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공화국의 탄생 17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은 원주민 개종을 위해 티저스Tejas로 불리던 지금의 텍사스에 식민지를 구축했다. 또 다른 이유는 멕시코를 비롯한 그들의 중남미 식민지를 북쪽 유럽인들로부터 지켜 내는 버퍼 지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주민을 빼곤 1820년대까지 텍사스에 항구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텍사스는 사실상 불모지였던 것이다.

1961년 NASA의 ‘유인 우주선 센터’가 들어서면서 도시의 항공 우주 산업 발전을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 유인 우주선 센터는 1973년에 텍사스 출신 대통령을 지낸 린든 존슨을 기념해서 존슨 우주 센터( JSC)로 개명되었다. 오늘날 JSC는 10개의 주요 NASA 현장 센터 중 하나로서 미국 우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30년대부터 휴스턴의 가능성을 믿고 정착을 시작했던 앵글로 미국인들, 이후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휴스턴을 찾았던 독일과 이탈리아 이민자들, 노예제도의 어둠 속에서도 휴스턴을 떠나지 않았고 노예해방 이후 휴스턴으로 이주한 흑인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 이들이 휴스턴을 미국에서 (적어도 미국 남부에서) 가장 글로벌한 도시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4년에 채택된 슬로건, ‘휴스턴, 한계를 모르는 도시’에 따라 휴스턴이 앞으로 어디까지 얼마만큼 성장할지 궁금하다.

프랑스-스페인-미국의 영토로 뒤바뀐 도시
1718년 봄,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관료였던 드비엔빌Jean-Baptiste Le Moyne de Bienville이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반월형의 지형에 정착했다. 해류와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11개의 길과 7개의 길이 만나는 직사각형 거주지를 조성시켰다. 이것이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프렌치 쿼터이다. 드비엔빌은 그 시의 이름을 ‘라 누벨 오를레앙La Nouvelle-Orleans’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 왕국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크리올 문화의 집성지가 된 재즈의 도시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랑스가 남긴 유산은 강력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크리올Creoles의 유산이다. 크리올은 1803년 뉴올리언스가 미국의 영토가 되기 전 프랑스와 스페인 지배 시기에 아프리카 흑인, 프랑스와 스페인계, 그리고 원주민들의 피가 섞인 독특한 인종을 일컫는다.

아프리카계와 유럽 백인들 간의 밀착된 문화로 뉴올리언스는 미국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다. 아프리카 특유의 율동, 카리브해의 리듬, 미국인의 블루스, 유럽인들의 코티용 댄스와 악대 전통, 유럽식 발코니 — 이러한 문화가 뒤섞여서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크리올 음악을 탄생시킨 것이다.

재즈는 순식간에 미국의 음악이 되었다. 1920년대는 재즈의 시대라고도 한다.

스윙과 블루스, 복잡하지만 흥겨운 코드와 관객들과 즉흥적으로 소통하는 재즈는 미국인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성, 미국의 번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흥청망청한 20년대’를 상징하는 미국의 음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1815년 1월 8일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영국에게 치욕적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무찔렀던 약 8,000명의 영국군이 6,000명 정도의 미군에게 대패했다. 미군들은 인디언들과의 전투 경험 외에는 이렇다 할 전투 경험도 없었지만, 앤드루 잭슨 장군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영국군은 291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고작 13명이 전사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전투로 기억되는 전투이다. 이 전투가 뉴올리언스 전투였다.

뉴올리언스 전투의 승리로 앤드루 잭슨 장군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이 명성으로 훗날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뉴올리언스는 미국을 지켜 낸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미국은 10여 년 뒤에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남아메리카가 이제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대담한 선포였다. 그것이 향후 미국 외교의 대원칙이 된 ‘먼로독트린’이다.

1812년 전쟁 이후 미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륙 팽창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전쟁 이후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국의 정규군으로부터 본토를 침공당한 적이 없다.

허리케인은 끊임없이 뉴올리언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2005 년 8월 23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루이지애나에 치명타를 날렸다. 적어도 1,500명의 목숨을 앗아 간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자연재해였다. 26 일 뒤에는 허리케인 리타까지 몰아닥쳐 120명의 생명을 앗아 갔다. 3 년 뒤에는 허리케인 구스타브가 150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2021년에는 허리케인 아이다로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허리케인은 수많은 뉴올리언스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카트리나의 경우 무려 25만 명의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상당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20년 뉴올리언스는 인구 면에서 미국 내 53위가 되었다.

크리올의 음악과 음식, 아름다운 건물들, 흥겨운 파티가 계속되는 뉴올리언스의 풍경은 미국인들과 세계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뉴올리언스를 ‘빅 이지Big Easy’라고 하는가 보다. 그곳에서는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크스피크 골드러시
오랫동안 로키산맥의 남단, 지금의 콜로라도에 금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콜로라도의 금광 소식은 미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남부 로키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파이크스피크는 금광으로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를 ‘파이크스피크Pike’s Peak 골드러시’라고 한다.

이때 나온 유행어가 ‘파이크스피크냐 망하느냐’이다. 파이크스피크에 가서 금광을 캐서 한탕을 거머쥐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금에 대한 환상은 한탕 쪽이지 그 반대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성질 급한 사람은 1858년 겨울부터 파이크스피크에 도착해서 금광을 캐려고 했다. 그런데 눈이 녹을 때까지 몇 개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파이크스피크의 골드러시는 대부분 환상으로 드러났고 사람들은 일확천금이 아닌 ‘쪽박’을 찰 수밖에 없었다.

콜로라도는 캔자스 영토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준주로 승격되었다. 1876년 8월 1일 콜로라도는 서른여덟 번째 주로 연방에 합류했다. 그래서 콜로라도는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주로 알려졌다. 1881년, 주 전체 투표에서 덴버시티는 콜로라도의 영구적인 주도로 선택되었다. 덴버시티의 이름은 덴버로 줄였다.

미국 서부 개척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개척민들이 주도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덴버는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금광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도시의 발전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대한 덴버 시민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이런 자부심은 1887년에 덴버에서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가 탄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지역 종교 지도자들과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서 이런 세계적인 국제 자선단체를 설립했던 것은 덴버의 자발적인 모금 전통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유나이티드 웨이는 전 세계에서 1,800개 이상의 비영리 모금 단체를 갖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자부심이 오만으로 변한 도시

덴버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덴버가 KKK의 서부 핵심 도시로 부상했고, 서부에서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준동이 가장 활개 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KKK는 남북전쟁 직후 재건 기간에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쳐 갔다. 1915년 조지아주에서부터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 반공산주의, 금주법, 반이민 운동 등과 같은 백인 보수주의 운동에 맞물려서 KKK는 빠른 속도로 남부는 물론 서부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통의 요지로 급성장하던 덴버가 서부의 대표적인 KKK 중심지로 부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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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 세워진 인디언 땅에서 프랑스의 땅으로
세인트루이스 지역은 서기 700년에서 1400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권을 형성했던 곳이다. 원주민들은 강 주변의 습지와 상습적인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 높은 언덕을 형성해서 그 위에 정착했던 이른바 ‘높이 세운 도시Mound City’ 거주민들이었다.

라클레드는 그곳이 "이후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의 탐험을 지원했던 루이 15세의 수호성인 루이 9세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세인트루이스라고 명명했다.

클라크는 루이지애나 영토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공헌했다. 세인트루이스 서쪽에 위치한 세인트찰스는 루이스-클라크 탐험대가 출발했던 곳으로서 현재는 기념박물관이 들어서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미주리의 연방주 편입을 놓고 남부와 북부의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남부는 새로운 주를 노예주로 편입하고자 했고 북부는 자유주로 편입하고자 했다. 미주리가 당시 남부와 북부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기에 이 문제는 양 진영의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북쪽의 메인이 자유주로 편입되고 미주리가 노예주로 편입되었다. 다만 이후 새로운 영토는 위도 36도 30분을 경계로 해서 북쪽은 자유주로, 남쪽은 노예주로 편입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1820년 미주리 타협’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노예 폐지론자와 노예 지지자들 간의 첨예한 대결장이 되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 폐지론자였던 일라이자 러브조이Elijah Parish Lovejoy 목사는 세인트루이스가 ‘서부로 가는 입구’이자 미국 프런티어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지, 남부 플랜테이션 노예 지지자들의 연장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신문지면을 통해서 강력한 노예 해방론을 설파했다.

러브조이는 1836년 일리노이로 이주했는데, 다음 해 노예 지지자들에 의해 그의 출판사는 불타게 되었고 그 역시 살해되었다. 러브조이의 죽음은 노예 폐지론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전국적으로 강력한 노예 폐지 운동을 촉발시켰다.

세계 박람회와 올림픽을 한 해에 유치했던 도시
1904년 세인트루이스는 세계 박람회와 올림픽을 개최했다. 세인트루이스는 두 이벤트를 개최한 최초의 비유럽 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박람회 때 사용되었던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세인트루이스 동물원, 미주리 역사박물관, 타워 그로브 공원 및 식물원은 세인트루이스의 명소이다.

1904년 박람회는 100년 전 미국의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시작점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이 박람회에서 새로운 음식들이 선보여졌는데, 그것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핫도그와 햄버거이며, 피넛 버터, 원뿔형에 담은 아이스크림, 솜사탕 등이 이때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

세인트루이스 사람들은 미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도시의 유산에 대해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T. S. 엘리엇, 퓰리처상을 만든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가수 티나 터너, 배우 케빈 클라인, 그리고 W. C. 핸디가 작곡한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블루스 곡이다)는 세인트루이스의 자랑거리이다.

가브리엘 프뤼돔의 ‘캔자스타운’
18세기 초에 미주리강과 캔자스강이 만나는 곳을 탐험한 프랑스인들은 그곳을 ‘캔세즈Cansez 인디언의 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캔자스시티가 되었다. 캔세즈는 수족의 일파로서 강을 따라 생활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남쪽 바람 사람’ 혹은 ‘바람의 사람’이었다.

캔자스시티가 지금의 모양을 갖추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도시 조경가 조지 케슬러였다. 그는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사의 발행인인 윌리엄 넬슨과 함께 시내 전체를 대로와 공원 네트워크를 통해 재구성했다. 이러한 캔자스시티 ‘도시 아름답게 조성하기’ 운동은 이후 미국의 여러 도시들은 물론 멕시코시티와 상하이 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역시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의 후원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그가 1935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의회에 들어설 때 루이지애나 출신 상원의원 휴이 롱이 ‘펜더가스트 출신 상원의원’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1939년 토머스 펜더가스트가 탈세 혐의로 투옥되자 트루먼은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이 미주리의 민주주의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 ‘머신’은 흑인, 아일랜드인, 유대인, 가톨릭 등을 포함해서 인종,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했다. 이는 상원의원과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펼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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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미국, 그 중심에 선 시카고
1893년 세계 박람회 장소를 놓고 연방의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가장 접전을 벌인 곳이 뉴욕과 시카고였다. 최종 승자는 시카고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박람회 장소로서 시카고가 선정된 것이다.

뉴욕 언론인 찰스 데이나는 시카고를 ‘바람의 도시Windy City’라고 비꼬았다. 미시간호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가리켜서 붙인 별명이지만, 시카고 사람들은 바람만 잔뜩 뿜어내는 허풍쟁이들이란 의미에서 유래되기도 했다.

1860년 시카고에서 신설 정당인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시카고는 미국의 영웅 링컨을 배출한 도시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될 때까지 밀주 거래를 놓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진 갱단의 세력 다툼은 크나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 중심이 시카고였다. 시카고는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알 카포네가 할거했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카포네는 1931년에 다수의 세금 포탈죄로 11년 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복역 초기부터 뇌의 신경매독으로 고통받다가 194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라졌지만 시카고는 카포네의 도시라는 오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2021년에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살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 시카고이다. 인구 대비 시카고의 범죄는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보다 심각한 상태이다.

시카고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은 그 어디보다 크다. 2016년 시카고 컵스 야구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0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0여 년 동안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컵스의 팬들은 ‘사랑스러운 패배자들’이라는 자부심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시카고가 낳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난 시카고 출신이야. 절대 쫄지 않는다." 이것이 시카고 사람들의 기백이다.

1917년 밀워키의 크로아티아 공동체는 도시의 북쪽에 세이크리드 하트 크로아티아 교구를 설립했고, 1920년대 후반에 웨스트 앨리스에 두 번째 교구인 세인트어거스틴을 설립했다. 5,00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도 밀워키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생선 튀김을 먹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후 20세기 후반에는 보스니아인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20세기 내내 발칸반도는 민족과 종교적 갈등으로 아픔을 겪었는데, 밀워키에서 그 아픔을 뒤로하고 함께 공존하고 있다. 밀워키는 치유와 화해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할리데이비슨의 도시
밀워키는 전 세계 고급 오토바이의 대명사인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 오토바이의 본거지이다. 1903년 밀워키에서 윌리엄 S. 할리William S. Harley와 그의 친구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엔진을 얹어서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었다. 1906년 그들은 지금의 주노 애비뉴에 첫 공장을 설립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할리데이비슨 회사의 본부가 있는 자리이다.

사회주의의 성지
밀워키는 미국에서 가장 사회당이 성공한 도시이다. 20세기 초반부터 1960년대까지 밀워키는 세 명의 사회당 시장을 당선시켰다. 밀워키 사회주의는 독일계 이민자들로부터 유래되었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왔고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 나갔다. 1901년 밀워키 교사로서 밀워키 사회주의의 ‘모세’로 일컬어졌던 빅터 버거Victor Berger는 당시 유명한 노동운동가였던 유진 뎁스Eugene V. Debs와 함께 미국 사회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버거는 최초로 사회당 연방 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805년 대화재로 600여 명이 정착했던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디트로이트 시기市旗의 중앙에 두 여자가 그려져 있는데, 한 여자는 화재로 불탄 디트로이트를 배경에 두고 울고 있고 다른 여자는 새로운 도시가 들어설 것이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바로 위에는 이런 문구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더 나은 도시가 되길, 잿더미를 딛고 부활하리라."

세계 자동차의 수도가 된 헨리 포드의 도시

오대호 수로로 연결된 디트로이트는 주요 항구 및 교통 허브로 부상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우드워드 애비뉴에는 해운 및 조선업에서 성공한 대부호들의 저택이 들어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데이비드 휘트니 저택David Whitney House이다. 토머스 에디슨에 의해 전기를 공급받은 워싱턴 불러바드는 ‘서부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도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디트로이트가 미국 자동차의 메카가 되는 데에는 헨리 포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896년에 마차 무역이 번성하자 포드는 맥 애비뉴의 임대 작업장에서 첫 자동차를 만들었고, 1903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포드는 어셈블리 라인을 이용한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의 생산가를 낮춤으로써 일반인들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는 세계 자동차의 수도로서 미국의 산업을 주도하는 산업 일번지가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디트로이트는 큐 클럭스 클란(KKK)의 북부 거점이 되었으며, 각종 인종 혐오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1943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디트로이트에서 대형 인종 폭동이 발생했다. 총 34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25명이 흑인이었다. 폭도들은 패러다이스밸리의 흑인 정착촌을 공격해서 2020년 가치로 3,000여 달러에 해당하는 재산 피해를 낳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디트로이트의 재정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2013년 7월, 결국 디트로이트는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형 도시로서 역사상 최초로 부도가 난 도시가 된 것이다. 파산 당시 디트로이트 가로등의 40퍼센트가 작동하지 않았고 7만 8,000개의 건물이 버려졌으니 도시는 회생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황폐해졌던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어느 언론인이 "디트로이트와 제3세계 국가는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디트로이트 시내에는 염소들이 어슬렁거리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디트로이트 현실의 슬픈 자화상이다.

시카고가 낳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난 시카고 출신이야. 절대 쫄지 않는다." 이것이 시카고 사람들의 기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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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인들이 차지하는 인구수에 따라 마이애미 정치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다. 다른 중남미 이주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공화당 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피해 피난 왔기 때문에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공화당에 우호적이다. 1961년 케네디 정부가 피그 만 공격에 실패하면서 더욱 공화당에 기울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 간 차이가 좁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이애미 쿠바인들은 공화당 성향이 강하다. 2016년 선거와 2020년 선거에서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에 더 많은 표를 던졌다.

마약의 수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면서 마이애미는 ‘마약의 수도’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콜롬비아 마약의 70퍼센트가 마이애미를 거쳐 미국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황제였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마약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되었고, 그의 미국 본거지가 마이애미였다.

마이애미와 그 메트로폴리탄 지역은 이제 600만 명 인구가 거주하는 미국의 대형 도시로 성장했다. 마이애미의 별명이 ‘마법의 도시Magic City’인데 이는 짧은 기간에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간 도시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법의 근원에 마약이 있으니 이제 마법은 더 이상 옛날의 긍정적 의미라 할 수 없다.

대니얼 분과 윌리엄 클라크의 도시

미국의 역사는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서부 개척의 전설적인 인물이 켄터키의 대니얼 분Daniel Boone이다. 그는 1769년, 지금의 버지니아, 켄터키, 테네시가 만나는 컴벌랜드갭을 지나 켄터키로 들어가는 황무지를 불태워서 길을 닦았다.

남북전쟁에서 켄터키는 중립을 선택했다. 연방 대통령 링컨의 출생지이자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출생지이기도 했던 켄터키는 중립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켄터키 주민들은 갈라졌다. 남부연합에 지원해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고 연방에 지원해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형제가 형제에게 총을 겨눈 대표적인 주가 켄터키였다. 링컨의 처남들도 남군에 지원했다. 대통령인 매형에게 총을 겨눈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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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도의 성지로 시작한 메릴랜드 식민지

1632년 메릴랜드 식민지는 최초의 가톨릭교도의 피난처로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세실 칼버트 남작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찰스 1 세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를 메릴랜드라고 불렀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Henriette Marie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볼티모어의 맥헨리 요새Fort McHenry가 영국군의 포화로 불에 타고 있을 때 메릴랜드의 변호사이며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맥헨리 요새의 방어〉라는 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미국 국가의 가사가 된 것이다. 국가의 1절은 불타는 맥헨리요새에 휘날리는 성조기를 그려 내고 있다.

흑인들은 볼티모어의 서쪽과 동쪽에 주로 거주하는데 이를 ‘검은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흑인들이 나비의 날개 모양으로 동서로 나눠져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백인들은 주로 중앙과 남동부에 거주해서 L자형 대형을 이루는데, 이를 ‘백인 L’이라고 한다.

1607년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세운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과 1630년에 세워진 요크타운, 그리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였던 윌리엄스버그, 이 세 곳을 버지니아의 ‘삼각 역사 유적지’라고 부른다. 이곳 어디든지 자동차로 채 30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식민지 시대 버지니아의 역사적 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최고의 역사 관광지이다.

롤프와 포카혼타스 사이에 토머스 롤프라는 아들이 있었다. 토머스는 이후 많은 후손을 보았고, 그들은 버지니아 역사와 미국 역사에서 전설적인 롤프-포카혼타스의 혈통을 이어 갔다. 그중 한 명이 버지니아 정치인이자 대농장주였으며 버지니아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 랜돌프였다. 그는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장손으로, 그의 어머니가 제퍼슨 대통령의 장녀였다.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영부인 에디스 볼링 골트 윌슨은 포카혼타스의 9대 손이다. 1920년대 후반에 남극을 발견했던 리처드 에버린 버드도 롤프-포카혼타스의 후손이며, 그의 동생인 해리 플러드 버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떠올랐던 인물이다. 버드 상원의원은 민주당이었지만 흑백 분리주의자로서 의회 내에서 강력한 인종주의 세력을 주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선조가 최초로 인종 간 결혼을 했던 롤프-포카혼타스임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군은 찰스타운을 비롯해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내륙 지대에서 왕당파의 적극적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1781년 후반에 영국군이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패배함으로써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잭슨 대통령 이후 이렇다 할 강력한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에 미국은 세 명의 상원의원이 사실상 각 지역의 대표자 역할을 했다. 북부를 대표하는 대니얼 웹스터, 서부를 대표하는 헨리 클레이, 남부를 대표하는 존 캘훈, 이 세 명의 상원의원이 주도하는 이른바 ‘상원 삼두정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었다. 캘훈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찰스턴은 자연스럽게 남부 주들의 정치적 일번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늦게 설립된 식민지

미합중국의 토대가 되는 13개 식민지 중에서 가장 늦게 개척된 식민지가 조지아이다.

영국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사실상의 남부 경계로 보았고, 스페인은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을 그들의 북부 경계로 여겼으며,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인근의 내륙 지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도 조지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지 않았다. 이 틈새를 노려 오글소프는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했고, 영국 왕 조지 2세의 이름을 따서 조지아라고 명명했다.

셔먼은 남부연합의 군수 및 병참의 중심이었던 애틀랜타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는 남북전쟁이 쉽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무려 3,000여 개의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 불타는 애틀랜타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음료인 코카콜라가 애틀랜타에서 상품화되었다. 1886년에 남북전쟁 중에 남부연합의 대령이었던 애틀랜타의 어느 약사가 조지아는 물론 남부, 그리고 미국 전체의 신화를 창출했다. 그가 코카콜라를 만든 존 펨버턴이다.

코카콜라의 독특한 단맛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공산주의의 철의 장막도 녹일 만큼 그 영향은 지대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곧 이은 소련 연방의 해체의 보이지 않는 힘은 코카콜라가 갖는 자본주의의 단맛이라고 할 수 있다.

킹 목사는 1963년 8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인종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하고도 호소력 있게 외치며 감동을 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탤러해시는 텍사스주 오스틴과 함께 연방군에 포획되지 않은 단 2개의 남부연합의 수도였다.

새로운 쿠바
1949년 피델 카스트로 혁명이 발발하자 수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이애미는 그 지역적 인접성으로 인해 이후 15년 동안 약 50만 명의 쿠바인들이 마이애미에 정착했다. 1980년대와 그 이후에 쿠바인들은 꾸준히 마이애미로 이주했는데 이때 건너온 쿠바인들이 약 40만 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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