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했다.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는 다양한 ‘현행법 위반 행위’를 수반한다. 도로점거·투석·화염병 투척·야간시위 등 시위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실정법과 충돌한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하고 불가피한 수단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 모두는 주권자가 저항권을 행사한 정당행위가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 단계를 거쳤다. 5·16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맹아기’였다. 4·19는 곧바로 5·16이라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고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질서정연하게 새 대통령을 뽑았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엮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다 걷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해 군인이 됐던 예비역 준장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직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첫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됐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 정부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정권의 ‘2인자’였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책도 많이 읽었던 김종필은 우리 정치사의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했다.

반정부 학생 대표들과 공개토론을 한 것을 보면 김종필은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자 대통령의 오른팔이었지만 낭만적 정치인이기도 했다.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기도 했던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법원이 도예종 씨를 비롯한 일부 피고인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내렸지만 북한과 연계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350여 명이 내란죄와 소요죄로 구속당하는 시련을 겪으면서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던 당시의 청년들에게는 ‘6·3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투쟁을 주도했거나 나중 정계·학계·언론계에서 명성을 얻은 인물로는 김중태, 손학규, 이재오, 김덕룡, 현승일, 이명박, 정대철, 이부영, 서청원, 박관용, 하순봉, 김경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중 상당수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치세력에 합류했고 그때 20대 청년으로서 거리시위에 참여했던 세대는 고령 유권자가 되어 보수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사랑도 움직이는데, 정치적 신념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6·3사태가 4·19를 계승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병영국가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 역시 ‘병영국가’로 개조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병영의 기본은 인원 점검이다. 정부는 국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려고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했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해 군복무를 마친 남자 250만 명을 정기적으로 병영에 소환했으며 대학입시에 반공도덕 과목을 신설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사에게 반공교육을 실시했으며 전국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군사교육을 받도록 했다.

김종태, 이문규 등은 사형당했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20년을 복역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어깨동무체’ 서예글씨로 널리 알려졌던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시인 김지하였다. 정부는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랬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구속 기소됐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막았다는 등의 ‘사소한 범죄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니, 웃지 못할 역사의 희극이 아닐 수 없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라고 쓴 독자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이재문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신향식 씨는 사형당했으며 다른 관련자들은 최장 10년 징역을 살았는데, 북한과 연계됐을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민주화투쟁 조직인 줄 알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후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시인 김남주가 구속됐고,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있던 홍세화 씨는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됐다.

부산과 마산 시민이 며칠 동안 궐기했던 이 일을 ‘부마항쟁’이라고 한다.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여서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에 큰 충격을 줬고, 유신체제는 내분으로 무너졌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맞장구쳤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5·16이 정당하다면 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인류 역사는 반란·봉기·내전·혁명·전쟁의 연속이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을 덮친 게 혼돈이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힘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그런데 광주 시민은 부산·마산 시민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忠情棒)’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격렬해졌고 계엄사는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보여줬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1987년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활동가들은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되새기며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도록 투쟁계획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 하순 김대중 씨의 형량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미국 행정부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주의적 유화책’이었다.

우리에게 전두환은 절대악(絶對惡)의 화신이었다. 광주학살과 난폭한 인권탄압을 겪은 만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악의 화신에게 영혼의 상처를 입은 청년지식인들은 세상과 자신을 구할 이념을 찾아 나섰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됐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 정치인 김영삼의 여러 모습 중 단연 최고였다.

전두환 정부는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실제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 죄를 벗은 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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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중국처럼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영향력이 큰 나라를 제외하면, 21세기 지구촌의 주역은 모두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부국(富國)들이다.

2016년 엠브레인의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로 ‘삶의 여유가 없고 복지제도가 미비하며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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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선진국도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고 교회와 귀족계급이 종교적 도그마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미국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처절한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을 겪은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것이었고,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갔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을 그런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선택했고 나도 그 대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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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개혁을 할 수 있는 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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