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의 소임을 맡은 제관들은 제사 7일 전, 의정부에 모여 제례의규율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이를 재계라 한다. 그날부터 4일간은 산재(散), 3일간은 치재(齋)를 행하는데, 산재 기간에 왕과 백관들은 집무를 보지만 형벌과 관계된 문서는 처리하지 않는다. 귀로는 음란한 말이나 저속한 음악을 듣지 않고, 눈으로는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입으로는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 파 등 매운 음식을 먹지 않으며, 문상이나 병문안을 하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 P84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 P91
내가 종묘 답사는 늦가을 토요일 오후나 눈 내린 겨울 아침에 자유 관람으로 하라고 권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 길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P92
국가 의례를 행할 때 사용했다. 따라서 새로 지은 창덕궁은 별궁(別宮)이아니라 또 하나의 정궁(正宮)이 되어 양궐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이를 역사적으로 ‘법궁이궁(離宮) 양궐체제‘라고 했다. 왕조로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별도의 궁궐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양궐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 P99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과 왕의 직계존속들이 생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왕의 아버지,생존해 있는 왕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왕의 비빈 등이 포함됐다. 그때문에 계속 궁궐 규모를 확장하거나 별궁을 지어야 했다. 그로 인해 창경궁이 생겼다. - P99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 P101
내가 태조께서 개창하신 뜻을 알고, 또 풍수지리의 설이라는 것에괴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알기는 하지만, 술자(術者)가 ‘경복궁은 음양의형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은 이상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무인년(1398) 집안의 일(제1차 왕자의 난)은 내가 경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이곳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 P103
일제는 왕가의 전통을 지우기 위하여 창경궁을 동궐에서 분리하여 동물원·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이라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만강조하여 관리소 이름을 비원청(秘苑廳)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두 궁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라는 이름 대신 오랫동안 창경원, 비원이라고 불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창덕궁,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국민학교 때는 창경원과 비원으로 소풍을 갔다. - P105
돈화문 앞 월대가 땅에 묻히게 된 것은 1907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 마련한 캐딜락 자동차가 내전까지 들어올 수있도록 월대를 흙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후 1932년 일제가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질러 원남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돈화문 앞으로내면서 광장으로서 월대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미국 제너럴모터스사에서 제작한 순종황제의 어차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P108
나무를 비벼 새 불씨를 만드는 것을 일러 찬수(遂)라 했다. 이때 쓰는 나무의 종류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이를테면 봄에는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 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 P116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 P116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像 - P127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땅이 시키는 대로 한 건물 배치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 두드러진다. 3조란 외조(外朝), 치조(朝), 연조(燕)를 말한다. 외조는 의례를 치르는 인정전, 치조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宣政殿), 연조는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이 주 건물이다. 경복궁에서는 이 3조가 남북일직선상에 있지만 창덕궁에서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에 중국식의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면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가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 P129
창덕궁 전경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서 두드러진다. 창덕궁의 3조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로 인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를 풍긴다. - P130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외조, 치조, 연조의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주례」에 충실한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 - P131
"자연 지형과 지세를 그대로 따르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죠. 요즘 우리나라 건축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건물 대지를 반듯하게 밀어놓고 짓는 데 있어요. 땅을 생긴 그대로 두어야 우리 정서에 맞는 좋은 건축이나오는데 말이죠. 쉽게 말해서 땅이 시키는 대로 하면 좋은 건축이 나옵니다." - P131
이 두 대의 자동차는 주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차고에 방치되어 거의폐차 상태였다. 그러다 1997~2001년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미국과 영국의 본사에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는 아주 희귀한 앤티크 자동차로대접받고 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 어차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하 1층 로비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 P138
순종과 황후의 어차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는 1903년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고 황후가 탄 어차는 1909년 영국 다임러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드문 앤티크 자동차가 되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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