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인들이 차지하는 인구수에 따라 마이애미 정치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다. 다른 중남미 이주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공화당 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피해 피난 왔기 때문에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공화당에 우호적이다. 1961년 케네디 정부가 피그 만 공격에 실패하면서 더욱 공화당에 기울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 간 차이가 좁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이애미 쿠바인들은 공화당 성향이 강하다. 2016년 선거와 2020년 선거에서 이들은 도널드 트럼프에 더 많은 표를 던졌다.

마약의 수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면서 마이애미는 ‘마약의 수도’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콜롬비아 마약의 70퍼센트가 마이애미를 거쳐 미국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황제였던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마약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되었고, 그의 미국 본거지가 마이애미였다.

마이애미와 그 메트로폴리탄 지역은 이제 600만 명 인구가 거주하는 미국의 대형 도시로 성장했다. 마이애미의 별명이 ‘마법의 도시Magic City’인데 이는 짧은 기간에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간 도시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법의 근원에 마약이 있으니 이제 마법은 더 이상 옛날의 긍정적 의미라 할 수 없다.

대니얼 분과 윌리엄 클라크의 도시

미국의 역사는 서부 개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서부 개척의 전설적인 인물이 켄터키의 대니얼 분Daniel Boone이다. 그는 1769년, 지금의 버지니아, 켄터키, 테네시가 만나는 컴벌랜드갭을 지나 켄터키로 들어가는 황무지를 불태워서 길을 닦았다.

남북전쟁에서 켄터키는 중립을 선택했다. 연방 대통령 링컨의 출생지이자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출생지이기도 했던 켄터키는 중립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켄터키 주민들은 갈라졌다. 남부연합에 지원해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고 연방에 지원해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형제가 형제에게 총을 겨눈 대표적인 주가 켄터키였다. 링컨의 처남들도 남군에 지원했다. 대통령인 매형에게 총을 겨눈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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