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변의 개나리와 진달래
서울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예나 지금이나 개나리와 진달래다. 그중에서도 화신(花信)의 전령은  개나리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변화로 올해(2017)는 어느 날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고 말았지만 봄꽃의개화에는 엄연히 꽃차례가 있었다.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2월말에도 서울의 꽃들은 미동조차 하지않는다. 3월 중순이 되어야 북한산·인왕산 북악산에 생강나무와 산수유 노란 꽃이 소리소문 없이 피어나고 금세 시내 곳곳에 개나리가 피기시작한다. 서울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 P117

총융청 사령부의 자문밖 이전
자문밖은 숙종 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한 탕춘대성이 축성되면서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변하더니 영조 때는 수도권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廳) 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하게 되면서아예 군사기지로 천지개벽하듯 변했다.
인조 2년(1624)에 설치된총융청의 군사 수는 2만여 명으로 처음엔 사직단 가까이 사령부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종 10년(1669)에 삼청동으로 이전했는데 영조 23년(1747) 에 군영(軍營)을 탕춘대자리로 옮겨서 그 한복판에 사령부 건물을 짓고는 ‘탕춘중성(蕩春中城)‘ 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총융청감관이었던  김상채(金尙彩)의 문집인 『창암집(蒼巖集)』에  수록된 새로 쌓은 탕춘중성」이라는 즉흥시의 소인(小引, 짧은 머리말)에 명확히 나와 있다. - P121

남쪽의 수어청은 남한산성에 두었고, 북쪽의 총융청은 사직단 근처에있었는데 총융청 사령부는 종국엔 탕춘대성으로 오게 되었다. 총융청사령부가 탕춘대 한가운데 있어 탕춘중성이라 했는데 영조는 ‘봄날 질탕하게 논다‘는 뜻의 탕춘이라는 이름이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연융대(鍊戎臺)라고 고쳐주었다. - P122

신영동과 평창동의 유래
총융청이 이렇게 자문밖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들어선 군영을 신영營)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신영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2만 명이 주둔하니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평창(平倉)이라 했다. 이것이 평창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 P122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詰戎餘意此臨亭
漢北天高畫角淸
可愛源泉深有力
冷然一道萬山聲 - P129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 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以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 P149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맛도 있고 유려한 리듬도 있다. 난초 잎이휘어지는 것은 사마귀 머리 같다고 해서 당두(螳頭)라고 하고 끝이 뻗어나가는 것은 쥐 꼬리  같다고  해서 서미 (鼠尾)라고 하는데 석파는 당두에 예서법, 서미에 초서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긴장감과 서정이 동시에 살아난다. 석파가 사용하던 많은 문자도장 중에 난초 그리는 뜻을 강조한것이 둘 있다. 이 도장에 석파 난의 본색이 담겨 있다. - P151

寫作意喜
喜氣寫蘭

난을 그리면서 뜻을 일으킨다
기뻐하는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 P151

유주학선 무주학불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人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만나듯 하고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 P151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 P152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P152

부암동의 유래
부암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부침바위‘라 불리는 부암(付岩)에서 비롯되었다. 부침바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건재했는데 자하문터널이 뚫리고 새 도로가 생기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옛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채만 한 바윗덩이였던 이 부침바위는 창의문과 세검정 사이를오가는 고갯길 중턱에 있었다. 자하문터널을 빠져나와 세검정 쪽으로 가는 큰길 오른편(하림각 건너편)에 있는 부암동 경로당 건물 앞(부암동 141-1번지, 자하문길 262) 에 ‘부침바위 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 P153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 P158

당시 대중지인 『삼천리 1940년 9월호에서는 연간개인 소득 순위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1위는 광산왕 최창학 24만 원, 2위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20만원이고, 간송 전형필이 10만 원, 인촌 김성수가 4만 8천 원이며, 송은이병직은 3만원 내외라고 했다. - P160

그런데 사랑방 두껍닫이에는 흰 종이만 발려 있어 "왜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란다.

"아무것도 없다니. 여보게, 박군, 여기에 얼마나 많은 그림이 들어 있는지 아오."

인생을 달관한 대안목의 허허로운 경지는 이런 것이다. - P162

현진건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것입니다. - P168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현진건은 1940년, 친구의 권유로 미두(豆) 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여 파산했고 부암동 집과양계장을 처분하고는 제기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궁핍 속에서 현진건은 결국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향의 문우였던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대구에서 별세했다. - P169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인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문학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P169

빙허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나1943년 4월 25일 생을 마친 한국 사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암담한 현실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43년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빙허의 굳은 지조와 그 철저한 문학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 살아 숨쉴 것이다. - P169

그런 문학사적 의의 때문이었을까.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 문학비의 앞면에는 「고향」의 한 대목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싶었다.

그런 현진건이 살던 집터라면 길바닥에 표석을 놓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 길가 한쪽에 현진건 문학비라도 세워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 P171

덕수궁의 약사
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이라고 하면 대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던 곳으로 알고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궐이 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 P195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창경궁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면 건축이 바뀌게 마련이고, 건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뜻이기도 하다. 덕수궁을 보면 확실히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97

자격루와 신기전기 화차는 비록 덕수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도 위대한 문화유산들로 조선시대 과학사의 명작이자 큰 자랑이다. 귀중한국보와 보물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덕수궁 답사에서얻는 망외의 ‘득템‘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유물을 이렇게 옥외에전시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비추는 일 없이 덕수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24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 P227

그리하여 김제남이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임을 당했다.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방에 가두고 불을 떼어 죽이는 증살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인목대비는 이렇게 아버지, 형제, 아들, 조카들을 비참하게 잃었고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대비전 궁녀들을 엄하게 감시했다. - P237

이 계축옥사 때문에 광해군은 ‘살제폐모(殺弟廢母)‘, 즉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폭군이 되었고 인조반정 세력도이를 첫번째 죄목으로 지목했다. - P238

그러나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그토록 심하게 인목대비를 박해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대비로서 예를 갖추어 찾아뵈었던 일도여러 번이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있었겠지만광해군에 대한 평가에는 그를 폭군으로 돌아가려는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 P239

광해군이 궁궐에 집착한 이유
본래 광해군은 자질이 뛰어나고 왕세자로서 임진왜란에 적극 복무해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직접전쟁을 치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광해군은 왕이 된 후 외교·국방에서남다른 수완을 보여주었다. - P243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힘겨루기를 하던 당시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적당히 조율하는 ‘주선(周旋)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이 때문에 친명(明) 사대주의 입장이었던 서인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 인조반정이고, 인조 때 외교의 균형이 명나라로 기울면서 청나라가 쳐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 P243

술사의 점술이라는 것이 묘해서, 새문동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 정원군의 옛집을 빼앗아 경덕궁을 지은 것인데 바로 그 정원군의 아들이 인조였으니 참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 P244

덕수궁의 어제와 오늘현재의 덕수궁은 1만 8천 평을 둘러싼 돌담 안에 10여 채의 전각들이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서양식 건물들이 모인 석조전 구역이고 또 하나는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등이 있는 전통 궁궐 구역이다. 그러나 원래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3배 이상 넓어 돌담 밖 북쪽의 옛 경기여고 터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을 모신 선원전 구역이 있었고,
서쪽 정동극장과 예원학교 자리에는 황실의 생활 공간인 수옥헌 구역이있었다. 전통 궁궐 공간은 회랑과 행각들이 전각을 감싸고 있어서 위용과 품위가 있고, 새로 지은 양관들은 덕수궁이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구본신참(舊本參)‘의 근대식 궁궐임을 보여준다. - P259

석조전 뒤편에 있던 벽돌로 지은양관인 돈덕전을 보면 근대 궁궐로서 덕수궁의 모습이 아련히 살아난다. 또 다른 사진으로 덕수궁 북쪽과경희궁 남쪽을 연결하던 석조 구름다리를 보면 왕조 말기 서울에 이런곳이 다 있었던가 싶은 감회가 일어난다. 1901년에 오늘날의 서울역사박물관 언저리에서 옛 경기여고 자리까지 가로질러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름다리는 훗날 새문안로가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 - P260

경운궁의 정문, 대안문으로
1897년 중건 당시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 대문인 인화문(仁化門)이었다. 본래 궁궐의 정문은 남문이고 그  이름에는 될 화(化) 자가 쓰인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인경궁은 명화문, 경희궁은 흥화문이듯이 경운궁에 인화문이 있었다. 고종이 아관파천에서경운궁으로 어할 때 입궐한 문도 인화문이었고, 명성황후의 상여도 이인화문을 통해 청량리에 있던 홍릉으로 나아갔다. - P281

당시 대한문의 이전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던 조원제 편수와 그의제자 이광규 대목, 그리고 최고의 드잡이공인 김천석 장인이 맡았다. 이때 대한문을 해체하지 않고 기와를 다 걷어낸 다음 결구를 단단히 묶고는 마치 뒷걸음치듯 통째로 밀어가며 옮겨놓았다.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대한문이 걸어서 간다"며 신기해했다.(신영춘 조선의 궁궐, 조선일보사 1998) 이전 작업을 지휘한 김천석은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되었다(전설적인 드잡이공인 김천석 장인이 천려일실한 사건이 1966년 불국사 석가탑 해체 때 2층 옥개석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 P285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면서 했던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는 이 중명전을 복원하고 2007년 11월에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맞이해
‘대한제국 헤이그특사‘ 특별전을 연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현장으로만기억되던 중명전을 고종황제가 국권 회복을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역사의 현장으로 각인하여 열사의 순국에 보답하고 싶었다. 개막식에는많은 독립 기념 단체 회원들과 외교부 장관, 네덜란드 대사, 그리고 검사출신이었던 이준 열사를 기리기 위해 검찰총장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 P303

동묘라는 준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서 준말의 사용법은 아주 특이하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을 줄여서 말할 때 슈퍼라고 하지 마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지자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말해도 잘 통한다. 광주에서는 5·18민주화운동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 올해(2017) 광주트라우마센터‘가 문을 열어 오수성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다. 내 친구가 이 센터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주민 대표가 하는 인사말을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단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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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8~60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우선 내가 문화재청장에 부임하게 된 것부터 간단치 않았다. 참여정부 인수위는 1급 관리직이었던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해서 전문가에게 맡길 방침이라며 내게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문화재청은 현법기관이므로 차관급이 되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구두로 내정을 받고 기다렸지만 당시는 여소야대였던지라 정부 뜻대로 되지 않아 1년이 지나도록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않았다. 그동안 내 처지는 아주 애매해서 무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부조직법이 통과되었을 때는 노대통령의 탄핵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나도 아예 잊고 살았는데 6개월 지나 대통령이 업무에복귀한지 얼마 안 된 2004년 9월 1일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유교수님, 비서실장께서 오전 중에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 제주도에 있습니다.˝
˝아이쿠, 큰일났네요.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전화가 다시 왔다.
˝오늘 12시에 문화재청장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있을 겁니다.˝
˝어, 그거 안 되는데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한테 물어봐야죠.˝
˝네-에?˝
나는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와서 문화재청장을 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냉정하기가 돌부처 같은 집사람은 잠시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긴 월급 얼만데?˝
벼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해볼 만한 직장‘이면 가서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수위의 구두발령‘ 후 1년 반이 지나 문화재청장이 되었다. 문화재청은 과연 일해볼 만한 직장이었다. 문화재의 소극적인 관리에서 적극적인 활용으로 정책을 바꾸어 먼저 경복궁 경회루를 43년 만에 개방하니 국민들이 좋아했고 경복궁도 자못 활기를 얻었다. 나는 한양도성의 북악산 성곽도 어떻게 하면 개방할 수 있을까 준비했다.

하산길에 성벽 밑에서 잠시 쉬는데 노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유청장님이 신문사에다 글을 쓰겠다고 하면 지면을 내주겠지요? 어느 신문에는 이 좋은 산을 대통령이 독차지하면 되겠느냐고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좀 기고해주십시오.˝

대통령이 이처럼 북악산 개방에 뜻을 보인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개방하라는 뜻이죠?˝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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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9-24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무현..이라는 다큐를 보고 울었습니다.

대장정 2022-09-24 21:27   좋아요 1 | URL
책읽다 노무현 대통령님 얘기 나오면 반갑고 가슴이 뭉클해져요
 

서울의 옛 지도 한양도성도」와 「경조도」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5백만 명, 총인구의 반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울의 국가적 위상이 실로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生長安草 勝爲邊地花)"고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 P15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양도성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이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있다. - P17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도시 공간의 매력은 자리앉음새에서나온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 P16

서울을 그린 또 하나의 고지도는 한양도성의 외곽까지 그린 경조도(京兆圖)다.  경조란 서울지역이라는 뜻이니 ‘수도권 지도인 셈이다. 이를 보면 북쪽의 북한산(미터), 동쪽의 용마산(348미터), 남쪽의 관악산(629미터), 서쪽의 덕양산(125미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外四山)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성 북쪽으로는 준수하고도 장중한 삼각산과 도봉산이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활모양의 긴 호를 그리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들판 너머에 관악산이 듬직한 수문장인 양안쪽을 지켜주고 있다. - P17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 P21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마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 P22

우뚝 솟은 높은 산이 하늘과 맞닿았으니
한양은 하늘이 열리면서 이루어진 것이로다
굳건한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치고 있고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긴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 P23

그리하여 착수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정도전은 종묘사직단·경복궁등 왕실 건축은 물론 도로와 시장까지 신도의 기본 설계를 완성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P35

한양도성의 공사 실명제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것은 태조 4년(1395) 9월이었다. 이제 다음 공사는 무학대사가 건의한 한양도성의 축성이었다. 그해에는 마침 9월에윤달이 들어 다음 달인 윤9월부터 한양도성 축성에 들어갔다. 태조는 곧바로 ‘도성 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이 또한  정도전에게 기본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 P36

이렇게 결정된 한양도성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6킬로미터)에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다. - P36

한양도성의 성곽 축조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미터)씩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자락의 자연 암반과 절벽을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P36

명나라 사신 예검 倪謙 등루부 登樓賦

북악산이 뒤에 솟고 궁궐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고 성벽이 사면으로 둘렸네
높은 성벽 서쪽으로 구불구불둘려 있고
잇달아 휘둘려서 높고 낮게 동편으로 뻗어갔네 - P45

물을 말하노라면 개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은하수가 꽂힌 것 같고
한강수는 넓게 흘러 발해로 들어가니
물고기를 편하게 키워주고 논밭이 기름지게 해주네 - P46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에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점은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크게다르다. - P46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P48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이 자리가 도읍지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그가 전제로 내세운 첫마디는 "도성을 쌓으면"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고을이던 한양과 조선왕조가 수도로 건설한 한양의 차이는 도성이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한양도성이 있는 서울과 없는 서울의 역사적 품격의 차이를. - P49

그 대신 한양도성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자연공원으로 서울 사람들이 사철 산책하고 등산하며 즐기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사람들은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고 봄가을로 꽃과 단풍을 음미했는데, 이를 ‘순성(城)‘이라고 했다. 풀어 쓰면 ‘성곽 순례‘쯤된다. - P54

이 순성을 가리키며 ‘도성을 한바퀴 빙 돌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했고, 그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에서 순성놀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순성은 근대에 들어 의도적으로 도성의 일부를 허물기 전까지 이어져왔다. 1901년 경의선 부설의 자문을 위해 프랑스에서 초빙된 에밀 부르다레(Émile Bourdaret)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2009)에서 순성놀이를 이렇게 말했다. - P55

서울의 이 성벽은 하루 만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잘 걷고 산을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산책이 된다.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비범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특히 좋은 계절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산 비탈을 따라가면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하다. - P56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 P58

별것도 아닌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
우선 내가 문화재청장에 부임하게 된 것부터 간단치 않았다. 참여정부 인수위는 1급 관리직이었던 문화재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해서 전문가에게 맡길 방침이라며 내게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문화재청은 현법기관이므로 차관급이 되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구두로 내정을 받고 기다렸지만 당시는 여소야대였던지라 정부 뜻대로 되지 않아 1년이 지나도록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않았다. 그동안 내 처지는 아주 애매해서 무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부조직법이 통과되었을 때는 노대통령의 탄핵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나도 아예 잊고 살았는데 6개월 지나 대통령이 업무에복귀한지 얼마 안 된 2004년 9월 1일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유교수님, 비서실장께서 오전 중에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 제주도에 있습니다."
"아이쿠, 큰일났네요.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전화가 다시 왔다.

"오늘 12시에 문화재청장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있을 겁니다."
"어, 그거 안 되는데요."
"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한테 물어봐야죠."
"네-에?"
나는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와서 문화재청장을 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냉정하기가 돌부처 같은 집사람은 잠시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긴 월급 얼만데?"
벼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해볼 만한 직장‘이면 가서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수위의 구두발령‘ 후 1년 반이 지나 문화재청장이 되었다. 문화재청은 과연 일해볼 만한 직장이었다. 문화재의 소극적인 관리에서 적극적인 활용으로 정책을 바꾸어 먼저 경복궁 경회루를 43년 만에 개방하니 국민들이 좋아했고 경복궁도 자못 활기를 얻었다. 나는 한양도성의 북악산 성곽도 어떻게 하면 개방할 수 있을까 준비했다.

하산길에 성벽 밑에서 잠시 쉬는데 노대통령이 내게 말했다.

"유청장님이 신문사에다 글을 쓰겠다고 하면 지면을 내주겠지요? 어느 신문에는 이 좋은 산을 대통령이 독차지하면 되겠느냐고 호되게 비판하는 글을 좀 기고해주십시오."

대통령이 이처럼 북악산 개방에 뜻을 보인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개방하라는 뜻이죠?"
"물론이죠." - P60

성가퀴 따라가는 순성길
성곽 지붕인 성가퀴가 일정한 높이로 경사면을 따라 오르내리며 연이어 달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한 설치미술이자 대지미술이다.
성곽의 구조는 매우 단순해 돌축대를 높이 쌓은 뒤 지붕을 얹은 형태인데 성벽 바깥쪽은 높고 안쪽은 사람 키 정도로 낮다. 성곽의 윗부분 담장을 여장(女墻)이라고  하는데 이를 순우리말로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 P74

한양도성의 가장 멋진 부분은 역시 곡장(曲墻)과 치성 (雉城) 구역이다. 밖에서 성벽에 기어오르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춰 돌출시킨 것을 치성이라고 하는데 마치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며, 성벽이 반원형으로 굽어 돌아가는 부분은 곡장이라고 한다. 외줄로 달리던 성곽이 곡장과치성에 이르러서는멋진 곡선을 그리며 한껏 그 자태를 뽐내니 이는 한양도성의 꽃이라 할수 있다. - P76

중늙은이 이상은 그 난리를 생생히 기억할 테니 긴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젊은 세대들은 아마도 그저 이름으로만 알지도 모르겠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해 창의문 부근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해 무려 14일간의 추격 끝에 29명은 사살하고 1명은 끝내 도주하고 1명(김신조)만 생포한 뒤 끝난 사건이었다. 신출귀몰하는 그들의 민첩한 전투력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1일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비군이창설되었다. - P78

북악산 개방에 앞서 편의시설과 탐방로를 마련하면서 얼마 전 세상을떠난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에게 환경에 맞춰 설계해달라고 의뢰했다.
정기용은 나와 함께 처음 현장답사를 나가 여기서 시내를 내려다보더니갑자기 "하하하!" 하며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한마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하하하! 너희들이 마냥 까불었다마는 여기서 보니 부처님 손바닥에있었구나. 하하하! 멋모르고 고층빌딩이라고 높이 솟으려고 발버둥쳤지만 대자연 앞에선 개미 형상을 못 벗어나는구나. 어이, 유청장, 이 전망대이름이 뭐야?"
"나도 알아보았는데, 없대요." - P79

"너무 오래 닫아두어 다 잊어버린 거겠지. 이렇게 좋은 전망대에 이름이 없다니. 북한산 백운대에 오른 것만큼 시원하구먼."
"그러면 우리 여기는 청운대라고 부를까?"
"그거 좋네." - P80

"정기용이 만난 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언컨트롤드(uncontrolled)라는표현을 쓰더래요. 건축은 공간을 컨트롤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의 건축과성곽을 보면 컨트롤한 것 같지가 않다는 뜻이었어요."
"바로 그 점이 외국인의 눈에 확 들어오나 봐요. 그러한 자연과 인공의관계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하지만 서구인들에겐 낯선 것이니 좀 더 깊이설명하고 내세워도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어요." - P81

내 어린 시절의 자문밖
서울 사람들은 창의문이라면 몰라도 ‘자문밖‘이라면 금방 안다. 정식동네 이름은 부암동·신영동 구기동·평창동·홍지동이지만 나 어렸을 때는 그저 자문밖이라고 불렀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창의문(彰義門)의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것이다. 올해(2017)로 5회째를 맞이하는 이 동네 축제의 이름도 ‘자문밖축제‘라고 한다. - P87

창의문 바깥 울창한 숲과 계곡을 언제부터인지 자하동천(紫霞洞天), 줄여서 자동이라 불렀다. 동천(洞天) 이란 계곡을 일컫는 말로 신선이사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그윽한 골짜기에 붉은 노을이 깃들 때 더욱 환상적으로 보였던지 자줏빛 자, 노을 (를 써 자동이라 했다. 이 계곡 덕에 창의문은 자연스레 자하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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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회사와 신용대출에서 돈을 빌려서 부채가천만 엔이 넘었다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후미에가 턱을 잡아당기듯 끄덕거렸다. "바보같은 짓이죠. 그따위 플라스틱 카드를 믿은 게 잘못이에요."

"쇼코와도 얘기한 적 있는데, 말하자면 그애는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유를 찾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죠. 인생이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좋은 쪽으로는." 혼마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좋은 쪽으로는." 후미에가 살짝 웃었다.

"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66
"착각?"
"네, 그렇죠." 후미에가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 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혼마는 불현듯 떠올렸다. 쇼와 50년대 후반의신용대출 대란의 근저에는 내 집 마련 소망과 그것에서 비롯한 무리한 주택자금대출이 있었다는사와키의 말을.
그것 역시 착각 아니었을까. ‘내 집만 마련하면행복해질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라는착각.....…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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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상대가 화를 내며 "말 같지도않은 소리 집어치워. 그런 기분 나쁜 여자 얘기는꺼내지도 마"라고 고함을 지르는 편이 훨씬 대처하기 쉽다. 분노는 사람이 웅변을 쏟아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혼마의 뇌리에 스친 말은 그것이었다. 세키네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들은 서로를 잡아먹은것이나 다름없다.

신조 집안의 빛이 불어나간 악순환의 궤적은구라타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충분히 상상이갔다. 얼마 되지 않는 계약금, 고액 대출, 생활고때문에 급한 대로 신용대출에서 소액을 끌어다 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비탈길의 맨 꼭대기나다를 바 없다. 한번 굴러떨어지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발목이 잡혀, 두 번 다시 멈출 수 없게 된다…………
"마지막에는 조직폭력단이 얽혀 있는 악질적인도이치* 금융에 걸려들어서, 빚이 몽땅 그쪽으로집중된 모양입니다."

"변호사와 상담도 해봤습니다. 그렇지만 이건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법적으로 교코에게 빚을 갚을 의무가 없으니까 교코가 아버지의 빚 때문에 곤란을 겪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빚쟁이들에게 시달릴 이유도 없다. 그러니 파산신청을 할 수도 없습니다. 교코에게 따라붙지 못하게 금지명령을 받으려 해도, 우리는 장사를 하는 집이니 손님을 가장해서 드나들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빚을 진 건 사실이니까 그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할 사회에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울분을 폭발적으로, 난폭하게 해소해서 범죄까지 저지르는 인간이 넘쳐날 거라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제 겨우 실마리만 잡은 상황이라고도.

"이 세상에는 남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마음에안 들어하는 사람이 있대."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맘에 안 드는 게보이면, 일단 무작정 때려부수고 나서 왜 그랬는지 둘러댄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사키가 왜 멍청이를 죽였는지 뭐라뭐라 핑계를 늘어놔도 들을 필요 없댔어. 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했느냐래."
조금은 뜻밖의 견해였다. 평소의 이사카답지도않다. 사토루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려고 일부러엄격하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와 달리 이사카는 엄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히사에와 둘이 즐겁고 마음 편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을 지탱하는 척추는 뜻밖에도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혼마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당신도 지쳤잖아. 나도 지쳤어. 기진맥진이라고.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두자. 누구든 영원히 도망칠순 없어.

신조 교코는 1989년 11월 25일에 세키네 쇼코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쇼진오토시 精進落L, 
원래는 고인의 사십구재까지 고기나 생선 등을 금하는것을 의미하나, 최근에는 장례식을 마치고 신세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식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신조 교코는 세키네 요시코의 죽음을 계기로 다른 표적에서방향을 바꾸어 쇼코를 노리게 된 것이다.

그 친구는 죽고 없어요.

"그럼, 시짱은 어디 묻혔죠? 어디 버린 거예요?"
다모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것을 아는 인간은 단 한 사람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또 한 번 높게 울려퍼졌다. 얼음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겨울 공기 속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에게 결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불가사의한 새의 울음소리처럼.
"도쿄로 가자."

지리에 어두운 저자의 오사카 취재에 동행해주신 다카무라 가오루 씨, 오사카 사투리에 관해 상세하게 조언해주신 히가시노 게이고 씨, 컴퓨터에관한 초보적인 질문에 답해주신 이노우에 유메히토 씨를 비롯해, 연재 기간 동안 몇 번씩이나 막다른 길목에 부닥친 저자를 격려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소설추리』편집부, 후타바샤 편집부 여러분께도 말미에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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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가 불어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렇습니다. 먼저 신용카드를 만들죠. 편리하게 사용합니다. 쇼핑, 여행, 뭐든 카드 한 장으로 간편하게 할수 있죠. 그러는 사이 매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일단 심사에서 걸리지는 않으니 백화점, 은행, 슈퍼마켓 할 것 없이 앞다퉈 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합니다. 카드 회원이 되면 할인이나 우대 등 각종 다양한 혜택이 따라오죠. 그래서 카드 매수를 늘려나가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용카드의 ‘공급처‘는 사방에널려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쇼핑만이 아니라 현금서비스까지이용하게 됐죠. 편리하니까요. 다시 말해 ‘신용판매‘ 뿐만 아니라 ‘소비자금융‘에도 손을 뻗치게 된겁니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은행 계열 카드의 경우에는 계좌의돈을 인출하는 은행 CD기에서 바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판매나 유통 계열 같으면은행 CD코너같이 알록달록한 인출기가 가게 안팎에 설치되어 있죠. 신용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누르기만 하면, 자기 계좌에서 돈을 꺼내듯 간단히 빚을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어, 뭐야, 현금서비스도 생각보다 간단하네‘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자도그때는 별로 안 높다고 느꼈고요. 십만 엔을 빼서썼는데, 삼천 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약 한달 동안요. 이 점을 기억해주세요. 그때는 이자가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끔씩 이용하게 됐죠."

 "쇼핑, 현금서비스. 계속 편하게 쓴겁니다. 한 번에 왕창 쓰는 게 아니니까 낭비한다는 느낌도 없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빚은 빚이죠.
기한이 오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점점 쌓일수록 재정 상태가 힘들어집니다. "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그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현금서비스에 의지하게 되죠. A사에 결제하기 위해 B사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는 겁니다. 일단 이러기 시작하면 그뒤로는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서비스만으로는 손 쓸 수 없게 됩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신용대출인가요?"

"그리고 여기에서도 또다시 같은 과정이 반복되죠. A사에서 빌린 돈을 갚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B사로갑니다. 이어서 C, D, E사를 찾게 되죠. 신용대출회사에 따라서는 자사의 빚을 갚게 하기 위해 고객에게 다른 회사를 소개해주는 곳까지 있으니까요. 물론 훨씬 수준이 낮고, 자금력이 딸리고, 따라서 대출 심사가 느슨한 회사죠. 경영이 힘들다보니 무제한으로 자꾸 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이자를 거둬들이죠. 대략 그런 구조입니다."

자전거조업:만성적으로 자기 자본이 부족하여 타인의 자본을 잇달아 거두어들여서 가까스로 이어가는 조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시곗바늘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려보십시오.
그 옛날의 정겨운 전당포 시대로 말입니다. 그 시절에는 무제한으로 돈을 빌릴 수가 없었어요. 간신히 변통해서 물건을 전당잡히거나, 기껏해야 월급을 가하는 정도였죠. 번화가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무담보 융자를 해주는 기관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무렵에 비하면 훨씬 살기 편한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 고금리를 단속하자는 겁니다. 대기업 신용대출의 금리는 연이자로 무려 25퍼센트에서 35퍼센트에 이르는데, 이것은 이자제한법과 개정출자법 틈에 끼어서 ‘바람직하지 않지만 일일이 탓할 수는 없다‘는, 이른바 그레이 존에 속하는 금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채무자 개개인에게는 매우 심각한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그래요.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습니다. 금리란등에 업힌 귀신 같은 거라서 갈수록 무거워지죠."

그리고 또 한 가지, 현금서비스라는 말의 마술 때문입니다. 신용대출을 받는 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볼썽사납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용카드로현금서비스를 받는 건 스마트한 느낌이 들죠. 게다가 금리도 신용대출에 비해 싼 것 같은 느낌이들어요. 그러나 그건 어처구니없는 착각입니다.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금리는 연이자로 환산하면25퍼센트에서 35퍼센트 대기업 신용대출 금리와 비슷하죠.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르면 왠지 막연하게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가 안전하다고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실수의 첫걸음이죠."

"그렇죠. 당신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소비자신용 세계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건 잘 알았다. 구조적인 문제, 금리 문제, 서투른 행정, 부족한 교육. 그건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갚을 수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 돈을 빌리고 곤경에 빠지는 건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그 개인에게 약점이 있으니까, 세상을 우습게 보는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추락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일본 국민 전체가 다중채무자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만 해도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제대로된 인간이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다중채무를 떠안은 것은 역시 본인에게 어떤 결함이나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난 말이죠, 강의 같은 데서 ‘어쨌거나 야반도주를 하기 전에, 죽기 전에, 사람을 죽이기 전에파산이라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청중들은 그걸 듣고 웃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닙니다. 파산에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직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살아 있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富의강물에 떠내려가는 버려진 이들의 무리.

돈의 멍에는 거리의 발목까지 휘감는다. 하물며 사람의 발목에는 얼마나 강하게 얽혀들까. 낚아채인 인간이 바짝 말라 죽어갈 때까지일까. 아니면 죽을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서 발목을 끊어내고 도망칠 때까지일까.

・・・・・선생님,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그나저나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로 떠들어대는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고 멍청해 보일까.

혼마는 자기 집에 할부로 산 물건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대형가구나 전자제품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빚이 아니라 가게와 개별적인 계약을 맺어 조금씩 갚아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들었다‘는 것은 관리를 모두지즈코에게 맡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구 색깔이나 전자제품의 기능 등은 모두 그녀의취향대로 결정되었다. 혼마에게 상담하는 건 예산뿐이었다.

"너무 많이 올라서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내 집마련을 꿈도 꿀 수 없게 된 거죠. 그렇다보니 거주목적으로 집을 사려는 보통 사람들은 무리해서 대출을 받지 않아요. 현재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으로 파산하는 사람들 중에는 투자 목적으로 빚을내서 부동산을 사들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요.
원룸맨션을 잘 굴려서 돈을 벌 생각으로 큰 빚을내는 거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거품이 꺼지고 맨션 값이 폭락해버린 거예요. 지금 팔면 원금도 못받아요. 하지만 어쨌든 빚에 대한 이자는 내야 하잖아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아 괴롭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많아요. 십대는 거의 없지만, 이십대에서 삼십대정도. 그리고 한참 간격이 벌어져서 퇴직금이나연금을 다 쏟아부은 중년들. 주식으로 날려버린사람도 많고요."

인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벗어던진 웃옷에 체온이 남듯이. 빗살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듯이. 어딘가에 무언가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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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2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차는 지금 봐도 섬뜻할듯요.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 자체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겠죠.

대장정 2022-09-22 16:57   좋아요 1 | URL
네. 요즘 금리도 오르고 두렵습니다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