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 - P291

후원의 산길과 돌계단길
연경당을 두루 돌아본 다음 다시 장락문 앞마당에 서면 동쪽은 애련정 쪽으로 훤하게 열려 있고 서쪽은 산자락으로 둘러져 있다. 이 산자락뒤편으로는 옥류천 가는 산길이 있고 앞쪽으로는 규장각 가는 돌계단이가지런히 나 있다. 우리는 무심코 다음 행선지를 향해 걷지만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창덕궁의 길들이 가장 인상적이라고들 한다. 특히 늦가을낙엽으로 덮일 때면 거의 환상적이라고 감탄한다. - P291

희대의 명문, 만천명월주인옹 자서
이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 때 세워진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이라는 뜻이고, 정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의미에서 자서라고 한 것이다.
- P298

재위 22년(179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때 쓴 이 글은 제목만 보면 군주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 내용을 보면 자신이 만천명의 주인인 근거와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피력해 놓았다. - P299

이 글은 대문장가이기도 했던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얼마나 잘 썼기에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정조가 통치 철학을세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엄청난장문이고 고전의 인용이 많아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지라 많은 것을 생략하고 정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의 요체만 압축해 옮겨본다. 그래도 긴 글이니 긴장하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 P299

2004년 1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창덕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규장각을 둘러보고 존덕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규장각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겠네요. 요즘 내가 위원회를 많이 만든다고 언론에서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꼬는데, 정조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니까 규장각을 세웠지만 나는 5년 임기인데 위원회도 안 만들면 어디서 혁신적인 방책을 내놓겠습니까? 혁신에 대해 청장님은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여정부의 모토는 혁신이었다. 개혁도 아니고 혁신이었다. 혁신도시도 그런 기조에서 만든 이름이었고, 인사과도 혁신인사과라고 바꿔 불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P304

"혁신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개혁을 하면 손해 보는 집단이생겨서 금방 반발에 부딪칩니다. 무를 갖고 동치미 담그는 것이 아니라깍두기를 씻어서 동치미를 담그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동치미도 안 되고 깍두기만 버리는 일이 생길까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동적인 관리에 능동적인 큐레이터십을 더하는 문화재 행정을 정책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혁신이죠. 문화재청장은 그런 식으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관리하면 되겠습니다. 다만 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정부 국정 철학의 기조에 대해서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 P304

"저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만들기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해낼 네 가지 과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정경유착 근절입니다. 난 재벌들에게 돈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방분권입니다.
지방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셋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야당에 뭐든 양보할 생각입니다. 여기까지는 내 의지대로 하면 되는데 넷째가 어렵습니다. 권력기관 힘을 빼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됩니다." - P306

이때 나는 평소 남들과 대화할 때처럼 의문스러운 부분을 즉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전화 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 P306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솔직 담백한 분이셨다. 그뒤로도 ‘언론개혁은 언론이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힘들고, 따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 특별 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면 검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깍두기를 씻어 동치미를 담그는 도중 임기가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이든다. 
정조가 그러했듯이. - P306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선암사 강선루에 올라 정자에 걸린 다섯 편의 시를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고는 두 번 읽고 싶은 시는 없다고한 대목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소리 내서 읽을 수 있는 시가 하나도 없구나‘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런 한이 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한문 강독 모임 세 곳에 참석하며 공부하고 있지만 마냥 어려운 것이한문이다.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P311

5대 궁궐의 조망처
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긴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음에 반해, 동양미술사에서 산수화는 5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해10세기에 이르면 가장 핵심적인 장르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산수화에서 화가의 시각은 고원,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심원은 깊숙이 내려다보는 것, 평원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 P325

또 부감법(法)이라는 것이 있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엔 헬리콥터도 없었건만 어떻게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 P325

‘고궁 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이 넓은 공간에 새로 공원을 짓는다 쳐도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설계할 건축가가 어디 있겠으며, 있다 한들 이처럼 품위 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경궁을 어느 궁궐 못지않게 사랑하고 즐겨 찾는다. 봄꽃이 만발한 창경궁, 낙엽이 지는 창경궁, 비오는 여름날의 창경궁을 홀로 거닐며 나만의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사는 가장 큰 행복의 하나다. - P331

불행히도 철종 8년21857) 10월, 순조 비 순원왕후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일어난 화재로 주자소 창고에  있던 정유자(丁酉字), 한구자(韓構字), 정리자(整理字)와 인쇄 도구, 책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구자,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여 교서관에 따로 보관해두었던 임진자(壬辰)와 함께 왕조 반까지 인쇄에 사용했다. 이 활자들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6년에 ‘활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이 열린 바 있다. 주자소는 우리나라가 인쇄·활자 문화의왕국이었음을 증언하는 위대한 유적이다. - P344

경찰은 문정전에 불을 지른 채종기라는 노인을 체포해 문화재 방화범으로 검찰에 넘겨 재판에 회부했다. 노인은 정부의 재개발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방화한 것이라고 했다. 법원은 나이가 많고, ‘피해가 경미하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채종기가 또 2008년 2월 11일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그가 바로 숭례문 방화사건의 범인이다. - P349

‘효손‘ 은도장과 「유세손서」 나무,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비의 한과, 눈을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을 지켜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대왕 다음가는 계몽군주, 문화군주가 되었다. - P357

春水滿四澤 
봄물은 네 연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峯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를 많이도 만든다
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떨치고
冬領秀孤松
겨울 고갯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 P364

드라마적인 요소가 이렇게 넘치고도 넘친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끝나지 않는다. 죽은지 250여 년 뒤에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이 서오릉에 다시 모인 것이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함께 서오릉의 명릉(明陵)에  묻혔고, 장희빈의 묘는 원래 경기도 구리시 부근에 있었다가 숙종 45년(1719) 경기도 광주시진해촌(眞海村, 지금의 오포읍 문형리)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969년 이곳을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장희빈 묘소가 서오릉 경내 한쪽 구석에있는 대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결국 숙종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장희빈의 그 끈질긴 사랑의 집념은 귀신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 - P380

조선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여인들 중 품계를 받은 후궁, 궁녀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왕비, 세자빈,  왕대비(왕의 어머니), 대왕대비(왕의할머니)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하지만 내명부의 여인들은 품계를 받았고, 내관과 궁관으로 나뉘었다.
- P381

내관은 왕과 세자의 후궁으로, 정1품부터 종5품까지였다. 서열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이다. 정1품빈에 봉해지면 이름 앞 한 자씩 좋은 단어를 얹어주는데 희빈, 숙빈, 수빈 등이 그것이다. - P381

정5품 상궁(尙宮)은 총책임자로 제조상궁(提調尙宮)이 그중 가장 높다. 정7품 전빈(典賓)은 손님 접대를 맡고, 정8품 전약(典藥)은 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고, 종9품  주치(奏치)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식으로 직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 즉 장희빈은 궁관에서 내관으로 승진한 뒤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것이다.
이 밖에 궁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는 나인(內人)이 있고, 궁관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비자가 있다. 무수리는 상궁의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 통근을 하는 데 비해, 비자는 상근하는 하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 P382

최고의 궁중문학 작품 『한중록』을 저술한 위대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뒤에도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겨우 열한 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는아픔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한을 풀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P391

앙부일구 읽는 법
풍기대 옆에는 세종 때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
晷, 보물 제845호의 복제품)가 있다. 해설사들은 여기서 관람객들에게 해시계 보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앙부일구의 앙부는 ‘솥을 뒤집어 위로 보게 했다‘는 뜻이고 일구는 ‘해 그림자‘라는 뜻이다. - P397

1909년 11월 1일 아침 10시, 개원식이 열렸다. 순종은 연미복 차림에모닝코트(morning coat)를 걸치고 회색 중절모를 쓴 개화된 예복을 입고 참석했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비롯하여 무려 1천 명에 달하는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원을 총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자리에 없었다. 닷새 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 P412

그래서인지 창경궁에 오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 점에서 창경원을 경험했던 구세대와 그렇지 않은 신세대는 창경궁 답사에 임하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경궁 답사의마지막을 창경원 이야기로 마무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세대들이 구세대의 이런 독백을 과연 이해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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