있었다면 유령이 아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면 이는 비과학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허풍이다.

―계속 여기에 있는 것도 질렸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길까. 스기무라 씨네 근처로 가 줄까요? 내 핫샌드위치, 먹고 싶죠?

반 이상은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사무소를 열었다고 알리자 정말로 근처에 가게를 내겠다고 하더니 물건을 찾아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5월 초에는 ‘와비스케’를 개점했다.

"미쿠모 가쓰에라는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올봄 3월 중순이었나, 돌아가셨어요."

102호실은 일단 비었다가 지금은 다른 입소자가 살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 목요일, 모리타 씨는 외출했다가 미쿠모 가쓰에 씨를 꼭 닮은 여성을 발견했다. 당사자는 휠체어를 탔고, 밀고 있는 젊은 여성과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 사람, 사립탐정이니까.

"저는 쇼와 28년 5월생이에요."
1953년생. 2010년 11월 현재, 57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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