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변의 개나리와 진달래
서울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예나 지금이나 개나리와 진달래다. 그중에서도 화신(花信)의 전령은  개나리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변화로 올해(2017)는 어느 날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고 말았지만 봄꽃의개화에는 엄연히 꽃차례가 있었다.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2월말에도 서울의 꽃들은 미동조차 하지않는다. 3월 중순이 되어야 북한산·인왕산 북악산에 생강나무와 산수유 노란 꽃이 소리소문 없이 피어나고 금세 시내 곳곳에 개나리가 피기시작한다. 서울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 P117

총융청 사령부의 자문밖 이전
자문밖은 숙종 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한 탕춘대성이 축성되면서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변하더니 영조 때는 수도권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廳) 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하게 되면서아예 군사기지로 천지개벽하듯 변했다.
인조 2년(1624)에 설치된총융청의 군사 수는 2만여 명으로 처음엔 사직단 가까이 사령부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종 10년(1669)에 삼청동으로 이전했는데 영조 23년(1747) 에 군영(軍營)을 탕춘대자리로 옮겨서 그 한복판에 사령부 건물을 짓고는 ‘탕춘중성(蕩春中城)‘ 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총융청감관이었던  김상채(金尙彩)의 문집인 『창암집(蒼巖集)』에  수록된 새로 쌓은 탕춘중성」이라는 즉흥시의 소인(小引, 짧은 머리말)에 명확히 나와 있다. - P121

남쪽의 수어청은 남한산성에 두었고, 북쪽의 총융청은 사직단 근처에있었는데 총융청 사령부는 종국엔 탕춘대성으로 오게 되었다. 총융청사령부가 탕춘대 한가운데 있어 탕춘중성이라 했는데 영조는 ‘봄날 질탕하게 논다‘는 뜻의 탕춘이라는 이름이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연융대(鍊戎臺)라고 고쳐주었다. - P122

신영동과 평창동의 유래
총융청이 이렇게 자문밖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들어선 군영을 신영營)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신영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2만 명이 주둔하니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평창(平倉)이라 했다. 이것이 평창동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 P122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詰戎餘意此臨亭
漢北天高畫角淸
可愛源泉深有力
冷然一道萬山聲 - P129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 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以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 P149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맛도 있고 유려한 리듬도 있다. 난초 잎이휘어지는 것은 사마귀 머리 같다고 해서 당두(螳頭)라고 하고 끝이 뻗어나가는 것은 쥐 꼬리  같다고  해서 서미 (鼠尾)라고 하는데 석파는 당두에 예서법, 서미에 초서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긴장감과 서정이 동시에 살아난다. 석파가 사용하던 많은 문자도장 중에 난초 그리는 뜻을 강조한것이 둘 있다. 이 도장에 석파 난의 본색이 담겨 있다. - P151

寫作意喜
喜氣寫蘭

난을 그리면서 뜻을 일으킨다
기뻐하는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 P151

유주학선 무주학불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人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만나듯 하고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 P151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 P152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P152

부암동의 유래
부암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부침바위‘라 불리는 부암(付岩)에서 비롯되었다. 부침바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건재했는데 자하문터널이 뚫리고 새 도로가 생기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옛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집채만 한 바윗덩이였던 이 부침바위는 창의문과 세검정 사이를오가는 고갯길 중턱에 있었다. 자하문터널을 빠져나와 세검정 쪽으로 가는 큰길 오른편(하림각 건너편)에 있는 부암동 경로당 건물 앞(부암동 141-1번지, 자하문길 262) 에 ‘부침바위 터‘라는 표석이 서 있다. - P153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 P158

당시 대중지인 『삼천리 1940년 9월호에서는 연간개인 소득 순위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1위는 광산왕 최창학 24만 원, 2위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20만원이고, 간송 전형필이 10만 원, 인촌 김성수가 4만 8천 원이며, 송은이병직은 3만원 내외라고 했다. - P160

그런데 사랑방 두껍닫이에는 흰 종이만 발려 있어 "왜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셨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란다.

"아무것도 없다니. 여보게, 박군, 여기에 얼마나 많은 그림이 들어 있는지 아오."

인생을 달관한 대안목의 허허로운 경지는 이런 것이다. - P162

현진건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것입니다. - P168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현진건은 1940년, 친구의 권유로 미두(豆) 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여 파산했고 부암동 집과양계장을 처분하고는 제기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궁핍 속에서 현진건은 결국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향의 문우였던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대구에서 별세했다. - P169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인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문학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P169

빙허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나1943년 4월 25일 생을 마친 한국 사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암담한 현실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43년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빙허의 굳은 지조와 그 철저한 문학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 살아 숨쉴 것이다. - P169

그런 문학사적 의의 때문이었을까.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 문학비의 앞면에는 「고향」의 한 대목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두어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싶었다.

그런 현진건이 살던 집터라면 길바닥에 표석을 놓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 길가 한쪽에 현진건 문학비라도 세워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 P171

덕수궁의 약사
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이라고 하면 대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던 곳으로 알고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궐이 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 P195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창경궁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면 건축이 바뀌게 마련이고, 건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뜻이기도 하다. 덕수궁을 보면 확실히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97

자격루와 신기전기 화차는 비록 덕수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도 위대한 문화유산들로 조선시대 과학사의 명작이자 큰 자랑이다. 귀중한국보와 보물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덕수궁 답사에서얻는 망외의 ‘득템‘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유물을 이렇게 옥외에전시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비추는 일 없이 덕수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24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 P227

그리하여 김제남이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임을 당했다.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방에 가두고 불을 떼어 죽이는 증살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인목대비는 이렇게 아버지, 형제, 아들, 조카들을 비참하게 잃었고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대비전 궁녀들을 엄하게 감시했다. - P237

이 계축옥사 때문에 광해군은 ‘살제폐모(殺弟廢母)‘, 즉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폭군이 되었고 인조반정 세력도이를 첫번째 죄목으로 지목했다. - P238

그러나 실록을 보면 광해군은 그토록 심하게 인목대비를 박해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대비로서 예를 갖추어 찾아뵈었던 일도여러 번이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있었겠지만광해군에 대한 평가에는 그를 폭군으로 돌아가려는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 P239

광해군이 궁궐에 집착한 이유
본래 광해군은 자질이 뛰어나고 왕세자로서 임진왜란에 적극 복무해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직접전쟁을 치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광해군은 왕이 된 후 외교·국방에서남다른 수완을 보여주었다. - P243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힘겨루기를 하던 당시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적당히 조율하는 ‘주선(周旋)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이 때문에 친명(明) 사대주의 입장이었던 서인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 인조반정이고, 인조 때 외교의 균형이 명나라로 기울면서 청나라가 쳐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 P243

술사의 점술이라는 것이 묘해서, 새문동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 정원군의 옛집을 빼앗아 경덕궁을 지은 것인데 바로 그 정원군의 아들이 인조였으니 참언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 P244

덕수궁의 어제와 오늘현재의 덕수궁은 1만 8천 평을 둘러싼 돌담 안에 10여 채의 전각들이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서양식 건물들이 모인 석조전 구역이고 또 하나는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등이 있는 전통 궁궐 구역이다. 그러나 원래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3배 이상 넓어 돌담 밖 북쪽의 옛 경기여고 터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을 모신 선원전 구역이 있었고,
서쪽 정동극장과 예원학교 자리에는 황실의 생활 공간인 수옥헌 구역이있었다. 전통 궁궐 공간은 회랑과 행각들이 전각을 감싸고 있어서 위용과 품위가 있고, 새로 지은 양관들은 덕수궁이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구본신참(舊本參)‘의 근대식 궁궐임을 보여준다. - P259

석조전 뒤편에 있던 벽돌로 지은양관인 돈덕전을 보면 근대 궁궐로서 덕수궁의 모습이 아련히 살아난다. 또 다른 사진으로 덕수궁 북쪽과경희궁 남쪽을 연결하던 석조 구름다리를 보면 왕조 말기 서울에 이런곳이 다 있었던가 싶은 감회가 일어난다. 1901년에 오늘날의 서울역사박물관 언저리에서 옛 경기여고 자리까지 가로질러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구름다리는 훗날 새문안로가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 - P260

경운궁의 정문, 대안문으로
1897년 중건 당시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 대문인 인화문(仁化門)이었다. 본래 궁궐의 정문은 남문이고 그  이름에는 될 화(化) 자가 쓰인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덕궁은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인경궁은 명화문, 경희궁은 흥화문이듯이 경운궁에 인화문이 있었다. 고종이 아관파천에서경운궁으로 어할 때 입궐한 문도 인화문이었고, 명성황후의 상여도 이인화문을 통해 청량리에 있던 홍릉으로 나아갔다. - P281

당시 대한문의 이전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던 조원제 편수와 그의제자 이광규 대목, 그리고 최고의 드잡이공인 김천석 장인이 맡았다. 이때 대한문을 해체하지 않고 기와를 다 걷어낸 다음 결구를 단단히 묶고는 마치 뒷걸음치듯 통째로 밀어가며 옮겨놓았다.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대한문이 걸어서 간다"며 신기해했다.(신영춘 조선의 궁궐, 조선일보사 1998) 이전 작업을 지휘한 김천석은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되었다(전설적인 드잡이공인 김천석 장인이 천려일실한 사건이 1966년 불국사 석가탑 해체 때 2층 옥개석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 P285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면서 했던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는 이 중명전을 복원하고 2007년 11월에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맞이해
‘대한제국 헤이그특사‘ 특별전을 연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현장으로만기억되던 중명전을 고종황제가 국권 회복을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역사의 현장으로 각인하여 열사의 순국에 보답하고 싶었다. 개막식에는많은 독립 기념 단체 회원들과 외교부 장관, 네덜란드 대사, 그리고 검사출신이었던 이준 열사를 기리기 위해 검찰총장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 P303

동묘라는 준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습관에서 준말의 사용법은 아주 특이하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을 줄여서 말할 때 슈퍼라고 하지 마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지자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말해도 잘 통한다. 광주에서는 5·18민주화운동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 올해(2017) 광주트라우마센터‘가 문을 열어 오수성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다. 내 친구가 이 센터에서 열린 행사에 갔다가 주민 대표가 하는 인사말을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단다. - P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