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위 제도와 종묘의 증축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150여 년이 흘러 13대 명종 대에이르면서 종묘는 한차례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5대 봉사를 한다는 것은 그 윗대 조상의 신주는 땅에 매장하여 안치하고 더 이상 제를 지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외로 불천위(不遷位) 제도라는 것이 있다. - P36
불천위 제도란 공덕이 많은 임금의 신위는 변함없이 계속 모신다는뜻으로,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천위라고 한다. 태조는 무조건불천위였고 태종과 세종도 불천위로 모셔졌다. - P36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 P42
우암 송시열이 효종대의 공신으로 배향된 것도 100년 뒤 노론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추가로 들어간 것이었다. - P43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발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 P43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것이 이채롭다. - P44
칠사당에 모신 일곱 신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칠사란 궁중을 지키는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들로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 중류(中), 국문(國門), 공(公), 행(行) 등이다. 사명은 인간의 운명, 사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 사조는 부엌의 음식, 중류는 지붕, 국문은 나라의 성문, 공려는 상벌, 국행은 여행을 관장한다. 그러니 칠사 토착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 것이다. - P44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 P46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 P49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 P52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 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 P52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 P52
국가 의식으로서 종묘 제례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세종대왕이 연회 때 사용하기 위해 회례악(禮樂舞)로 작곡한 것이 「보태평」과 「정대업」이다. 보태평은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으로문덕(文德)을 칭송한 것이고, 정대업은 ‘대업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무공(武功)을 찬양한 것이다. 두 곡 모두 세종 이전 6대조까지, 즉 태조의 네 선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 태종 등의 공을 칭송한 것이다. - P62
내가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데 창제란 예로부터 입법(立法)만큼이나 하기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에서 모두 하고자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하면 못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졌고, 국가가 무사(無)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리라. - P68
1910년 조선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면서 종묘제례도 막을 내렸다. 다만 대한제국 황실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이 향화(香火)를 올리는 것으로 제례를 대신했다. 8·15해방 뒤에는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향화마저 못했다.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란임을말해주는 대목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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