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 세워진 인디언 땅에서 프랑스의 땅으로
세인트루이스 지역은 서기 700년에서 1400년까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권을 형성했던 곳이다. 원주민들은 강 주변의 습지와 상습적인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 높은 언덕을 형성해서 그 위에 정착했던 이른바 ‘높이 세운 도시Mound City’ 거주민들이었다.

라클레드는 그곳이 "이후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의 탐험을 지원했던 루이 15세의 수호성인 루이 9세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세인트루이스라고 명명했다.

클라크는 루이지애나 영토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인들과 원주민들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공헌했다. 세인트루이스 서쪽에 위치한 세인트찰스는 루이스-클라크 탐험대가 출발했던 곳으로서 현재는 기념박물관이 들어서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미주리의 연방주 편입을 놓고 남부와 북부의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남부는 새로운 주를 노예주로 편입하고자 했고 북부는 자유주로 편입하고자 했다. 미주리가 당시 남부와 북부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기에 이 문제는 양 진영의 첨예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북쪽의 메인이 자유주로 편입되고 미주리가 노예주로 편입되었다. 다만 이후 새로운 영토는 위도 36도 30분을 경계로 해서 북쪽은 자유주로, 남쪽은 노예주로 편입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1820년 미주리 타협’이다.

세인트루이스는 노예 폐지론자와 노예 지지자들 간의 첨예한 대결장이 되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 폐지론자였던 일라이자 러브조이Elijah Parish Lovejoy 목사는 세인트루이스가 ‘서부로 가는 입구’이자 미국 프런티어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지, 남부 플랜테이션 노예 지지자들의 연장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신문지면을 통해서 강력한 노예 해방론을 설파했다.

러브조이는 1836년 일리노이로 이주했는데, 다음 해 노예 지지자들에 의해 그의 출판사는 불타게 되었고 그 역시 살해되었다. 러브조이의 죽음은 노예 폐지론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전국적으로 강력한 노예 폐지 운동을 촉발시켰다.

세계 박람회와 올림픽을 한 해에 유치했던 도시
1904년 세인트루이스는 세계 박람회와 올림픽을 개최했다. 세인트루이스는 두 이벤트를 개최한 최초의 비유럽 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박람회 때 사용되었던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세인트루이스 동물원, 미주리 역사박물관, 타워 그로브 공원 및 식물원은 세인트루이스의 명소이다.

1904년 박람회는 100년 전 미국의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시작점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이 박람회에서 새로운 음식들이 선보여졌는데, 그것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핫도그와 햄버거이며, 피넛 버터, 원뿔형에 담은 아이스크림, 솜사탕 등이 이때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

세인트루이스 사람들은 미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도시의 유산에 대해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게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T. S. 엘리엇, 퓰리처상을 만든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가수 티나 터너, 배우 케빈 클라인, 그리고 W. C. 핸디가 작곡한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블루스 곡이다)는 세인트루이스의 자랑거리이다.

가브리엘 프뤼돔의 ‘캔자스타운’
18세기 초에 미주리강과 캔자스강이 만나는 곳을 탐험한 프랑스인들은 그곳을 ‘캔세즈Cansez 인디언의 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캔자스시티가 되었다. 캔세즈는 수족의 일파로서 강을 따라 생활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남쪽 바람 사람’ 혹은 ‘바람의 사람’이었다.

캔자스시티가 지금의 모양을 갖추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도시 조경가 조지 케슬러였다. 그는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사의 발행인인 윌리엄 넬슨과 함께 시내 전체를 대로와 공원 네트워크를 통해 재구성했다. 이러한 캔자스시티 ‘도시 아름답게 조성하기’ 운동은 이후 미국의 여러 도시들은 물론 멕시코시티와 상하이 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역시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의 후원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였다. 그가 1935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의회에 들어설 때 루이지애나 출신 상원의원 휴이 롱이 ‘펜더가스트 출신 상원의원’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1939년 토머스 펜더가스트가 탈세 혐의로 투옥되자 트루먼은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펜더가스트 ‘정치 머신’이 미주리의 민주주의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 ‘머신’은 흑인, 아일랜드인, 유대인, 가톨릭 등을 포함해서 인종,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했다. 이는 상원의원과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펼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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