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6
이문구 지음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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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소설을 읽다 보면 썩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그 재미의 내용이, 작가의 출신 지역에 다라 남북간에 두동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미가 있어도 그 재미가 줄거리에 있는 소설이 있고 말이나 문장에 있는 소설이 있으며, 대개 관북ㆍ관서ㆍ해서 지방 출신의 소설은 전자에, 그 이남 지역 출신의 소설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 것이 곧 『태평천하』였다.-19쪽

나는 이 작품을 20세 때 읽었다. 1958년에 낸 민중서관의 『한국문학전집』 가운데의 하나로, 나온 지 3년이나 지나서 헌책방에 낱권으로 돌아다니던 것을 순전히 싼 맛에 사 보게 된 것이었다. -19쪽

나는 이 작품을 어떤 소설이라고 말해야 좋을는지 통 요령부득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세월이 이렇게 흐른 뒤에도 여전하였다. 그러다가 접때서야 최시한 씨의 『가정 소설 연구』에서 "묘사보다 서술이 우세하고 보여 주기보다 말해 주기의 방식을 취하는 채만식 소설 가운데에서도 유독 이 작품은, 서술 대상 이전에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풍자적 서술 행위"(보수 이념의 풍자 구조/태평천하)라는 설명으로 비로소 떠오르는 것이 있게 되었다. 묘사보다 서술이 우세하고 보여 주기보다 말해 주기의 방식을 취했던 것은, 채만식 이전에 이야기책이나 고대 소설의 한 전통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19~20쪽

그러나저러나 나는 북도 출신들이 아무리 능라도를 그림같이 그려 내고 을밀대를 중창하듯이 단쳥해놓았더라도, 소설은 그렇게 써야 하는가 보다 하고 예사롭게 넘어간 반면에, 윤직원 일가의 단체 사진을 비롯하여 식구대로 증명사진을 찍어 가면서 '말해 주는' 채만식의 말에는, 그것이 비록 "그렇게 즘잖 놓았다가넌 논 팔어 먹것네"니, "착착 깎아 죽일 놈"이니 하는, 그악스러운 지주 집안의 상스러운 '구습'口習(입버릇)을 근저당해 놓고 쓰다시피 했더라도(『태평천하』에 "이 집안은 싸움을 근저당해 놓고 씁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말해 주는 글'이 아니라 '보여 주는 육성'을 읽은 셈이었다. -20쪽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데에는 일찍이 이야기책이나 고대 소설을 낭독하면서 문장의 호흡과 가락의 맛을 느껴 본 장단 외에 두어 가지 이유가 더 있다.-20쪽

......그러므로 말투가 비슷하거나 같이 쓰는 방언이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태평천하』에 나오는 애여(아예)ㆍ지천(꾸중)ㆍ워너니(원체)ㆍ시들부들(흐지부지)ㆍ빈들빈들(빙글빙글)ㆍ충그리다(지체하다)ㆍ갱기찮다(괜찮다)ㆍ걸걸하다(자꾸 욕심내다)ㆍ~체껏(~된 몸이)ㆍ~간듸(~는가) 따위, 그러닝개루(그러니까) 외에는 거의가 함께 쓰는 방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족보는 윤직원네와 다르더라도 그 일어서고 자빠지고 한 빌미가 윤직원네와 사돈이나 했으면 십상 좋을 집안이 고향에 여럿이나 있었던 것도, 이 작품에 재미 들리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윤직원네 권속들의 행실과 행짜를 내가 아는 어느 집안의 누구누구와 비교해 가면서 읽는 것도 남다른 흥미였기 때문이었다.-21쪽

그렇다면 이 작품이 내 글에 미친 것은 무엇일까.
그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중에 언젠가 김주영 선배가 나더러 우스갯소리로 "멀쩡한 사람(작중 인물) 병신 만드는 데에 수가 난 사람"이라고 하던 말이 언뜻 떠올랐다.

만약 나에게 작중 인물을 희화하는 데에 약간의 소질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혹 『태평천하』에서 옮은 '구습'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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