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서연을 베풀던 성정각
창덕궁 동궁은 이렇게 딱한 운명이었지만 그나마 왕세자의 독서와 서연이 이루어진 성정각이 남아 있어 동궁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동궁과 관련된 건물에는 어질 현(賢) 자가 많이 쓰였다. 
어진 이를 기다리는대현문(待賢), 
어진 이를 인도하는 인현문(引賢門), 
어진 이와 친하게지내는 친현문(門) 등이 그것이다.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작은 곁문에는 영현문(迎賢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어진 이를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서연에 참석하는 학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 P177

왕세자의 서연은 임금의 경연과 같은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서연을 ‘신하들이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고 도의를 올바르게계도하는 일‘로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내내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 P177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겁게 여길 것이니 그 기쁨이 크다. 옛사람 (소동파)이 희우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도 반갑게 내리는 비의 기쁨을 새겨두려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 반갑게 내린 비를기뻐하면 그만일 터인데 어찌하여 정자의 이름까지 그것으로 지었단말인가? - P179

이 전각은 예로부터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 받들어
날로 더욱 친하게 되도다 - P181

효명세자는 관물헌에서 내다보는 전망을 좋아하여 관물헌 사영시(四을詠詩)로 봄꽃(春花), 여름날(夏日),  가을 달(秋月), 겨울 눈(冬雪)을 읊기도 했다. - P182

요절한 문예군주, 헌종
이제 우리의 창덕궁 답사는 내전의 동쪽 마지막 공간인 낙선재로 향한다. 낙선재의 주인공은 헌종이다. 헌종을 생각하면 나는 애처로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어난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모두 고유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혹은 치세로 혹은 전란으로 심지어는 무능으로, 임금 자신과 당대의 상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의 24대 왕 헌좋은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재위 기간이 15년이나 되고 수렴청정 기간외에 직접 정무를 본 것이 9년이나 되어도 헌종 대는 세도정치 시대라고불릴 뿐 역사에서 헌종을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현종에게 헌종나름의 인생과 치세가 있었다. - P189

낙선재 권역
  헌종은 문인 학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여 1847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문인들의 사랑채를 본뜬 낙선재를 지었다. - P191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留盡之巧以還造化 / 留盡之祿以還朝廷 /
留盡之財以還百姓 / 溜盡之福以還子孫 - P201

1926년 순종황제가 죽고 남겨진 세 남매는 해방 후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껄끄럽게 생각해 입국을 허가하지않았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가정권을 잡은 1962년 이후의 일이며, 의친왕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재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 P207

자연을 경영하는 한국의 정원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 P215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고 풍경이다.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 P218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삼청동  북창(北倉)근처에 호환이 있다고 하여 포수를 풀어서  잡아내게 했습니다. 오늘 유시(酉時, 오후 5~7시경)에  인왕산 밑에서 작은 얼룩무늬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칩니다. 호랑이를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고 계속 사냥하도록 하겠습니다. - P220

빙그레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 굽어보며
조용한 정원에 일 없으니 맑은 빛 구경한다
한 쌍의 오리는 섬뜰 위에서 뒤뚱거리고
고기 새끼가 뽐내며 우쭐거리는 것이 희망에 차 있구나

嘆倚畫欄臨小塘
閑庭無事玩澄光
玉砌緩行雙彩鴨
漁兒自得意洋洋 - P231

앞서 말했듯 중층 누각의 경우 아래층을 각(閣), 위층을 루(樓)라 하기에 규장각 주합루라고 한다. 규장각의 규奎)는 28수 별자리 중 문운을 관장하는 별이고, 장(章)은 문장 또는 밝다는 뜻이 있으며, ‘규장‘ 이라는 말은  임금의 글을 지칭한다. 따라서 규장각은 임금의 어제, 어필등을 보관하는 서고를 말한다. - P239

정조의 규장각 건립
규장각 주합루는 그 건물도 건물이고, 또 거기서 내려다보는 부용정의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은정조대왕이 규장각을 세우고 학자들에게 학문과 경세를 연구케 하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여 정치 개혁과 문화 창달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500년 종사에서 세종대왕의 집현전과 정조대왕의 규장각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큰 자랑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준다. - P244

이때 정조는 규장각에 제학(提學), 대교(敎) 등의  직제를 마련하고 황경원, 홍국영, 유언호 등 명신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정조는 규장각 관원들을 후원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세손 시절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신(戚臣, 임금과성이 다르나 일가인 신하)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을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즉위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 규장각)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文治)를 내세운다고 장식하려는 뜻이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하려는 뜻에서였을 따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부록 정조대왕 행장) - P245

그럴듯한 형식으로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하나 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정조는 재위 3년(1779) 3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직을 설치하고 특명으로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인 박제가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을 등용했다. 이들이 유명한 규장각 사검서다. - P245

見來客不起
손님이 온 것을 보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

非先生勿入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마라 - P246

정조는 너무 기뻐서 이 책의 장점을 새로 잘 고치고 홍재(弘齋)·만기지가(萬機之暇)·극(極)·조선국(朝鮮國) 등  자신의 장서인을 찍어 개유와에 보관하도록 했다. 본래 규장각의 부설기관인 장서각에서는조선 책은 서고(西庫)에, 중국 책은 열고관(觀)에 보관했는데 중국책이 늘어나면서 새로 증축한 서고가 개유와였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그 기상을 알 만하다. - P249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 오래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궁중의 회사(事)를 김홍도로하여금 주관하게 했다. - P252

정조시대의 문예 창달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대로 존속했지만 예전 같은 기능은 하지 못하고 그저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영할 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 P253

서향각 書香閣
  규장각 서편에 동향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큰 건물로,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규장각에 봉안된어진, 임금의 글과 글씨 등을 보관하고, 이따금 서적을 널어 말리던 곳이다. ‘책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 P255

정조는 진실로 인간적인 계몽군주였다. 그래서 규장각에 오면 건물이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함께 정조의 위업을 기리게 된다. - P260

창덕궁 후원 관람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창덕궁 후원 같은 정원이 있다는 것은 서울 사람의 복 중에서도 홍복이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을 다녀온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창덕궁 후원이 일반인에게 처음 개방된 때가 2004년 5월 1일로,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다. 실제로 작년(2016), 재작년 창덕궁 관람 인원은 연간 내국인 약 160만 명, 외국인 약 40만 명이었으나 별도의 입장료(현재 5천 원)를 더 받는 후원 입장객은 많아야 하루 1,400명 수준이다.
후원 관람은 인원을 하루 최대 14회(30분 간격), 1회 100명으로 제한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봄가을을 제외하고는 100명이다차지않으니 1년에 3만 명 정도다. 그러니까 후원 개방 후 현재까지 후원 관람객은30만 명밖에 안 된다. 그중 30퍼센트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 P261

그동안 내가 맞이한 외국인 내방객들의 감상과 반응을 보자면, 그들은 자연히 자기 나라의 정원과 비교하여 말하는데, 일본인은 교토의 사찰 정원에 비해 규모가 크면서도 종합적인 것에 감동하고, 거대한 스케일에 익숙한 중국인은 자연스러운 멋에 놀란다. 중국인은 경복궁에서는자금성을 떠올리며 자기네 문화의 아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덕궁 후원에 이르러서는 한국 문화 자체로 본다. - P262

서양인은 한결같이 인간적 체취를 말한다. 가는 곳마다 지금도 사람이 살면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을 경험하고 온 분들은한국의 미학이 따로 있음을 창덕궁 후원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다며 이곳 하나를 본 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에 만족한다고 한다. 이런 창덕궁 후원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은 진정 서울 사람의 복이자 큰 자산이다. - P262

불로문
 불로문은 넓적한 화강석 통판을 과감하게 디귿 자로 오려 세운 문이다. 모서리를 가볍게 궁굴린 것 외에는 손길이 더 가지 않았다. 돌문 머리에 새겨넣은 ‘불로문(不老門) 세 글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서체다. - P263

의두합과 기오헌은 뜻이 일맥상통한다. 도연명의 유명한 「귀거래사」에는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보니, 작은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의두합과 기오헌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이다. 다만 이 건물은 북향이기 때문에 남창(南窓)이 아니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두(斗) 자를 썼다. 이 집을 혹 이안재(易安齋)라고 하는 것도 이 구절에서 비롯한  것이다. - P270

이참에 궁궐 건축에서 건물 이름 끝에 붙는 명칭을 살펴보면, 건물의 형태, 성격, 지위에 따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홍순민 교수는 이를 간략히 정리해 ‘전(殿)·당(堂)·각(閣)·합(閤)·재(齋)·헌(軒)·루(樓)·정(亭)‘으로 요약했다. - P270

전(殿)은 선정전, 대조전처럼 왕과 왕비의 건물에만 사용되었고, 당(堂)은 희정당, 영화당 등 왕이 정무를 보는 집과 왕세자의 정전인 중희당 같은 건물에 쓰였다. 각(閣)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왕세자가 서연을 여는 성정각, 내각의 학사들이 근무하는 규장각이 그 예다.
그보다 중요도가 약간 낮으면 합(閣)이라 했다. (홍 교수는 합이 각보다 오히려 높다고 보았다.) - P270

재(齋)는 낙선재처럼 서재내지 사랑채의 성격을 지닌 집이고, 헌(軒)은 마루가 넓은 건물에 붙였으며, 루(樓)는 주합루처럼 이층 건물이라는뜻이다. 정(亭)은 정자인데, 사다리나 계단으로 오르는 구조이면 평원처럼 루(樓)라고 불렀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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