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유적이 많은 조선의 풍패지향
전주 도심에는 옛 유적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는 전주 객사이고, 현판을 보면 호방한 필적으로 풍패지관豐沛之館이라 적혀 있다. 풍패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지칭하여 풍패지향은 건국자의 고향을 뜻하는 관용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풍패지향이 바로 전주라는 뜻이다.
조선 왕실이 소중하게 여긴 도시가 한양 말고, 몇 군데 더 있다. 이성계의 고조부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함흥(조선 왕실에서는 이쪽을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때가 많았다), 원산, 그리고 전주다. 전주는 대대로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호족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견훤이 남긴 그림자의 아픔을 씻다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이 전주가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다. 나중에 붙여진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과 전주全州의 전은 모두 완전하다, 둥그렇다 등의 뜻이 있고, 원산의 원도 그것이라는 추정이다. 과거에 마한의 영토였다가 백제의 영토로 바뀐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1380년에 이성계가 남원 쪽에서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황산대첩을 치르고 개경으로 올라가다가 이곳 전주에 들렀다. 그리고 전주 이씨 종친들과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병사들과 함께 한바탕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풍가」를 불렀다고 한다.
큰 바람大風이 일어났네. 구름은 높이 떠올랐다네. 온 세상에 위엄 크게 떨쳤네. 이제 고향에 돌아왔네. 어디서 또 용맹한 무사를 얻을까. 사방을 지키도록 맡길까?
이 「대풍가」는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196년에 군벌들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고향인 풍패에 들러 잔치를 베풀고 불렀다는 노래다. 한마디로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노래로, 이성계에게 이미 고려는 자신의 나라였다. 이 노래를 듣고 기가 막혔던 이성계의 친구이자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는 홀로 남고산성에 올라 통곡하며 우국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여립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심문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종결되어, 과연 역모 자체가 있었는지를 포함하여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튼 그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기축옥사로 알려진 많은 사람(1000명이 넘었다)의 처벌, 숙청이 뒤따랐으며, 정여립이 동인 계열이었기에 당시 집권당인 동인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정철 등 서인 쪽에서 세력 역전을 노려 만들어낸 역옥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정여립이 죽도를 중심으로 대동계라는 사조직을 만들고 활동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대동계에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공화주의적 사상과 문약文弱에 빠진 당시 세태에 반해 무공과 실용 학문을 닦는 행동규칙도 있었다고 한다. 이 또한 워낙 파격적이라 사실일지 의문이지만 단재 신채호 등은 이를 사실로 믿고, 정여립을 시대를 뛰어넘은 선구자로 존경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러 신흥종교가 나왔다. 전주 모악산은 예부터 특이한 정기가 서린 곳으로 풍수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까지 계룡산보다도 많은 신흥종교를 낳았는데, 오늘날에도 세력이 대단한 증산교와 그 계통인 보천교, 태을교 등 약 40개의 교단이 모악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향토요리는 양반의 도시이면서 상업의 도시였던 조선 후기의 전주를 나타내며, 신흥종교는 조선 말기 백성의 불안과 고통에 응해 사람과 하늘의 이어짐과, 해원상생, 천지개벽을 추구하는 생각과 마음이 결집된 것이다.
낡은 것과 새것, 양반과 상인, 붉고 푸르고 노랗고 검은 것들이 뒤섞이면서도 결코 잡스럽지 않은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것이 비빔밥에서 얻을 수 있는 전주의 교훈이리라. 그러려면 이 도시의 역사에 굴곡을 가져왔던 이단적 존재들, 견훤이나 정여립이나 전봉준과 같은 존재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하나로 어우르며 발전할 수 있는 지혜와 도량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소외된 빛고을 광주는 오랫동안 호남의 중요 도시였으나 대표 도시로 떠오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한의 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적으로 부족국가를 세우지는 못한 채 지금의 장성 또는 나주의 부족국가 중 하나의 영역에 속했거나 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백제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4세기 무렵 백제에 통합되었고, 그 전후에 노지奴只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듯하다. 백제 때는 물이 많은 평야인 물들에서 무진주武珍州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주를 대표하는 산인 무등산 역시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딴 이름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광주는 크고 중요한 도시일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처음에 광주 목사를 맡았는데, 공을 세우자 나주가 광주보다 훨씬 중요하므로 나주 목사로 전임 발령했다는 행주대첩비의 기록에서도 광주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신군부는 전국에 2만 3000명의 계엄군을 투입하고, 제7공수여단에게 광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영원한 민주화 행진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 『광주 출정가』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오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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