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쇼신쿤東照神君.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신격화한 이름

주겐
무가에 고용되어 잡무에 종사하는 사람. 무사는 봉록을 받을 때 업무 수당에 상당하는 쌀을 따로 받는데, 이 수당을 받는 무사는 주겐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했다

기도
마치, 다리맡 등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구역의 출입구에서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 기도를 담당하는 문지기는 통금 시간에 맞춰 출입문을 닫고 종을 치는 등 맡고 있는 구역을 책임졌다

초메
마치가 골목으로 구획되어 있을 경우 각 블록을 초메라 일컫는다

"이녁은 틀림없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괴한이 찾아왔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만 그자는 다스케한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오쓰유한테 찾아왔던 것이다. 오쓰유의 얼굴, 오쓰유의 목소리, 오쓰유의 손을 빌려 칼을 움켜쥐고.

이즈쓰 헤이시로는 미신에 혹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문지방에 올라섰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많았다. 문지방을 밟으면 그 집안 가장한테 재앙이 내린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이다.

셋타
대나무 껍질로 엮어 가죽 밑창을 댄 신발

도신촌
마치부교쇼에서 일하는 중하급 무사들이 모여 살던 마을

무사들은 동백꽃을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꽃으로 여긴다는 설이 있다. 꽃이 질 때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데, 그것이 무사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저놈의 까마귀, 어제도 그제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꾀 많은 새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인간들이 자기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아니면 사람 눈에 잘 띄는 낮은 곳에서 날개를 쉬거나 먹이를 쪼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다.

미나토야
야屋는 가게, 또는 그 가게의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미나토야란 미나토 상회, 또는 상회의 주인을 가리키는 호칭. 상인들은 이 호칭을 성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상인의 집안 자체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기도 했다

월번
관리인은 마치 자치 조직에 소속되어, 월 단위로 돌아가면서 지신반에서 자치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이즈쓰 헤이시로는 아내는 있지만 자식이 없다. 결혼하고 이십 년이 지났지만 여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흔 줄도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거의 체념하다시피 했다.

세상에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따르는 남자가 가끔 있는데, 이런 사람은 늘 하는 짓이 어린애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또래를 발견하면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마련이라고 한다.

"꽃구경할 때 나를 그렇게 데리고 가 줬으면 얼마나 좋아."

다스키
일할 때 옷소매를 걷어 올려 고정시키기 위해 어깨에 묶는 끈

미아석
대형 화재나 축제 때문에 미아가 많이 발생했던 에도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절, 다리 초입 따위에 있는 돌에 미아를 찾는다는 내용의 종이를 붙였다

조메이지 벚꽃떡
얇게편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고 말아서 찐 후, 소금에 절인 벚나무 이파리로 감싼 떡. 조메이지 앞에서 팔았으며, 스미다 강둑의 벚꽃 구경을 하면서 먹는 명물이다

마키바오리
하급 무사인 도신은 근무중 하오리를 입을 수 없었으며, 하오리를 입을 때는 밑단을 밑에서 위쪽으로 허리띠에 구겨 넣어서 짧게 입어야 했다. 이렇게 허리띠 속에 하오리 밑단을 구겨 넣은 것을 마키바오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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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달려오고 있다.

한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급하게 달려온다. 어지간히 다급한지 발소리가 투닥닥닥 어지럽다.

평민의 주거 지역 ‛마치’ : 에도는 18세기 초에 이미 인구 백만의 대도시였다. 에도 성, 무가 저택, 사찰, 신사 등이 전체 면적의 팔십육 퍼센트를 차지했으며 오륙십만 명에 이르는 평민들은 불과 십사 퍼센트의 면적에 모여 살았다. 평민들이 사는 동네를 ‘마치’라고 했는데, 원칙적으로는 주요 도로를 기준으로 육십 간(약 백십 미터) 정도를 하나의 마치로 구획했으나 실제로는 규모가 다양했다. 마치는 앞뒤 입구에 ‘기도’라는 출입문을 설치하고 문지기를 둔 다분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마치는 주택 소유자들로 구성되는 자치 조직이 이끌며, 막부는 평민을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치 조직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덕분에 소수의 관리가 많은 인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에도에는 약 천칠백여 개의 마치가 있었다.

코에 익은 독특한 냄새도 났다. 녹내처럼 비릿한…….

피다. 오쓰유는 유카타에 피를 묻히고 온 것이다.

"다스케가 살해되었다는군."

"괴한이 와서 오빠를 죽였어요."

주거 형태 ‛나가야’ : 에도 시대, 많은 인구가 좁은 면적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주거 형태가 ‘나가야’라는 공동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나가야는 일반적으로 큰길 쪽에 있는 노변 나가야와, 골목에 자리 잡은 쪽방 나가야로 나눌 수 있다. 노변 나가야는 주상복합형으로, 일층에 점포를 두고 점포 안쪽과 이층은 살림집으로 썼다.

고닌구미五人組. 막부가 만든 주민 상호 감시 및 상호 부조, 연대 책임을 지는 제도

‘지신반마치의 자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요즘 식으로 보자면 파출소, 동사무소, 마을 회관을 합친 듯한 역할을 했다’

하타모토
쇼군 직속 가신 중에서도 쇼군을 알현할 수 있는 신분의 상급 무사

에도 시대에는 무사만이 성을 쓸 수 있었으며, 평민이 성씨를 갖는 일은 극히 예외적이거나 한시적인 일이었다.

마치부교쇼
에도시대 평민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는 최고 기구로, 요즘으로 치면 시청과 경찰청과 지방 재판소를 합친 듯한 곳. 무사나 승려를 관리할 권한은 없었다. 수십 명 정도의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었으므로 업무의 상당 부분은 민간인 마치 자치 조직에 의존했다

도신
무사 계급 중 가장 낮은 지위. 그렇지만 무사이니만큼 마치의 평민들은 ‘나리’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에도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여서 하급 무사가 상급 무사를 단속·체포할 수 없었다. 마치부교쇼는 평민만을 관리한다.

하오리
기모노 위에 덧입는 상의로, 격식을 차릴 때 입는다. 에도 시대에는 어느 정도 직책을 맡은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다

에도 시대의 평민은 기본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관리인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 이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곤키치의 얼굴에 아무리 분칠을 하고 빨간 격자문유곽에서는 기녀들을 빨간 격자문 안에 나란히 앉혀 놓고 손님을 끌었다 안에 앉혀 놔도 손님 한 명 들 리 없다. 가루차도 제대로 빻지 못할걸, 하고 생각하며 헤이시로는 웃었다막부가 공인한 유곽 요시와라에서는 흔히 손님을 받지 못한 기녀에게 가루차 빻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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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싸워야 한다. 4가지 이유를 들겠다. 신앙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하느님의 대리자인 황제를 위하여, 가족과 벗들을 위하여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첫째는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적에게 승리를 허락하신다면 이는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음이다.

둘째, 영광스러운 조국과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전쟁에서 지면 한때 찬란했던 우리의 명예는 수치와 모멸감 속에 사라지고, 이교도 폭군들에게 넘어가게 되므로 우리는 싸워야 한다.

넷째,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들, 그리고 혈육과 벗들을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결사 항전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희망이시니,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이 난국을 맞았으나, 진심을 다하여 나의 명령에 따른다면 이 어려움으로부터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알라(Allah)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자는 아주 적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득이 되고 탈취할 노략품들이 있을 때에만 불길에라도 뛰어들 사람들입니다.

위대하신 알라께서는 "선지자여,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 신성한 전쟁을 선포해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요 종말은 저주스러우리라"(꾸란 제9장 타우바 73절)고 말씀하십니다.

"도시가 함락되었다. 더는 살아서 무엇하랴."
그러고는 말을 몰아 적들의 한가운데로 달려 들어간다. 그의 몸은 조각이 났다.

"아버지,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자식인 저를 술탄이라 하신다면, 제국의 술탄으로서 당신에게 명하노니 돌아와 저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오스만 제국 13대 술탄 메흐메드 3세는 스물아홉 살 때인 1595년, 등극하자마자 무려 열아홉 명의 형제를 살해했다. 이 무자비한 전통은 1603년, 메흐메드 3세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다.

오스만 세력의 팽창과 확장,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 과정을 이룩한 메흐메드 2세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내부 결속과 리더십 확립이 절실했다. 정복자 술탄을 위한 가장 훌륭한 희생양, 그가 바로 할릴 파샤(Çandarlı Halil Paşa)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탄생(330년 5월 11일, 수도 이전)과 멸망(1453년 5월 29일), 황제의 죽음(1453년 5월 29일)과 술탄의 죽음(1581년 5월 3일)이 모두 5월에 발생했다. 5월은 생성의 달이면서 또한 소멸의 달인 것인가. 역사는 5월에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10대 술탄, 재위 1520~1566년, ‘대제(the Magnificent)’]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및 중동 일대에 약 560만㎢의 최대 강국을 건설한다. 정복 국가로서 광활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과 세력, 종교와 문화를 아우르며 623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존속한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특별한 역할과 위치를 구축해왔다. 그 기틀을 놓은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메흐메드 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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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따르지 않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꾸란 제2장 바까라 256절)
나의 비망록도 이로써 끝이 났다. 자, 이제 프란체스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메흐메드 2세의 정복 전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정복자 사후 150년이 지나도록 이 나라는
유럽·중동·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존속되었다.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이 그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거나
국토를 회복한 나라는 모두 46개국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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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저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믿사옵나이다.

어머니야말로 마음의 고향이다. 선지자 무함마드께서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어머니이시다"라고 대답하시지 않았는가.

무릇 신도 지킬 의지와 굳건한 믿음을 가진 백성에게 강림하는 법이거늘······. 빈약한 경제를 탓하며 허황된 미신에 기대어 국방을 돌보지 않고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이번에야말로 톡톡히 치르게 하리라.

너희 그리스인들이 존경하는 페리클레스98의 일화가 생각난다. 원정 함대가 일식(日蝕)을 만나 겁을 먹고 출항을 미루려 하자 그는 말 한마디로 선장과 선원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는 지도자의 조건으로 ‘식견’과 ‘설명력(설득력)’을 첫째·둘째로 꼽았다. 무릇 다스리는 자라면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수가 원하는 일이라도 옳지 않으면 하지 않고, 다수가 반대해도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수행하여왔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는 지도자의 자격으로 식견·설명력·애국심·청렴성 등 4가지를 꼽았다.

"알라는 위대하도다. 알라는 위대하도다.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이다!"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신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 님,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으로 성찬 예배 전에 기도나 찬송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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