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회사와 신용대출에서 돈을 빌려서 부채가천만 엔이 넘었다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후미에가 턱을 잡아당기듯 끄덕거렸다. "바보같은 짓이죠. 그따위 플라스틱 카드를 믿은 게 잘못이에요."
"쇼코와도 얘기한 적 있는데, 말하자면 그애는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유를 찾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죠. 인생이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좋은 쪽으로는." 혼마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좋은 쪽으로는." 후미에가 살짝 웃었다.
"그애가 신용카드 삼매경에 빠진 까닭은, 그렇게 하면 착각에 빠져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66 "착각?" "네, 그렇죠." 후미에가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했다.
"돈도 없지. 학력도 없지. 딱히 이렇다 하게 내세울 능력도 없어요. 얼굴 하나로 먹고살 만큼 예쁜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삼류이하 회사에서 묵묵히 사무나 봐야 하죠. 그런 인간이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이나 소설이나 잡지에서 보고 듣는 풍요로운 생활을 그려보는 거예요. 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노력했죠.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나쁜 길로 빠져 쇠고랑을 찬 사람도 있었겠죠. 그래도 옛날에는 얘기가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떻든 자기 힘으로 그 꿈을 이루거나 현재 상태에만족하고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 안 그래요?"
혼마는 불현듯 떠올렸다. 쇼와 50년대 후반의신용대출 대란의 근저에는 내 집 마련 소망과 그것에서 비롯한 무리한 주택자금대출이 있었다는사와키의 말을. 그것 역시 착각 아니었을까. ‘내 집만 마련하면행복해질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라는착각.....…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66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상대가 화를 내며 "말 같지도않은 소리 집어치워. 그런 기분 나쁜 여자 얘기는꺼내지도 마"라고 고함을 지르는 편이 훨씬 대처하기 쉽다. 분노는 사람이 웅변을 쏟아놓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혼마의 뇌리에 스친 말은 그것이었다. 세키네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들은 서로를 잡아먹은것이나 다름없다.
신조 집안의 빛이 불어나간 악순환의 궤적은구라타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충분히 상상이갔다. 얼마 되지 않는 계약금, 고액 대출, 생활고때문에 급한 대로 신용대출에서 소액을 끌어다 쓴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비탈길의 맨 꼭대기나다를 바 없다. 한번 굴러떨어지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발목이 잡혀, 두 번 다시 멈출 수 없게 된다………… "마지막에는 조직폭력단이 얽혀 있는 악질적인도이치* 금융에 걸려들어서, 빚이 몽땅 그쪽으로집중된 모양입니다."
"변호사와 상담도 해봤습니다. 그렇지만 이건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법적으로 교코에게 빚을 갚을 의무가 없으니까 교코가 아버지의 빚 때문에 곤란을 겪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빚쟁이들에게 시달릴 이유도 없다. 그러니 파산신청을 할 수도 없습니다. 교코에게 따라붙지 못하게 금지명령을 받으려 해도, 우리는 장사를 하는 집이니 손님을 가장해서 드나들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빚을 진 건 사실이니까 그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너희가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할 사회에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울분을 폭발적으로, 난폭하게 해소해서 범죄까지 저지르는 인간이 넘쳐날 거라고.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제 겨우 실마리만 잡은 상황이라고도.
"이 세상에는 남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마음에안 들어하는 사람이 있대."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맘에 안 드는 게보이면, 일단 무작정 때려부수고 나서 왜 그랬는지 둘러댄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사키가 왜 멍청이를 죽였는지 뭐라뭐라 핑계를 늘어놔도 들을 필요 없댔어. 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했느냐래." 조금은 뜻밖의 견해였다. 평소의 이사카답지도않다. 사토루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려고 일부러엄격하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와 달리 이사카는 엄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히사에와 둘이 즐겁고 마음 편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을 지탱하는 척추는 뜻밖에도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혼마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당신도 지쳤잖아. 나도 지쳤어. 기진맥진이라고.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두자. 누구든 영원히 도망칠순 없어.
신조 교코는 1989년 11월 25일에 세키네 쇼코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쇼진오토시 精進落L, 원래는 고인의 사십구재까지 고기나 생선 등을 금하는것을 의미하나, 최근에는 장례식을 마치고 신세진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식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신조 교코는 세키네 요시코의 죽음을 계기로 다른 표적에서방향을 바꾸어 쇼코를 노리게 된 것이다.
"그럼, 시짱은 어디 묻혔죠? 어디 버린 거예요?" 다모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것을 아는 인간은 단 한 사람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또 한 번 높게 울려퍼졌다. 얼음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겨울 공기 속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에게 결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불가사의한 새의 울음소리처럼. "도쿄로 가자."
지리에 어두운 저자의 오사카 취재에 동행해주신 다카무라 가오루 씨, 오사카 사투리에 관해 상세하게 조언해주신 히가시노 게이고 씨, 컴퓨터에관한 초보적인 질문에 답해주신 이노우에 유메히토 씨를 비롯해, 연재 기간 동안 몇 번씩이나 막다른 길목에 부닥친 저자를 격려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소설추리』편집부, 후타바샤 편집부 여러분께도 말미에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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