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현대명시 120 - 개정 16종 국어 교과서 전 작품을 실은 리베르 개정 16종 국어교과서 문학작품
이대욱 해설 / 리베르스쿨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개정 16종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120 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책이다.

 

학창시절에 처음 읽었던 시를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요즘 고등학생들은 어떤 시를 읽나 궁금하기도 해서 읽는다.

과연 처음 읽는 시가 많고 처음 보는 시인 이름도 있다.

 

기억나는 시부터 얘기해보자.

학창시절에 읽은 시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박목월의 나그네, 이육사의 광야, 이육사의 청포도, 김춘수의 꽃 정도다. 사실 그땐 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시험에 대비해 반강제로 외웠던 것이지만, 그때도 윤동주의 서시는 낮이건 밤이건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순간, 그 하늘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보물같은 것이어서 그런 시를 외운다는 자체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학생때는 시를 시로, 문학을 문학으로 감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겠다. 이 책을 통해 다시 보는 윤동주의 서시나 그가 쓴 다른 시들ㅡ김영랑, 박목월, 이육사의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다.ㅡ을 읽으니 내 마음에 바람이 분다. 태풍같이 센 바람, 겨울처럼 찬 바람, 가을 저녁처럼 서늘한 바람, 여름 과수원 오두막처럼 시원한 바람, 봄 밤 바닷가처럼 설레이는 바람... 학창시절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이 모든 바람을 오늘 나는 기꺼이 반가이 즐거이 맞고 있다.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고향,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자화상, 길, 십자가, 참회록, 간」이렇게 여덟 편, 가장 많은 시가 수록된 시인은 윤동주다. '서시'나 '자화상'은 지금까지도 외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읽었지만, '쉽게 씌어진 시'와 '간'은 여기서 처음 본다. '또 다른 고향'은 제목이 생소해서 모르는 시인줄 알았는데 내용을 읽으니 어렴풋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백골'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치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 . .

아... 외로운 사람 윤동주여!

아... 그리운 시인 윤동주여!

 

그의 시를 읽는 내 심정이 왜 이리 사무치는 것일까.

그는 너무 적은 시를 남기고 너무 빨리 갔다.

 

너무 적은 시

너무 빨리 간 시인

사무치는 마음

아,

이런게 시구나.

이런게 시로구나.

이런게..

 

그런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最初)의 악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를 따라 읽는다.

'삶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따라 쓰면서..

 

쉽다. 너무 쉽다. 너무 쉬운 세상이다.

 

배신도 쉽고

거짓말도 쉽고

변명도 쉽다.

 

사랑도 쉽고

이별도 쉽고..

 

결혼도 쉽고

이혼은 더 쉽고..

 

성공도 쉽고

실패는 더 쉽고..

 

이 모든 '쉽고' 앞에는 '남에게는'이 빠졌다.

나에게는 어렵다.

 

사랑도 어렵고

이별도 어렵고

결혼은 더 어렵고

이혼은 말도 못하게 어렵고

사는 게 어렵고

시도 어렵다.

 

쉬운게 부끄러운 거라면

어려운건 쓸쓸하다.

 

마음 먹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사는 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나는 꽤 많은 시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윤동주 시집은 없다.

오늘, 마음 먹었으니 당장 한 권 사야겠다, 하면서

책을 너무 쉽게 사는 것도 부끄러운 것일까 생각하게된다. 

별..

 

시인이 너무 쉽게 쓴 시를

내가 너무 어렵게 읽는구나.  

 

 

딱 한 편.

 

아래는 이 책에 딱 한 편씩 시가 실린 시인의 이름과 시 제목이다. 

 

김기림(바다와 나비),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 유치환(바위), 김남조(겨울 바다), 김종길(성탄제), 김춘수(꽃), 박두진(해), 심훈(그날이 오면), 이성부(벼), 이용악(그리움), 정한모(가을에), 강은교(우리가 물이 되어, 고정희(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곽재구(새벽 편지), 기형도(엄마 걱정),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김혜순(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도종환(담쟁이), 문정희(찔레), 복효근(춘향의 노래), 유안진(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이성선(사랑하는 별 하나), 이해인(살아 있는 날은), 정현종(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황동규(조그만 사랑 노래)

 

이 중에 김남조의 에세이집과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이해인의 『꽃삽』, 도종환의 책들을 선물 받거나 사서 읽었다. 다른 시인들은 두 편 이상씩 실렸는데 이 시인들은 딱 한 편이 실렸으니 그 한 편이 더 의미있겠다 싶어서 시인과 제목을 적어보았다. 적다보니 기형도의 '엄마 걱정'과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를 따로 적어서 외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처럼

'아무리 수백번 남의 시 베껴 써도/ 내 시 안 써지네'가 되면 곤란하겠지만서두...

 

시를 쓰시겠다?

시를 읽으니 시를 쓰고 싶다?

아하~

 

왜?

뭐가 문제지?

나는 시를 쓰면 안되나?

시 쓰는 데 뭐,

자격 필요해?

허락 필요해?

그럼 뭐?

 

아니 뭐.. 쓰는 건 자유지.

생각은 자유니까.

상상도 그렇고.

근데.. 무슨 시 쓰게?

 

이런 시.

 

눈과 비가 오는 세상.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에,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책을 읽고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서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좋다고

 

인사하는..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감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륵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그리고 또 이런 시,

 

 

 

 

 

 

남들은 다 '나물'이라고 해도

남들은 다 '잡초'라고 해도

나는 틀림없이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꽃이라고

"꽃이야!" 한마디 했더니

남들도 꽃이라고

"꽃이구나." 한마디 하는

이런 시.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떄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내 개인 '공책엔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까지만 

옮겨 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6-22 0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