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부터다.

신라가 5개밖에 없는 소경小京 중 하나를 이곳에 두었음은 특별한데, 그것은 예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남원이 전주(대략 지금의 전북), 무주(전남), 강주(낙동강 서편의 경남)가 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은 또한 종교에서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는데, 이 사찰은 한국사 최초의 선종 계열 사찰이었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동영東瀛(일본)으로 건너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만복사는 실상사, 선원사보다 더 발전해 남원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실로 장관이어서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도선이 ‘이 땅의 기운을 눌러야 한다’고 본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절을 짓자. 그래서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한과 울분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자. 그래야만 남원으로 모여든 나쁜 기운이 해원 상생의 길을 통해 스러지리라. 이것이 도선이 남원에 여러 사찰을 지은 참뜻이 아니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 개화기 이전의 남원은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광한루이다. 광한루는 처음에 황희가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는 일에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1419년) 짓고는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앉아서 술 마시며 독서하던 곳이다. 황희는 귀양이 풀려 조정에 돌아간 뒤로 자신이 반대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명재상이 된다.

하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의 유명한 옛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의 뜻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을 베푼다’라는 것이다.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심, 흥부의 자애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민초들의 비원이었다.

마음에 황금을 비춰주는 금빛 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를 막기 위해 보강 설치된 진지가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돌산 방답진이었다. 그리고 1591년에 마지막 묘수가 두어진다. 바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반란은 또한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원까지 받아 철저하게 역도들의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내에 10대밖에 없던 비행기가 모조리 여수 하늘로 날아왔을 정도로 정부는 진압에 진심이었다. 숫자와 무기에서 밀린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등장하는데, 정부의 진압은 군인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아니, 반란군이 자취를 감춘 여수, 순천을 접수한 진압군은 오직 민간인만을 무력 진압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