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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탐심 - 인문의 흔적이 새겨진 물건을 探하고 貪하다
박종진 지음 / 틈새책방 / 2024년 8월
평점 :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1]
내 책상 위의 후지오호 ―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 다섯 자루
후지산을 처음 본 것은 이번 여행이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후지산 주변의 다섯 호수를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만년필을 모으면서 하나씩 손에 넣었던 플래티넘 #3776 센추리 ‘후지오호(富士五湖) 시리즈’ 때문이다.
후지오호는 후지산 북쪽 기슭을 둘러싼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이호(西湖, さいこ),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의 다섯 호수를 말한다.
플래티넘은 이 다섯 호수를 하나씩 만년필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2011년 ‘本栖(Motosu)’.
두 번째는 2012년 ‘精進(Shoji)’.
세 번째는 2013년 ‘西(Sai)’.
네 번째는 2015년 ‘山中(Yamanaka)’.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가 2016년 ‘河口(Kawaguchi)’였다.
2011년 시작된 시리즈가 2016년 가와구치까지 나오면서 비로소 후지오호 다섯 자루가 완성된 것이다.
플래티넘도 2016년 가와구치를 발표하면서 이를 후지오호 시리즈의 최종작으로 밝혔다.
나는 이 다섯 자루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섯 자루 모두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넣어 사용하지 않았다.
만년필을 사면 당연히 잉크를 넣고 글을 써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녀석들은 처음 손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펜촉에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아직 한 번도 잉크를 머금어보지 못한 처녀 상태의 다섯 자루다.
사진 속에 늘어놓은 순서도 발매 순서 그대로다.
1. 本栖(Motosu) ―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2011년 나온 첫 번째 만년필이다.
후지오호 시리즈의 시작이면서 #3776 센추리의 시작을 알린 모델이기도 하다.
완전히 투명한 몸체가 특징이다.
플래티넘은 이후 공식 자료에서도 本栖를 2011년 후지오호 시리즈의 첫 모델로 소개하면서, 완전한 투명 몸체를 특징으로 들고 있다.
모티프가 된 곳은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깊은 호수이며 물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만년필 역시 색을 거의 넣지 않은 투명한 몸체로 호수의 맑은 물을 표현했다.
이번 여행에서 타누키호에 갔을 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모토스호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타누키호에서 조금 더 가면 모토스호가 나온다.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의 이름과 실제 여행지의 지명이 그대로 겹쳐졌다.
시간만 있었으면 가보고 싶었다.
결국 이번에는 타누키호에서 돌아섰다.
내 책상 위에는 오래전부터 ‘本栖’가 있었는데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인 호수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2. 精進(Shoji) ―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2012년 두 번째로 나온 모델이다.
모티프는 쇼지호(精進湖, しょうじこ).
사진으로 보면 첫 번째 本栖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체에 아주 옅은 푸른빛이 돈다.
투명한 수면에 아침빛이 스며든 듯한 느낌이다.
本栖의 맑은 투명함과는 또 다르다.
두 자루를 나란히 놓아야 그 미묘한 차이가 제대로 보인다.
처음 구입했을 때는 本栖와 거의 비슷한 투명 만년필처럼 보였다.
‘왜 또 투명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햇빛 아래에서 바라보니 本栖와는 다른 은은한 푸른빛이 드러났다.
쇼지호의 수면에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만년필이라는 설명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이른 아침 신칸센을 타고 달리다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런 맑은 겨울 아침빛을 보았다.
오랫동안 책상 위에서 보아온 푸른빛이 실제 후지산의 아침 풍경과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3. 西(Sai) ― 사이호(西湖, さいこ)
2013년 세 번째 모델.
모티프는 사이호(西湖, さいこ)다.
이름은 한자로 달랑 ‘西’.
일본어로는 ‘사이’라고 읽는다.
다섯 자루 가운데서도 사진으로 금방 구별되는 만년필이다.
몸체 전체에 물결이 흐르는 것 같은 독특한 가공이 들어가 있다.
빛을 받으면 투명한 몸체 위로 선들이 반짝이면서 호수의 수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도 이 물결무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만년필을 이리저리 돌려보면 빛을 받을 때마다 몸체 위의 선들이 반짝였다.
‘이건 정말 호수 수면을 담아냈구나.’
그렇게 느꼈다.
이번 도쿄 여행에서는 우에노공원의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도 걸었다.
물론 그곳은 사이호와 전혀 다른 도쿄 한복판의 연못이지만, 수면 위에 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이 만년필의 물결무늬도 생각났다.
서로 다른 장소의 물이었지만 빛을 받아 흔들리는 수면이라는 점에서는 묘하게 겹쳐 보였다.
4. 山中(Yamanaka) ―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2015년 네 번째 모델.
모티프는 야마나카호(山中湖, やまなかこ).
세계 3,776자루 한정으로 만들어졌는데, 숫자 3,776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가져왔다.
플래티넘은 후지오호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약 1,000m에 자리한 야마나카호에 아침의 맑은 빛이 비치며 호수가 반짝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투명한 몸체에 빛이 들어오면 수면이 반짝이는 듯 보이도록 가공한 것이 특징이다.
플래티넘의 대표 만년필인 ‘#3776’이라는 이름 자체가 후지산의 해발고도 3,776m에서 비롯되었다.
야마나카 한정판은 이 상징적인 숫자를 한정수량에도 그대로 적용해 3,776자루를 제작했다.
즉 #3776이라는 모델명과 야마나카의 한정수량 모두 후지산의 높이 3,776m를 공통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 펜을 구입했을 때도 ‘3776’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후지산을 모티프로 한 #3776이라는 이름에 다시 후지산 높이만큼인 3,776자루라는 한정수량을 맞춰놓은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시라이토 폭포를 바라볼 때는 절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물줄기와 그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폭포의 물과 호수의 물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의 모습에서는 山中의 투명한 바디가 떠올랐다.
5. 河口(Kawaguchi) ―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2016년 마지막으로 등장한 다섯 번째 모델이다.
모티프는 가와구치호(河口湖, かわぐちこ).
앞의 네 자루가 대부분 투명하거나 아주 옅은 색인데, 마지막 가와구치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짙은 청색이다.
플래티넘이 붙인 색의 이름은 ‘Dawn Blue’.
해가 뜨기 직전,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시간에 후지산과 가와구치호가 깊은 푸른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플래티넘의 공식 설명도 ‘새벽을 기다리는 가와구치호’를 중심 이미지로 삼아, 정적 속에 떠 있는 후지산과 호수의 수면을 표현했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한정수량은 2,500자루였다.
처음 구입했을 때도 이 짙은 청색은 앞의 네 자루와 확연히 달라 보였다.
투명하거나 옅은 색의 만년필 네 자루 사이에 놓으니 가와구치의 푸른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지막은 새벽의 푸른빛으로 장식했구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느낌이 확실했다.
그래서 다섯 자루를 나란히 놓으면 마지막 가와구치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투명한 네 자루 끝에 짙은 푸른색 한 자루.
후지오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잘 어울리는 만년필이다.
타누키호에서는 커다란 구름 사이로 후지산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숨기를 반복했다.
겨울의 푸른 하늘과 짙은 구름 사이로 눈 덮인 후지산이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와구치의 Dawn Blue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만년필 속에서는 새벽의 푸른빛으로 후지산을 상상했는데, 이날은 실제 후지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 책상 위의 후지산, 창밖의 후지산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다섯 자루를 하나씩 모으면서 후지오호의 이름과 위치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런데 정작 후지산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보았다.
신후지역으로 들어가는 신칸센 오른쪽 창밖으로 후지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렇게 흥분했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만년필 이름으로 익숙했던 후지산과 그 주변의 지명들이 갑자기 실제 풍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책상 위에서는 투명한 바디와 옅은 푸른빛, 물결무늬, 반짝이는 빛, 새벽의 짙은 청색으로 후지산과 다섯 호수를 상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눈 덮인 정상과 구름, 시라이토 폭포의 물줄기, 타누키호의 겨울 수면으로 후지산을 직접 만났다.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 타누키호까지 갔고, 그곳에서 흰 머리의 후지산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다.
타누키호에서 조금만 더 가면 모토스호(本栖湖, もとすこ)였다.
‘저기까지 가면 내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녀석, 本栖의 진짜 호수를 볼 수 있는데.’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거기까지였다.
책상 위에 다시 다섯 자루를 발매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아직 어느 한 자루에도 잉크 한 번 묻히지 않았다.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섯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동안은 만년필을 보면서 호수를 떠올렸다면, 이제는 이 만년필들을 볼 때마다 이번에 직접 보았던 흰 머리의 후지산과 타누키호의 겨울 풍경도 함께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다섯 호수도 남아 있다.
언젠가는 이 다섯 자루의 이름을 하나씩 직접 찾아가 보는 여행도 해보고 싶다.
그때는 책상 위에서만 보아온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를 실제 호숫가에 서서 하나씩 만나보게 될 것이다.
7. 그리고 하나 더, 忍野(Oshino)
후지오호 시리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빠뜨리기 쉬운 만년필이 하나 있다.
오시노(忍野, おしの, Oshino)다.
처음 보면 ‘후지오호 시리즈의 여섯 번째 만년필인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완전히 투명한 몸체를 가지고 있고, 이름 역시 후지산과 밀접하게 연결된 지명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忍野는 후지오호 시리즈에 포함되는 한정판이 아니다.
2018년에 등장한 #3776 센추리의 별도 정규 모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의 출생 배경을 따라가면 다시 첫 번째 후지오호 만년필인 本栖와 만나게 된다.
플래티넘은 2011년 발매한 本栖의 완전히 투명한 몸체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로부터 7년 뒤인 2018년 더욱 높은 투명감을 추구해 忍野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즉 忍野는 후지오호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은 아니지만, 디자인의 계보를 놓고 보면 本栖의 투명한 바디에서 출발한 만년필인 셈이다.
이름의 모티프가 된 곳은 오시노핫카이(忍野八海, おしのはっかい).
후지산의 눈과 비가 지하로 스며들어 오랜 시간을 거친 뒤 용천수로 솟아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물로 유명한 오시노핫카이의 이미지를 보다 높은 투명도의 만년필로 표현한 것이 忍野다.
本栖가 모토스호의 맑고 깊은 물을 담았다면, 忍野는 후지산에서 흘러내려 지하를 거쳐 다시 솟아난 맑은 물을 담은 셈이다.
같은 투명 만년필이지만 출발점은 조금 다르다.
本栖는 ‘호수’.
忍野는 ‘용천수’.
후지산의 물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이어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忍野가 나온 2018년에도 플래티넘은 후지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해에는 후지산의 계절 풍경을 담은 후지슌케이(富士旬景)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쿤푸(薫風, くんぷう, Kumpoo)도 발매됐다.
한쪽에서는 本栖의 투명성을 이어받은 정규 모델 忍野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계절의 후지산을 한정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후지오호 다섯 자루를 완성하고 나면 끝날 줄 알았는데 플래티넘은 그 뒤에도 후지산을 놓아주지 않았다.
호수에서 시작해 용천수로 이어지고, 다시 계절과 구름으로 이야기를 넓혀갔다.
그러고 보면 #3776이라는 이름부터가 후지산 높이 3,776m에서 가져온 것이니, 플래티넘에게 후지산은 그저 한 번 써먹고 끝낼 소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책상 위에는 本栖, 精進, 西, 山中, 河口 다섯 자루가 있다.
忍野는 그 다섯 자루의 정식 식구는 아니다.
하지만 本栖에서 시작된 투명한 #3776의 계보와 후지산의 물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냥 남이라고 하기도 묘하다.
후지오호 다섯 자루 옆에 세워놓으면 꽤 잘 어울릴 녀석이다.
문제는 또 하나다.
이렇게 하나를 알고 나면 또 갖고 싶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