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새로운 삼다
제주도는 삼다도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를 훑어보면 또 다른 삼다도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특산물이 많았다. 한국 땅에서 유독 이 제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많고, 따라서 예부터 공납과 진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이방인이 많았다. 풍랑에 휩쓸려 표착한 외국인부터 침략자들, 변방 중의 변방인 이곳에 귀양살이를 온 벼슬아치들까지, 제주 땅에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반란이 많았다. 그것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역사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특산물을 바칠 것을 강요당하다 보면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변방 중의 변방으로 푸대접을 받다 보면 아예 육지 것들에게서 독립하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마련이다.
실질적으로 탐라를 가장 먼저 세력권에 넣은 본토의 나라는 백제였다. 476년, 백제 문주왕 때 탐라가 공물을 바치자 ‘탐라왕은 좌평에, 사신은 은솔에 임명한다’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좌평은 백제의 관료조직에서 최고위급이었으며 은솔도 제3품의 고위직이었음을 보면 백제가 탐라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498년, 백제 동성왕은 탐라가 조공하지 않는다 하여 대규모 정벌군을 일으켰다. 다만 무진주(광주)에 군대가 이르렀을 때 탐라가 사신을 보내 항복했기에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백제는 항복을 받는 대신 앞으로 고구려, 신라와 일절 통하지 말 것을 못 박았다. 그리하여 이후 160여 년 동안 탐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의 남쪽 변방으로서 제주도의 역사는 흐르고, 1896년부터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독립 도道로 분리되었다. 제주읍이 제주도 도청소재지로서 행정과 본토와의 교류 중심지가 되고, 다시 제주시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는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귀족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황금 포탄처럼 둥글고 윤기 나는 보배일세"라고 노래했다.
"과인이 듣기로는 귤의 공납도 폐해가 심하다 하오. 이 나무가 나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소?"
"과연 그렇습니다. 민가에 이 나무가 나면 관청이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앞으로 매년 열매를 따서 바치라고 합니다."
다양한 목적의 이방인들이 찾아오다
제주를 찾아온 이방인들.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표류자들일 때도 있고, 유배자들, 침략자들일 때도 있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세계의 심장’ 나이가 들다 "난 세계에서 가장 활력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 자갈치시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기야 도시치고 숨을 쉬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느냐만, 모든 지리적 여건 때문에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곳은 이곳뿐이야."
부산 출신으로 부산을 종종 무대로 다루었던 유명 만화가, 박봉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서 주인공 최강타에게 등장인물 김대풍이 하는 말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박시춘, 「굳세어라 금순아」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노상직이 1926년에 쓴 「고운 선생 문집」 증간 서문에도 "선생께서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 임경대, 월영대에서 외로운 신하의 분을 삭일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을 만큼 어느새 정설처럼 된 이야기다. 해운대라는 누대는 어느 사이엔가 없어지고 지명만이 남았는데, 동백나무 숲이 유난히 빽빽이 우거져 있으며 그 동백숲은 바다 건너 동백섬까지 이어져 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노래를 부른 조용필을 일약 유명가수의 반열에 올렸으며, 어느새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 1987 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의 ‘로고송’으로도 쓰였다.
부산은 삼국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끝없이 의식해야 했다. 결국 일본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강제한 문명개화는 부산을 ‘삐까번쩍’한 동네와 잡스러운 동네로 나눠 놓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부산은 잡스러움을 바탕으로 이를 악물고 성장했다. 그리고 싸웠다. 한국 자체가 나이 먹어가는 지금, 그런 잡스러움을 되살려서 다시 이 나라에 활력을 불러올지, 세련되고 첨단을 걷는 방식으로 새 길을 개척할지, 부산의 앞길이 곧 한국의 앞길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
고려에서 조선까지, 한국과 중국의 대마도 관련 문헌에는 한결같이 "한반도에서 거리가 가깝다"와 "토질이 나빠서 사람 살기에 좋지 않다"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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