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 - P291

후원의 산길과 돌계단길
연경당을 두루 돌아본 다음 다시 장락문 앞마당에 서면 동쪽은 애련정 쪽으로 훤하게 열려 있고 서쪽은 산자락으로 둘러져 있다. 이 산자락뒤편으로는 옥류천 가는 산길이 있고 앞쪽으로는 규장각 가는 돌계단이가지런히 나 있다. 우리는 무심코 다음 행선지를 향해 걷지만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창덕궁의 길들이 가장 인상적이라고들 한다. 특히 늦가을낙엽으로 덮일 때면 거의 환상적이라고 감탄한다. - P291

희대의 명문, 만천명월주인옹 자서
이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 때 세워진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이라는 뜻이고, 정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의미에서 자서라고 한 것이다.
- P298

재위 22년(179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때 쓴 이 글은 제목만 보면 군주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 내용을 보면 자신이 만천명의 주인인 근거와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피력해 놓았다. - P299

이 글은 대문장가이기도 했던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얼마나 잘 썼기에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정조가 통치 철학을세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엄청난장문이고 고전의 인용이 많아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지라 많은 것을 생략하고 정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의 요체만 압축해 옮겨본다. 그래도 긴 글이니 긴장하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 P299

2004년 1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창덕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규장각을 둘러보고 존덕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규장각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겠네요. 요즘 내가 위원회를 많이 만든다고 언론에서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꼬는데, 정조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니까 규장각을 세웠지만 나는 5년 임기인데 위원회도 안 만들면 어디서 혁신적인 방책을 내놓겠습니까? 혁신에 대해 청장님은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여정부의 모토는 혁신이었다. 개혁도 아니고 혁신이었다. 혁신도시도 그런 기조에서 만든 이름이었고, 인사과도 혁신인사과라고 바꿔 불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P304

"혁신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개혁을 하면 손해 보는 집단이생겨서 금방 반발에 부딪칩니다. 무를 갖고 동치미 담그는 것이 아니라깍두기를 씻어서 동치미를 담그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동치미도 안 되고 깍두기만 버리는 일이 생길까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동적인 관리에 능동적인 큐레이터십을 더하는 문화재 행정을 정책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혁신이죠. 문화재청장은 그런 식으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관리하면 되겠습니다. 다만 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정부 국정 철학의 기조에 대해서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 P304

"저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만들기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해낼 네 가지 과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정경유착 근절입니다. 난 재벌들에게 돈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방분권입니다.
지방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셋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야당에 뭐든 양보할 생각입니다. 여기까지는 내 의지대로 하면 되는데 넷째가 어렵습니다. 권력기관 힘을 빼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됩니다." - P306

이때 나는 평소 남들과 대화할 때처럼 의문스러운 부분을 즉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전화 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 P306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솔직 담백한 분이셨다. 그뒤로도 ‘언론개혁은 언론이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힘들고, 따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 특별 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면 검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깍두기를 씻어 동치미를 담그는 도중 임기가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이든다. 
정조가 그러했듯이. - P306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선암사 강선루에 올라 정자에 걸린 다섯 편의 시를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고는 두 번 읽고 싶은 시는 없다고한 대목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소리 내서 읽을 수 있는 시가 하나도 없구나‘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런 한이 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한문 강독 모임 세 곳에 참석하며 공부하고 있지만 마냥 어려운 것이한문이다.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P311

5대 궁궐의 조망처
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긴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음에 반해, 동양미술사에서 산수화는 5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해10세기에 이르면 가장 핵심적인 장르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산수화에서 화가의 시각은 고원,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심원은 깊숙이 내려다보는 것, 평원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 P325

또 부감법(法)이라는 것이 있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엔 헬리콥터도 없었건만 어떻게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 P325

‘고궁 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이 넓은 공간에 새로 공원을 짓는다 쳐도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설계할 건축가가 어디 있겠으며, 있다 한들 이처럼 품위 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경궁을 어느 궁궐 못지않게 사랑하고 즐겨 찾는다. 봄꽃이 만발한 창경궁, 낙엽이 지는 창경궁, 비오는 여름날의 창경궁을 홀로 거닐며 나만의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사는 가장 큰 행복의 하나다. - P331

불행히도 철종 8년21857) 10월, 순조 비 순원왕후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일어난 화재로 주자소 창고에  있던 정유자(丁酉字), 한구자(韓構字), 정리자(整理字)와 인쇄 도구, 책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구자,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여 교서관에 따로 보관해두었던 임진자(壬辰)와 함께 왕조 반까지 인쇄에 사용했다. 이 활자들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6년에 ‘활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이 열린 바 있다. 주자소는 우리나라가 인쇄·활자 문화의왕국이었음을 증언하는 위대한 유적이다. - P344

경찰은 문정전에 불을 지른 채종기라는 노인을 체포해 문화재 방화범으로 검찰에 넘겨 재판에 회부했다. 노인은 정부의 재개발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방화한 것이라고 했다. 법원은 나이가 많고, ‘피해가 경미하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채종기가 또 2008년 2월 11일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그가 바로 숭례문 방화사건의 범인이다. - P349

‘효손‘ 은도장과 「유세손서」 나무,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비의 한과, 눈을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을 지켜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대왕 다음가는 계몽군주, 문화군주가 되었다. - P357

春水滿四澤 
봄물은 네 연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峯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를 많이도 만든다
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떨치고
冬領秀孤松
겨울 고갯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 P364

드라마적인 요소가 이렇게 넘치고도 넘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끝나지 않는다. 죽은지 250여 년 뒤에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이 서오릉에 다시 모인 것이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함께 서오릉의 명릉(明陵)에  묻혔고, 장희빈의 묘는 원래 경기도 구리시 부근에 있었다가 숙종 45년(1719) 경기도 광주시진해촌(眞海村, 지금의 오포읍 문형리)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969년 이곳을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장희빈 묘소가 서오릉 경내 한쪽 구석에있는 대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결국 숙종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장희빈의 그 끈질긴 사랑의 집념은 귀신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 P380

조선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여인들 중 품계를 받은 후궁, 궁녀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왕비, 세자빈,  왕대비(왕의 어머니), 대왕대비(왕의할머니)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하지만 내명부의 여인들은 품계를 받았고, 내관과 궁관으로 나뉘었다.
- P381

내관은 왕과 세자의 후궁으로, 정1품부터 종5품까지였다. 서열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이다. 정1품빈에 봉해지면 이름 앞 한 자씩 좋은 단어를 얹어주는데 희빈, 숙빈, 수빈 등이 그것이다. - P381

정5품 상궁(尙宮)은 총책임자로 제조상궁(提調尙宮)이 그중 가장 높다. 정7품 전빈(典賓)은 손님 접대를 맡고, 정8품 전약(典藥)은 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고, 종9품  주치(奏치)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식으로 직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 즉 장희빈은 궁관에서 내관으로 승진한 뒤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것이다.
이 밖에 궁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는 나인(內人)이 있고, 궁관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비자가 있다. 무수리는 상궁의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 통근을 하는 데 비해, 비자는 상근하는 하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 P382

최고의 궁중문학 작품 『한중록』을 저술한 위대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뒤에도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겨우 열한 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는아픔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한을 풀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P391

앙부일구 읽는 법
풍기대 옆에는 세종 때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
晷, 보물 제845호의 복제품)가 있다. 해설사들은 여기서 관람객들에게 해시계 보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앙부일구의 앙부는 ‘솥을 뒤집어 위로 보게 했다‘는 뜻이고 일구는 ‘해 그림자‘라는 뜻이다. - P397

1909년 11월 1일 아침 10시, 개원식이 열렸다. 순종은 연미복 차림에모닝코트(morning coat)를 걸치고 회색 중절모를 쓴 개화된 예복을 입고 참석했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비롯하여 무려 1천 명에 달하는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원을 총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자리에 없었다. 닷새 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 P412

그래서인지 창경궁에 오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 점에서 창경원을 경험했던 구세대와 그렇지 않은 신세대는 창경궁 답사에 임하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경궁 답사의마지막을 창경원 이야기로 마무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세대들이 구세대의 이런 독백을 과연 이해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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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서연을 베풀던 성정각
창덕궁 동궁은 이렇게 딱한 운명이었지만 그나마 왕세자의 독서와 서연이 이루어진 성정각이 남아 있어 동궁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동궁과 관련된 건물에는 어질 현(賢) 자가 많이 쓰였다. 
어진 이를 기다리는대현문(待賢), 
어진 이를 인도하는 인현문(引賢門), 
어진 이와 친하게지내는 친현문(門) 등이 그것이다.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작은 곁문에는 영현문(迎賢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어진 이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서연에 참석하는 학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 P177

왕세자의 서연은 임금의 경연과 같은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서연을 ‘신하들이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고 도의를 올바르게계도하는 일‘로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내내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 P177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겁게 여길 것이니 그 기쁨이 크다. 옛사람 (소동파)이 희우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도 반갑게 내리는 비의 기쁨을 새겨두려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반갑게 내린 비를기뻐하면 그만일 터인데 어찌하여 정자의 이름까지 그것으로 지었단말인가? - P179

이 전각은 예로부터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 받들어
날로 더욱 친하게 되도다 - P181

효명세자는 관물헌에서 내다보는 전망을 좋아하여 관물헌 사영시(四을詠詩)로 봄꽃(春花), 여름날(夏日),  가을 달(秋月), 겨울 눈(冬雪)을 읊기도 했다. - P182

요절한 문예군주, 헌종
이제 우리의 창덕궁 답사는 내전의 동쪽 마지막 공간인 낙선재로 향한다. 낙선재의 주인공은 헌종이다. 헌종을 생각하면 나는 애처로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어난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모두 고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혹은 치세로 혹은 전란으로 심지어는 무능으로, 임금 자신과 당대의 상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의 24대 왕 헌좋은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재위 기간이 15년이나 되고 수렴청정 기간외에 직접 정무를 본 것이 9년이나 되어도 헌종 대는 세도정치 시대라고불릴 뿐 역사에서 헌종을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현종에게 헌종나름의 인생과 치세가 있었다. - P189

낙선재 권역
  헌종은 문인 학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여 1847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문인들의 사랑채를 본뜬 낙선재를 지었다. - P191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留盡之巧以還造化 / 留盡之祿以還朝廷 /
留盡之財以還百姓 / 溜盡之福以還子孫 - P201

1926년 순종황제가 죽고 남겨진 세 남매는 해방 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껄끄럽게 생각해 입국을 허가하지않았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정권을 잡은 1962년 이후의 일이며, 의친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재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 P207

자연을 경영하는 한국의 정원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 P215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고 풍경이다.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 P218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삼청동  북창(北倉)근처에 호환이 있다고 하여 포수를 풀어서  잡아내게 했습니다. 오늘 유시(酉時, 오후 5~7시경)에  인왕산 밑에서 작은 얼룩무늬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칩니다. 호랑이를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고 계속 사냥하도록 하겠습니다. - P220

빙그레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 굽어보며
조용한 정원에 일 없으니 맑은 빛 구경한다
한 쌍의 오리는 섬뜰 위에서 뒤뚱거리고
고기 새끼가 뽐내며 우쭐거리는 것이 희망에 차 있구나

嘆倚畫欄臨小塘
閑庭無事玩澄光
玉砌緩行雙彩鴨
漁兒自得意洋洋 - P231

앞서 말했듯 중층 누각의 경우 아래층을 각(閣), 위층을 루(樓)라 하기에 규장각 주합루라고 한다. 규장각의 규奎)는 28수 별자리 중 문운을 관장하는 별이고, 장(章)은 문장 또는 밝다는 뜻이 있으며, ‘규장‘ 이라는 말은  임금의 글을 지칭한다. 따라서 규장각은 임금의 어제, 어필등을 보관하는 서고를 말한다. - P239

정조의 규장각 건립
규장각 주합루는 그 건물도 건물이고, 또 거기서 내려다보는 부용정의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은정조대왕이 규장각을 세우고 학자들에게 학문과 경세를 연구케 하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여 정치 개혁과 문화 창달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500년 종사에서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정조대왕의 규장각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큰 자랑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준다. - P244

이때 정조는 규장각에 제학(提學), 대교(敎) 등의  직제를 마련하고 황경원, 홍국영, 유언호 등 명신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 관원들을 후원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세손 시절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신(戚臣, 임금과성이 다르나 일가인 신하)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을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 P245

그럴듯한 형식으로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하나 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정조는 재위 3년(1779) 3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직을 설치하고 특명으로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인 박제가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을 등용했다. 이들이 유명한 규장각 사검서다. - P245

見來客不起
손님이 온 것을 보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

非先生勿入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마라 - P246

정조는 너무 기뻐서 이 책의 장점을 새로 잘 고치고 홍재(弘齋)·만기지가(萬機之暇)·극(極)·조선국(朝鮮國) 등  자신의 장서인을 찍어 개유와에 보관하도록 했다. 본래 규장각의 부설기관인 장서각에서는조선 책은 서고(西庫)에, 중국 책은 열고관(觀)에 보관했는데 중국책이 늘어나면서 새로 증축한 서고가 개유와였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알 만하다. - P249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 오래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궁중의 회사(事)를 김홍도로하여금 주관하게 했다. - P252

정조시대의 문예 창달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예전 같은 기능은 하지 못하고 그저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영할 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 P253

서향각 書香閣
  규장각 서편에 동향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큰 건물로,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규장각에 봉안된어진, 임금의 글과 글씨 등을 보관하고, 이따금 서적을 널어 말리던 곳이다. ‘책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 P255

정조는 진실로 인간적인 계몽군주였다. 그래서 규장각에 오면 건물이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함께 정조의 위업을 기리게 된다. - P260

창덕궁 후원 관람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창덕궁 후원 같은 정원이 있다는 것은 서울 사람의 복 중에서도 홍복이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을 다녀온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창덕궁 후원이 일반인에게 처음 개방된 때가 2004년 5월 1일로,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다. 실제로 작년(2016), 재작년 창덕궁 관람 인원은 연간 내국인 약 160만 명, 외국인 약 40만 명이었으나 별도의 입장료(현재 5천 원)를 더 받는 후원 입장객은 많아야 하루 1,400명 수준이다.
후원 관람은 인원을 하루 최대 14회(30분 간격), 1회 100명으로 제한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봄가을을 제외하고는 100명이다차지않으니 1년에 3만 명 정도다. 그러니까 후원 개방 후 현재까지 후원 관람객은30만 명밖에 안 된다. 그중 30퍼센트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 P261

그동안 내가 맞이한 외국인 내방객들의 감상과 반응을 보자면, 그들은 자연히 자기 나라의 정원과 비교하여 말하는데, 일본인은 교토의 사찰 정원에 비해 규모가 크면서도 종합적인 것에 감동하고, 거대한 스케일에 익숙한 중국인은 자연스러운 멋에 놀란다. 중국인은 경복궁에서는자금성을 떠올리며 자기네 문화의 아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덕궁 후원에 이르러서는 한국 문화 자체로 본다. - P262

서양인은 한결같이 인간적 체취를 말한다. 가는 곳마다 지금도 사람이 살면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을 경험하고 온 분들은한국의 미학이 따로 있음을 창덕궁 후원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다며 이곳 하나를 본 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에 만족한다고 한다. 이런 창덕궁 후원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은 진정 서울 사람의 복이자 큰 자산이다. - P262

불로문
 불로문은 넓적한 화강석 통판을 과감하게 디귿 자로 오려 세운 문이다. 모서리를 가볍게 궁굴린 것 외에는 손길이 더 가지 않았다. 돌문 머리에 새겨넣은 ‘불로문(不老門) 세 글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서체다. - P263

의두합과 기오헌은 뜻이 일맥상통한다. 도연명의 유명한 「귀거래사」에는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보니, 작은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의두합과 기오헌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이다. 다만 이 건물은 북향이기 때문에 남창(南窓)이 아니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두(斗) 자를 썼다. 이 집을 혹 이안재(易安齋)라고 하는 것도 이 구절에서 비롯한  것이다. - P270

이참에 궁궐 건축에서 건물 이름 끝에 붙는 명칭을 살펴보면, 건물의 형태, 성격, 지위에 따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홍순민 교수는 이를 간략히 정리해 ‘전(殿)·당(堂)·각(閣)·합(閤)·재(齋)·헌(軒)·루(樓)·정(亭)‘으로 요약했다. - P270

전(殿)은 선정전, 대조전처럼 왕과 왕비의 건물에만 사용되었고, 당(堂)은 희정당, 영화당 등 왕이 정무를 보는 집과 왕세자의 정전인 중희당 같은 건물에 쓰였다. 각(閣)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왕세자가 서연을 여는 성정각, 내각의 학사들이 근무하는 규장각이 그 예다.
그보다 중요도가 약간 낮으면 합(閣)이라 했다. (홍 교수는 합이 각보다 오히려 높다고 보았다.) - P270

재(齋)는 낙선재처럼 서재내지 사랑채의 성격을 지닌 집이고, 헌(軒)은 마루가 넓은 건물에 붙였으며, 루(樓)는 주합루처럼 이층 건물이라는뜻이다. 정(亭)은 정자인데, 사다리나 계단으로 오르는 구조이면 평원처럼 루(樓)라고 불렀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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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김부식『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15년 p.127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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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9-16 1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가 용산으로 옮긴 무언가가 생각나네요
 

종묘제례의 소임을 맡은 제관들은 제사 7일 전, 의정부에 모여 제례의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를 재계라 한다. 그날부터 4일간은 산재(散), 3일간은 치재(齋)를 행하는데, 산재 기간에 왕과 백관들은 집무를 보지만 형벌과 관계된 문서는 처리하지 않는다. 귀로는 음란한 말이나 저속한 음악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입으로는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 파 등 매운 음식을 먹지 않으며, 문상이나 병문안을 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 P84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 P91

내가 종묘 답사는 늦가을 토요일 오후나 눈 내린 겨울 아침에 자유 관람으로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 길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P92

국가 의례를 행할 때 사용했다. 따라서 새로 지은 창덕궁은 별궁(別宮)이아니라 또 하나의 정궁(正宮)이 되어 양궐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이를 역사적으로 ‘법궁이궁(離宮) 양궐체제‘라고 했다. 왕조로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별도의 궁궐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양궐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 P99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과 왕의 직계존속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왕의 아버지,생존해 있는 왕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왕의 비빈 등이 포함됐다. 그때문에 계속 궁궐 규모를 확장하거나 별궁을 지어야 했다. 그로 인해 창경궁이 생겼다. - P99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 P101

내가 태조께서 개창하신 뜻을 알고, 또 풍수지리의 설이라는 것에괴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술자(術者)가 ‘경복궁은 음양의형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은 이상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무인년(1398) 집안의 일(제1차 왕자의 난)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 P103

일제는 왕가의 전통을 지우기 위하여 창경궁을 동궐에서 분리하여 동물원·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이라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만강조하여 관리소 이름을 비원청(秘苑廳)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두 궁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라는 이름 대신 오랫동안 창경원, 비원이라고 불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창덕궁,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국민학교 때는 창경원과 비원으로 소풍을 갔다. - P105

돈화문 앞 월대가 땅에 묻히게 된 것은 1907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 마련한 캐딜락 자동차가 내전까지 들어올 수있도록 월대를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1932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질러 원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돈화문 앞으로내면서 광장으로서 월대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미국 제너럴모터스사에서 제작한 순종황제의 어차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P108

나무를 비벼 새 불씨를 만드는 것을 일러 찬수(遂)라 했다. 이때 쓰는 나무의 종류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이를테면 봄에는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 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 P116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 P116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像 - P127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땅이 시키는 대로 한 건물 배치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  두드러진다. 3조란 외조(外朝), 치조(朝), 연조(燕)를  말한다. 외조는 의례를 치르는 인정전, 치조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宣政殿), 연조는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이 주 건물이다. 경복궁에서는 이 3조가 남북일직선상에 있지만 창덕궁에서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에 중국식의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면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가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 P129

창덕궁 전경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서 두드러진다. 창덕궁의 3조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로 인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를 풍긴다. - P130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외조, 치조, 연조의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주례」에 충실한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 - P131

"자연 지형과 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죠. 요즘 우리나라 건축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건물 대지를 반듯하게 밀어놓고 짓는 데 있어요. 땅을 생긴 그대로 두어야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건축이나오는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땅이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건축이 나옵니다." - P131

이 두 대의 자동차는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차고에 방치되어 거의폐차 상태였다. 그러다 1997~2001년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미국과 영국의 본사에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는 아주 희귀한 앤티크 자동차로대접받고 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 어차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하 1층 로비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 P138

순종과 황후의 어차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는 1903년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고 황후가 탄 어차는 1909년 영국 다임러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드문 앤티크 자동차가 되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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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 제도와 종묘의 증축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150여 년이 흘러 13대 명종 대에이르면서 종묘는 한차례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5대 봉사를 한다는 것은 그 윗대 조상의 신주는 땅에 매장하여 안치하고 더 이상 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외로 불천위(不遷位) 제도라는 것이 있다. - P36

불천위 제도란 공덕이 많은 임금의 신위는 변함없이 계속 모신다는뜻으로,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천위라고 한다. 태조는 무조건불천위였고 태종과 세종도 불천위로 모셔졌다. - P36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 P42

우암 송시열이 효종대의 공신으로 배향된 것도 100년 뒤 노론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추가로 들어간 것이었다. - P43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발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 P43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것이 이채롭다. - P44

칠사당에 모신 일곱 신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칠사란 궁중을 지키는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들로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 중류(中), 국문(國門), 공(公),
행(行) 등이다. 사명은 인간의 운명, 사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 사조는 부엌의 음식, 중류는 지붕, 국문은 나라의 성문, 공려는 상벌, 국행은 여행을 관장한다. 그러니 칠사 토착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 것이다. - P44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 P46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 P49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 P52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 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 P52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 P52

국가 의식으로서 종묘
제례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세종대왕이 연회 때 사용하기 위해 회례악(禮樂舞)로 작곡한 것이 「보태평」과 「정대업」이다. 보태평은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으로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고, 정대업은 ‘대업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무공(武功)을 찬양한 것이다. 두 곡 모두 세종 이전 6대조까지, 즉 태조의 네 선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 태종 등의 공을 칭송한 것이다. - P62

내가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창제란 예로부터 입법(立法)만큼이나 하기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하면 못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無)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리라. - P68

1910년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종묘제례도 막을 내렸다. 다만 대한제국 황실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이 향화(香火)를 올리는 것으로  제례를 대신했다. 8·15해방 뒤에는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향화마저 못했다.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란임을말해주는 대목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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