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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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새로운 삼다

제주도는 삼다도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를 훑어보면 또 다른 삼다도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특산물이 많았다. 한국 땅에서 유독 이 제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많고, 따라서 예부터 공납과 진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이방인이 많았다. 풍랑에 휩쓸려 표착한 외국인부터 침략자들, 변방 중의 변방인 이곳에 귀양살이를 온 벼슬아치들까지, 제주 땅에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반란이 많았다. 그것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역사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특산물을 바칠 것을 강요당하다 보면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변방 중의 변방으로 푸대접을 받다 보면 아예 육지 것들에게서 독립하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마련이다.

실질적으로 탐라를 가장 먼저 세력권에 넣은 본토의 나라는 백제였다. 476년, 백제 문주왕 때 탐라가 공물을 바치자 ‘탐라왕은 좌평에, 사신은 은솔에 임명한다’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좌평은 백제의 관료조직에서 최고위급이었으며 은솔도 제3품의 고위직이었음을 보면 백제가 탐라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498년, 백제 동성왕은 탐라가 조공하지 않는다 하여 대규모 정벌군을 일으켰다. 다만 무진주(광주)에 군대가 이르렀을 때 탐라가 사신을 보내 항복했기에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백제는 항복을 받는 대신 앞으로 고구려, 신라와 일절 통하지 말 것을 못 박았다. 그리하여 이후 160여 년 동안 탐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의 남쪽 변방으로서 제주도의 역사는 흐르고, 1896년부터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독립 도道로 분리되었다. 제주읍이 제주도 도청소재지로서 행정과 본토와의 교류 중심지가 되고, 다시 제주시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는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귀족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황금 포탄처럼 둥글고 윤기 나는 보배일세"라고 노래했다.

"과인이 듣기로는 귤의 공납도 폐해가 심하다 하오. 이 나무가 나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소?"

"과연 그렇습니다. 민가에 이 나무가 나면 관청이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앞으로 매년 열매를 따서 바치라고 합니다."

다양한 목적의 이방인들이 찾아오다

제주를 찾아온 이방인들.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표류자들일 때도 있고, 유배자들, 침략자들일 때도 있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세계의 심장’ 나이가 들다

"난 세계에서 가장 활력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 자갈치시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기야 도시치고 숨을 쉬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느냐만, 모든 지리적 여건 때문에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곳은 이곳뿐이야."

부산 출신으로 부산을 종종 무대로 다루었던 유명 만화가, 박봉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서 주인공 최강타에게 등장인물 김대풍이 하는 말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박시춘, 「굳세어라 금순아」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노상직이 1926년에 쓴 「고운 선생 문집」 증간 서문에도 "선생께서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 임경대, 월영대에서 외로운 신하의 분을 삭일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을 만큼 어느새 정설처럼 된 이야기다.
해운대라는 누대는 어느 사이엔가 없어지고 지명만이 남았는데, 동백나무 숲이 유난히 빽빽이 우거져 있으며 그 동백숲은 바다 건너 동백섬까지 이어져 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노래를 부른 조용필을 일약 유명가수의 반열에 올렸으며, 어느새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 1987 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의 ‘로고송’으로도 쓰였다.

부산은 삼국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끝없이 의식해야 했다. 결국 일본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강제한 문명개화는 부산을 ‘삐까번쩍’한 동네와 잡스러운 동네로 나눠 놓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부산은 잡스러움을 바탕으로 이를 악물고 성장했다. 그리고 싸웠다. 한국 자체가 나이 먹어가는 지금, 그런 잡스러움을 되살려서 다시 이 나라에 활력을 불러올지, 세련되고 첨단을 걷는 방식으로 새 길을 개척할지, 부산의 앞길이 곧 한국의 앞길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

고려에서 조선까지, 한국과 중국의 대마도 관련 문헌에는 한결같이 "한반도에서 거리가 가깝다"와 "토질이 나빠서 사람 살기에 좋지 않다"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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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부터다.

신라가 5개밖에 없는 소경小京 중 하나를 이곳에 두었음은 특별한데, 그것은 예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남원이 전주(대략 지금의 전북), 무주(전남), 강주(낙동강 서편의 경남)가 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은 또한 종교에서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는데, 이 사찰은 한국사 최초의 선종 계열 사찰이었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동영東瀛(일본)으로 건너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만복사는 실상사, 선원사보다 더 발전해 남원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실로 장관이어서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도선이 ‘이 땅의 기운을 눌러야 한다’고 본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절을 짓자. 그래서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한과 울분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자. 그래야만 남원으로 모여든 나쁜 기운이 해원 상생의 길을 통해 스러지리라. 이것이 도선이 남원에 여러 사찰을 지은 참뜻이 아니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 개화기 이전의 남원은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광한루이다. 광한루는 처음에 황희가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는 일에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1419년) 짓고는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앉아서 술 마시며 독서하던 곳이다. 황희는 귀양이 풀려 조정에 돌아간 뒤로 자신이 반대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명재상이 된다.

하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의 유명한 옛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의 뜻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을 베푼다’라는 것이다.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심, 흥부의 자애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민초들의 비원이었다.

마음에 황금을 비춰주는 금빛 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를 막기 위해 보강 설치된 진지가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돌산 방답진이었다. 그리고 1591년에 마지막 묘수가 두어진다. 바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반란은 또한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원까지 받아 철저하게 역도들의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내에 10대밖에 없던 비행기가 모조리 여수 하늘로 날아왔을 정도로 정부는 진압에 진심이었다. 숫자와 무기에서 밀린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등장하는데, 정부의 진압은 군인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아니, 반란군이 자취를 감춘 여수, 순천을 접수한 진압군은 오직 민간인만을 무력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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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유적이 많은 조선의 풍패지향

전주 도심에는 옛 유적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는 전주 객사이고, 현판을 보면 호방한 필적으로 풍패지관豐沛之館이라 적혀 있다. 풍패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지칭하여 풍패지향은 건국자의 고향을 뜻하는 관용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풍패지향이 바로 전주라는 뜻이다.

조선 왕실이 소중하게 여긴 도시가 한양 말고, 몇 군데 더 있다. 이성계의 고조부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함흥(조선 왕실에서는 이쪽을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때가 많았다), 원산, 그리고 전주다. 전주는 대대로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호족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견훤이 남긴 그림자의 아픔을 씻다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이 전주가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다. 나중에 붙여진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과 전주全州의 전은 모두 완전하다, 둥그렇다 등의 뜻이 있고, 원산의 원도 그것이라는 추정이다. 과거에 마한의 영토였다가 백제의 영토로 바뀐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1380년에 이성계가 남원 쪽에서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황산대첩을 치르고 개경으로 올라가다가 이곳 전주에 들렀다. 그리고 전주 이씨 종친들과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병사들과 함께 한바탕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풍가」를 불렀다고 한다.

큰 바람大風이 일어났네. 구름은 높이 떠올랐다네.
온 세상에 위엄 크게 떨쳤네. 이제 고향에 돌아왔네.
어디서 또 용맹한 무사를 얻을까.
사방을 지키도록 맡길까?


이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196년에 군벌들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고향인 풍패에 들러 잔치를 베풀고 불렀다는 노래다. 한마디로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노래로, 이성계에게 이미 고려는 자신의 나라였다. 이 노래를 듣고 기가 막혔던 이성계의 친구이자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는 홀로 남고산성에 올라 통곡하며 우국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여립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심문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종결되어, 과연 역모 자체가 있었는지를 포함하여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튼 그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기축옥사로 알려진 많은 사람(1000명이 넘었다)의 처벌, 숙청이 뒤따랐으며, 정여립이 동인 계열이었기에 당시 집권당인 동인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정철 등 서인 쪽에서 세력 역전을 노려 만들어낸 역옥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정여립이 죽도를 중심으로 대동계라는 사조직을 만들고 활동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대동계에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공화주의적 사상과 문약文弱에 빠진 당시 세태에 반해 무공과 실용 학문을 닦는 행동규칙도 있었다고 한다. 이 또한 워낙 파격적이라 사실일지 의문이지만 단재 신채호 등은 이를 사실로 믿고, 정여립을 시대를 뛰어넘은 선구자로 존경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러 신흥종교가 나왔다. 전주 모악산은 예부터 특이한 정기가 서린 곳으로 풍수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까지 계룡산보다도 많은 신흥종교를 낳았는데, 오늘날에도 세력이 대단한 증산교와 그 계통인 보천교, 태을교 등 약 40개의 교단이 모악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향토요리는 양반의 도시이면서 상업의 도시였던 조선 후기의 전주를 나타내며, 신흥종교는 조선 말기 백성의 불안과 고통에 응해 사람과 하늘의 이어짐과, 해원상생, 천지개벽을 추구하는 생각과 마음이 결집된 것이다.

낡은 것과 새것, 양반과 상인, 붉고 푸르고 노랗고 검은 것들이 뒤섞이면서도 결코 잡스럽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것이 비빔밥에서 얻을 수 있는 전주의 교훈이리라. 그러려면 이 도시의 역사에 굴곡을 가져왔던 이단적 존재들, 견훤이나 정여립이나 전봉준과 같은 존재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하나로 어우르며 발전할 수 있는 지혜와 도량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외된 빛고을
광주는 오랫동안 호남의 중요 도시였으나 대표 도시로 떠오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한의 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적으로 부족국가를 세우지는 못한 채 지금의 장성 또는 나주의 부족국가 중 하나의 영역에 속했거나 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백제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4세기 무렵 백제에 통합되었고, 그 전후에 노지奴只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듯하다. 백제 때는 물이 많은 평야인 물들에서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주를 대표하는 산인 무등산 역시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딴 이름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광주는 크고 중요한 도시일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처음에 광주 목사를 맡았는데, 공을 세우자 나주가 광주보다 훨씬 중요하므로 나주 목사로 전임 발령했다는 행주대첩비의 기록에서도 광주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신군부는 전국에 2만 3000명의 계엄군을 투입하고, 제7공수여단에게 광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영원한 민주화 행진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 『광주 출정가』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오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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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관련된 전설이 살아 숨쉬다

"옛날 옛적에, 산에 약초를 캐러 간 젊은이가 산속에서 여인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젊은이는 여인의 뒤를 밟았다가 그 여인이 곰으로 변해 사슴을 때려잡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이 곰과 결혼했음을 깨닫고 도망치던 젊은이는 뒤쫓아 오는 곰에게 잡히기 직전, 금강 변에 이르러 물에 뛰어들었다. 곰도 물에 뛰어들었으나 헤엄치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고마나루(곰나루)라 불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전해지는 ‘고마나루 전설’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흑백 텔레비전에 나오던 「전설의 고향」으로 처음 접했다.

하지만 그 현장인 공주 고마나루에 가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잘하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수심이 얕고 물결이 잔잔한 강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 곰은 헤엄을 잘 친다!

『택리지』는 서울을 수도로 삼은 나라라면 자연히 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도가 제2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준다. 백제든,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약초 캐던 젊은이가 암곰의 품에 안기듯 이곳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날이 왔다.

두 사찰에는 공교롭게도 항일운동과 관련되어 머물다 간 사람들의 흔적도 있다. 먼저 갑사는 기허당 영규靈圭대사가 도를 닦던 곳인데,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을 일으키고 금산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 한 사람은 백범 김구다. 그는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한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에 따라 감형된 뒤 1898년에 탈옥했다. 그리고 몸을 숨긴 곳이 바로 공주 마곡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받고는 1 년 동안 승려로 살았다.

김구가 공주의 품에 숨어들기 약 4년 전, 1894년 말에는 공주 땅에서 비극이 있었다. 바로 우금치전투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2만 명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무참한 학살이었다. 지금 우금치를 가보면 제법 가파른 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동학군은 고개 아래에서 위로 달려 올라갔고, 일본군과 관군은 고개 위에서 그들에게 기관총을 쉴 새 없이 발사했다. 농민들은 몇 차례에 걸쳐 고지 탈취를 시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6·25 전쟁 이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 전투로서 가장 처절하고 처참했던 나흘간의 전투는 동학군의 완전 궤멸과 동학농민운동의 종식으로 끝났다. 지금은 그런 피와 눈물, 울분, 절망과 원한은 간 곳 없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 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만이 조용히 서 있다.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갈수록 커진다면 공주, 청주, 천안 등도 하나의 ‘수도권’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문명을 향한 젊은이의 그리움과 사랑과 안식에 목말랐던 곰의 염원, 잃어버린 왕도의 꿈과 한이 풀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전근대 한반도 최고 교통의 요지

천안삼거리 흥 / 능수야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 휘늘어졌고나 흥

에루화 에루화 흥 / 성화가 났구나 흥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민요인 「천안삼거리」다. 그 첫 연에 나오는 버드나무는 오늘날 천안시의 시목이 되었다. ‘천안’ 하면 곧 버드나무를 떠올릴 정도다. 강릉의 소나무에 비해 버드나무는 유연하고 관능적인 이미지가 뚜렷하다. 나무 자체가 제멋에 겨워 휘늘어진 듯,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휘 구불거린다. 예부터 길가에 많이 심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스쳐가며 잎을 따서 짐짓 우물물 뜬 바가지에 띄워도 보고, 잎을 솜씨 있게 잘라서 버들피리도 불어보며 희롱하는 소재도 된다. 화류계, 노류장화라는 말에서 버드나무 류柳가 나오듯 깊은 산속 고고히 서서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와는 정반대의 이미지가 있다.

조선 후기에 유형원은 『동국여지지』에서 "동도솔과 서도솔을 합쳐 천안부를 만들었다는데, 『삼국사기』에 그런 지명은 없다"며 다섯 용은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대신 지리적 장점이 천안을 만들었을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936년에 왕건은 그동안 천안에서 조련한 군사와 개경에서 끌고 내려온 군사를 합쳐,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출정하여 일리천(경북 선산)에서 신검의 후백제군과 맞붙어 이겼다. 후삼국 시대를 끝맺는 전투였다.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 김남주, 「길」 중

길.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스쳐가고, 부딪치고, 웃고 울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태적 공간이다. 한반도에서 천안만큼 길의 의미를 짙게 머금은 도시는 없다. 그 도시의 내일, 그 도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떤 영광과 아쉬움이,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깃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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