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6
이문구 지음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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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영감이 우리 집에 마을 와서 이렇게 물었다.
"이씨, 세상에서 젤 짠 사람이 어딧 사람인지 아셔?"
"갯가 사람이겠지요."-59쪽

"그럼 갯가 사람 중에서두 젤 짠 사람은?"
내가 대답을 못하자 영감은,
"그럼, 이런 말은 들어 보셨어? 산 김가 열이 죽은 최가 하나 못 당허구, 산 최가 열이 해주 사람 하나 못 당허구, 개성 사람 열이 강화 사람 하나 못 당하구, 강화 사람 열이 수원 사람 하나 못 당헌다는 말 말여."
"그건 어디서 들었나 읽었나, 금시초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깍쟁이 중에서두 돌깍쟁이인 수원 사람 찜 쪄 먹구 사는 게 어딧 사람인지는?"
"그건 모르겠는데요."
"차차 알게 될 게요. 그게 바루 우리 화성 사람들이니께. 그중에서두 벌거벗구 팔십 리를 뛴 건 우리 발안 사람이구."
전에 발안 사람 하나가 안양 교도소에 있다가 한겨울 오밤중에 탈옥을 했는데 바야흐로 날이 새자 마라톤 연습생으로 가장하기 위해 걸치고 있던 수의를 벗어 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발안의 자기 집까지 뛰어온 일이 있었다는 거였다.
내가 물었다.
"그럼 수원 사람 열이 화성 사람 하나 못 당허구, 화성 사람 열이 발안 사람 하나를 못 당헌다 그 말씀인가요?"
영감이 대답했다.-60쪽

"두말하먼 잔소리지. 그래두 짜기는 남양 사람이 더 짜. 남양 가 보셨어?"
"못 가 봤어요."
"가 보셔. 꼭 한번 가 보라구. 하여커나 얼마나 짠지......"
영감은 새삼스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서 자기가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61쪽

몇 해 전이었나, 영감이 아직 민방위대에서 벗어나기 전이었다. 한여름이었다. 남양만 근처의 갯가로 무장간첩이 올라왔다는 소문과 함께 민방위 대원까지 비상소집을 하여 총을 나누어 주었다. 간첩을 잡을 떄까지 며칠이고 경비를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 민방위 대원이 배치된 곳은 남양면의 장터 거리여싿. 대개 50m에 한 사람 꼴로 보초를 서게 하였다. 영감은 지루하고 따분하여 붙저지를 못하던 중에 우연히 고개를 쳐들었다가 갯가 쪽 하늘에 난리가 난 것을 발견하였다. 먹구름이 진을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름으로 보나 바람결로 보나 소나기를 해도 웬만큼 하고 말 기미가 아니었다. 소나기 정도로 초소 이탈을 허용할 리도 만무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바로 옆에 지물포가 있고, 그 한구석에 비닐 더미가 보였다. 그때만 해도 비닐은 지물포에서나 파는 물건이었다. 비닐은 원통형이라 한 발쯤 끊어서 한쪽 끝을 매면 그대로 자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두 발쯤 끊어서 자루를 만들어-61쪽

머리부터 뒤집어쓰면, 소나기 아니라 세상없는 비가 오더라도 끄떡없을 터이었다. 영감의 주머니에는 단돈 백 원 한 닢밖에 없었으나 값이 1m에 20원이라 하여 적이 마음이 놓였다. 값만 물어 놓고 사지 않은 것도 마음이 느긋해졌기 때문이었다. 또 가게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빗발을 시작한 뒤에 사더라도 늦을 턱이 없는 일이었다. 구름장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비닐이나 끊어 놓을까 하고 다시 가서 물어보니, 주인은 눈 하나 까딱 않고 1m에 40원이라는 것이었다. 영감은 비위가 상하여 속으로 '누가 팔아 주나 봐라' 하며 돌아섰다. 정말 웬만한 비라면 오기로라도 그냥 견뎌 볼 셈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다지기도 전에 하늘이 구름에 뒤덮이고 벌써 빗발을 하는 것이었다. 영감은 하는 수 없이 그 가게로 뛰어가서 비닐을 끊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1m에 70원을 부르는 거였다. 영감이 기가 막혀 하고 있는 사이 보초를 섰던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감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었다. 가게 주인은 다시 80원으로 올렸다. 영감은 끝끝내 비닐을 사지 않았다. 돈을 꾸어 주마고 해도 사양하였다. 돈이 썩어도 사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62쪽

팔아 주고 싶지가 않았다. 영감은 종내 그 비를 다 맞았고, 비상은 이튿날 식전에야 해제되었다.
"그럼 누가 더 짠 겁니까?"
"짜기야 그쪽 사람들이 짜지."
"그럼 그쪽 사람이 이긴 겁니까?"-62쪽

"이기기는 내가 이긴 거구."
"겨울에 발가벗구 팔십 리를 뛴 사람이나, 밤새 비 맞구 보초 슨 양반이나 세긴 세네요."
"세기야 센 데지, 센 덴데, 예전버터 뭐가 센 덴지 아셔?"
"뭐가 센 덴데요?"
"바람이 센 데요, 바람이. 그래서 발안, 바ㅡ란이라구 부른다는 게요."
세기는 세었다. 우리 동네의 우리 계원 열두 명이 떼 지어 나가면 어디를 가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무슨 일이나 하기로 작정만 하면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계원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들이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그들이 하자는 것이면 무슨 일이든지 함께하였다.-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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