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국, 그 중심에 선 시카고
1893년 세계 박람회 장소를 놓고 연방의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가장 접전을 벌인 곳이 뉴욕과 시카고였다. 최종 승자는 시카고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박람회 장소로서 시카고가 선정된 것이다.

뉴욕 언론인 찰스 데이나는 시카고를 ‘바람의 도시Windy City’라고 비꼬았다. 미시간호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가리켜서 붙인 별명이지만, 시카고 사람들은 바람만 잔뜩 뿜어내는 허풍쟁이들이란 의미에서 유래되기도 했다.

1860년 시카고에서 신설 정당인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시카고는 미국의 영웅 링컨을 배출한 도시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될 때까지 밀주 거래를 놓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진 갱단의 세력 다툼은 크나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 중심이 시카고였다. 시카고는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알 카포네가 할거했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카포네는 1931년에 다수의 세금 포탈죄로 11년 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복역 초기부터 뇌의 신경매독으로 고통받다가 194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라졌지만 시카고는 카포네의 도시라는 오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2021년에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살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 시카고이다. 인구 대비 시카고의 범죄는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보다 심각한 상태이다.

시카고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은 그 어디보다 크다. 2016년 시카고 컵스 야구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0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0여 년 동안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컵스의 팬들은 ‘사랑스러운 패배자들’이라는 자부심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시카고가 낳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난 시카고 출신이야. 절대 쫄지 않는다." 이것이 시카고 사람들의 기백이다.

1917년 밀워키의 크로아티아 공동체는 도시의 북쪽에 세이크리드 하트 크로아티아 교구를 설립했고, 1920년대 후반에 웨스트 앨리스에 두 번째 교구인 세인트어거스틴을 설립했다. 5,00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도 밀워키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생선 튀김을 먹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후 20세기 후반에는 보스니아인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20세기 내내 발칸반도는 민족과 종교적 갈등으로 아픔을 겪었는데, 밀워키에서 그 아픔을 뒤로하고 함께 공존하고 있다. 밀워키는 치유와 화해의 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할리데이비슨의 도시
밀워키는 전 세계 고급 오토바이의 대명사인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 오토바이의 본거지이다. 1903년 밀워키에서 윌리엄 S. 할리William S. Harley와 그의 친구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엔진을 얹어서 움직일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었다. 1906년 그들은 지금의 주노 애비뉴에 첫 공장을 설립했는데 이곳이 지금의 할리데이비슨 회사의 본부가 있는 자리이다.

사회주의의 성지
밀워키는 미국에서 가장 사회당이 성공한 도시이다. 20세기 초반부터 1960년대까지 밀워키는 세 명의 사회당 시장을 당선시켰다. 밀워키 사회주의는 독일계 이민자들로부터 유래되었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왔고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 나갔다. 1901년 밀워키 교사로서 밀워키 사회주의의 ‘모세’로 일컬어졌던 빅터 버거Victor Berger는 당시 유명한 노동운동가였던 유진 뎁스Eugene V. Debs와 함께 미국 사회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버거는 최초로 사회당 연방 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805년 대화재로 600여 명이 정착했던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디트로이트 시기市旗의 중앙에 두 여자가 그려져 있는데, 한 여자는 화재로 불탄 디트로이트를 배경에 두고 울고 있고 다른 여자는 새로운 도시가 들어설 것이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바로 위에는 이런 문구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더 나은 도시가 되길, 잿더미를 딛고 부활하리라."

세계 자동차의 수도가 된 헨리 포드의 도시

오대호 수로로 연결된 디트로이트는 주요 항구 및 교통 허브로 부상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우드워드 애비뉴에는 해운 및 조선업에서 성공한 대부호들의 저택이 들어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데이비드 휘트니 저택David Whitney House이다. 토머스 에디슨에 의해 전기를 공급받은 워싱턴 불러바드는 ‘서부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화려한 도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디트로이트가 미국 자동차의 메카가 되는 데에는 헨리 포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896년에 마차 무역이 번성하자 포드는 맥 애비뉴의 임대 작업장에서 첫 자동차를 만들었고, 1903년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포드는 어셈블리 라인을 이용한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의 생산가를 낮춤으로써 일반인들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는 세계 자동차의 수도로서 미국의 산업을 주도하는 산업 일번지가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디트로이트는 큐 클럭스 클란(KKK)의 북부 거점이 되었으며, 각종 인종 혐오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1943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디트로이트에서 대형 인종 폭동이 발생했다. 총 34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25명이 흑인이었다. 폭도들은 패러다이스밸리의 흑인 정착촌을 공격해서 2020년 가치로 3,000여 달러에 해당하는 재산 피해를 낳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디트로이트의 재정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2013년 7월, 결국 디트로이트는 파산 신청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형 도시로서 역사상 최초로 부도가 난 도시가 된 것이다. 파산 당시 디트로이트 가로등의 40퍼센트가 작동하지 않았고 7만 8,000개의 건물이 버려졌으니 도시는 회생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황폐해졌던 것이다.

디트로이트의 어느 언론인이 "디트로이트와 제3세계 국가는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디트로이트 시내에는 염소들이 어슬렁거리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디트로이트 현실의 슬픈 자화상이다.

시카고가 낳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난 시카고 출신이야. 절대 쫄지 않는다." 이것이 시카고 사람들의 기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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