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공화국의 탄생 17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은 원주민 개종을 위해 티저스Tejas로 불리던 지금의 텍사스에 식민지를 구축했다. 또 다른 이유는 멕시코를 비롯한 그들의 중남미 식민지를 북쪽 유럽인들로부터 지켜 내는 버퍼 지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주민을 빼곤 1820년대까지 텍사스에 항구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텍사스는 사실상 불모지였던 것이다.

1961년 NASA의 ‘유인 우주선 센터’가 들어서면서 도시의 항공 우주 산업 발전을 위한 자극제가 되었다. 유인 우주선 센터는 1973년에 텍사스 출신 대통령을 지낸 린든 존슨을 기념해서 존슨 우주 센터( JSC)로 개명되었다. 오늘날 JSC는 10개의 주요 NASA 현장 센터 중 하나로서 미국 우주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30년대부터 휴스턴의 가능성을 믿고 정착을 시작했던 앵글로 미국인들, 이후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휴스턴을 찾았던 독일과 이탈리아 이민자들, 노예제도의 어둠 속에서도 휴스턴을 떠나지 않았고 노예해방 이후 휴스턴으로 이주한 흑인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 이들이 휴스턴을 미국에서 (적어도 미국 남부에서) 가장 글로벌한 도시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2014년에 채택된 슬로건, ‘휴스턴, 한계를 모르는 도시’에 따라 휴스턴이 앞으로 어디까지 얼마만큼 성장할지 궁금하다.

프랑스-스페인-미국의 영토로 뒤바뀐 도시
1718년 봄,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관료였던 드비엔빌Jean-Baptiste Le Moyne de Bienville이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반월형의 지형에 정착했다. 해류와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11개의 길과 7개의 길이 만나는 직사각형 거주지를 조성시켰다. 이것이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프렌치 쿼터이다. 드비엔빌은 그 시의 이름을 ‘라 누벨 오를레앙La Nouvelle-Orleans’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 왕국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크리올 문화의 집성지가 된 재즈의 도시

짧은 기간이었지만 프랑스가 남긴 유산은 강력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크리올Creoles의 유산이다. 크리올은 1803년 뉴올리언스가 미국의 영토가 되기 전 프랑스와 스페인 지배 시기에 아프리카 흑인, 프랑스와 스페인계, 그리고 원주민들의 피가 섞인 독특한 인종을 일컫는다.

아프리카계와 유럽 백인들 간의 밀착된 문화로 뉴올리언스는 미국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다. 아프리카 특유의 율동, 카리브해의 리듬, 미국인의 블루스, 유럽인들의 코티용 댄스와 악대 전통, 유럽식 발코니 — 이러한 문화가 뒤섞여서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크리올 음악을 탄생시킨 것이다.

재즈는 순식간에 미국의 음악이 되었다. 1920년대는 재즈의 시대라고도 한다.

스윙과 블루스, 복잡하지만 흥겨운 코드와 관객들과 즉흥적으로 소통하는 재즈는 미국인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성, 미국의 번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흥청망청한 20년대’를 상징하는 미국의 음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1815년 1월 8일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영국에게 치욕적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무찔렀던 약 8,000명의 영국군이 6,000명 정도의 미군에게 대패했다. 미군들은 인디언들과의 전투 경험 외에는 이렇다 할 전투 경험도 없었지만, 앤드루 잭슨 장군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영국군은 291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고작 13명이 전사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전투로 기억되는 전투이다. 이 전투가 뉴올리언스 전투였다.

뉴올리언스 전투의 승리로 앤드루 잭슨 장군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이 명성으로 훗날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뉴올리언스는 미국을 지켜 낸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미국은 10여 년 뒤에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남아메리카가 이제 미국의 영향권에 있다는 대담한 선포였다. 그것이 향후 미국 외교의 대원칙이 된 ‘먼로독트린’이다.

1812년 전쟁 이후 미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륙 팽창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전쟁 이후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국의 정규군으로부터 본토를 침공당한 적이 없다.

허리케인은 끊임없이 뉴올리언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2005 년 8월 23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루이지애나에 치명타를 날렸다. 적어도 1,500명의 목숨을 앗아 간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자연재해였다. 26 일 뒤에는 허리케인 리타까지 몰아닥쳐 120명의 생명을 앗아 갔다. 3 년 뒤에는 허리케인 구스타브가 150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2021년에는 허리케인 아이다로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허리케인은 수많은 뉴올리언스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카트리나의 경우 무려 25만 명의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상당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20년 뉴올리언스는 인구 면에서 미국 내 53위가 되었다.

크리올의 음악과 음식, 아름다운 건물들, 흥겨운 파티가 계속되는 뉴올리언스의 풍경은 미국인들과 세계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뉴올리언스를 ‘빅 이지Big Easy’라고 하는가 보다. 그곳에서는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크스피크 골드러시
오랫동안 로키산맥의 남단, 지금의 콜로라도에 금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콜로라도의 금광 소식은 미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남부 로키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파이크스피크는 금광으로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를 ‘파이크스피크Pike’s Peak 골드러시’라고 한다.

이때 나온 유행어가 ‘파이크스피크냐 망하느냐’이다. 파이크스피크에 가서 금광을 캐서 한탕을 거머쥐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금에 대한 환상은 한탕 쪽이지 그 반대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성질 급한 사람은 1858년 겨울부터 파이크스피크에 도착해서 금광을 캐려고 했다. 그런데 눈이 녹을 때까지 몇 개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파이크스피크의 골드러시는 대부분 환상으로 드러났고 사람들은 일확천금이 아닌 ‘쪽박’을 찰 수밖에 없었다.

콜로라도는 캔자스 영토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준주로 승격되었다. 1876년 8월 1일 콜로라도는 서른여덟 번째 주로 연방에 합류했다. 그래서 콜로라도는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주로 알려졌다. 1881년, 주 전체 투표에서 덴버시티는 콜로라도의 영구적인 주도로 선택되었다. 덴버시티의 이름은 덴버로 줄였다.

미국 서부 개척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개척민들이 주도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덴버는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금광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도시의 발전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대한 덴버 시민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이런 자부심은 1887년에 덴버에서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가 탄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지역 종교 지도자들과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서 이런 세계적인 국제 자선단체를 설립했던 것은 덴버의 자발적인 모금 전통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유나이티드 웨이는 전 세계에서 1,800개 이상의 비영리 모금 단체를 갖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자부심이 오만으로 변한 도시

덴버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덴버가 KKK의 서부 핵심 도시로 부상했고, 서부에서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준동이 가장 활개 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KKK는 남북전쟁 직후 재건 기간에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쳐 갔다. 1915년 조지아주에서부터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 반공산주의, 금주법, 반이민 운동 등과 같은 백인 보수주의 운동에 맞물려서 KKK는 빠른 속도로 남부는 물론 서부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통의 요지로 급성장하던 덴버가 서부의 대표적인 KKK 중심지로 부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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