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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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역시 이웃 서재 

cyrus님 서재에서 리뷰어모집 이벤트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펭귄클래식코리아 카페. http://cafe.naver.com/penguinclassics 

우연일까, 거기 『자기만의 방』이 있었던 건.
운명일까, 그 무시무시한 두께 『시학』 옆에 『자기만의 방』이 있었던 건. 
 

 
[이미지 출처: 펭귄클래식코리아 카페]

이 중에 한 권을 주겠다고 하면 <시학>을 골랐겠지. 
주긴 주되 3주 안에 읽고 리뷰를 써야한다기에 <자기만의 방>을 골랐고. 

따져보니 결국 책을 읽게된 동기는 리뷰를 쓰려고.
리뷰를 쓰면서 뭔가 특별한 나를 느끼고 싶어서.
리뷰를 쓰면서 어떻게든 뭐든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
나 여기 살아있다, 고 소리치고 싶어서. 

 

왜그렇게 리뷰가 쓰고 싶은데? 

리뷰 쓰면 뭐,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뭐한다고 그 짓거리를 하고 있냐? 

공짜 책?
바보.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냐?
공짜. 그거처럼 무서운게 어딨다고.. 

그럼 뭐? 
말했잖아. 리뷰를 쓸 땐 뭔가 특별한 느낌이 생겨.
언제나 그런건 아니지. 나를 끌어들이고 자극하고 뭔가 대답(또는 질문)하게 하는
그런 책이 있어. 내가 알고싶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실은 그게 뭔지도 잘
몰랐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를 짚어주고 풀어주는 책도 그렇고, 그래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책들이 있잖아.  『자기만의 방』같은..    

 

『자기만의 방』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인줄 알았다. 책을 받아 보기 전까지는. 왠지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뭐 어때.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아무도 모르쟎아? 너만 입 다물면 되는거야. 뷁- 

소설이 아니면 뭔데?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1928년 10월 버지니아 울프가 케임브리지에서 '여성과 픽션' 이라는 주제로 했던 두 차례의 강연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3월 울프는 미국 잡지인 《포럼》에 같은 제목으로 에세이를 기고했다. 이 에세이는 강연 주제를 폭넓게 다룬 것으로, 이후에 나온 판본과 비교해 본다면 다소 형식적이고 딱딱한 문체로 쓴 글이었다. (줄임)
『자기만의 방』은 1929년 10월 24일 영국 호가스 출판사와 미국 하코트 브레이스 출판사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줄임) 1945년 9페니의 가격으로 나온 펭귄사의 초판은 판매 부수가 1백만 부에 달했다.
(31~32p.) 

 
   

강연주제가 뭐라고? 

여성과 픽션.  

다행이군. 남성과 픽션이 아니라서. 또는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서.
나의 관심은 픽션.  

   
 

유명한 소설들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소설의 전체 구조는 무한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수많은 판단들로, 제각기 다른 종류의 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구성된 소설이 1, 2년 이상  버틴다는 사실이나, 소설이 러시아나 중국 독자에게만 의미하는 바가 영국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그 구조물들은 종종 무너지는 일 없이 매우 훌륭하게 형체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례에서 그것들을 유지해 주는 것은(나는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완전성이라 부르는 어떤 것입니다.

이런 완전성은 계산서 금액을 지불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훌륭하게 처신하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가에게 완전성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이 사실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설득력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느낍니다. 나는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러나 당신은 정말 그렇다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고 나를 설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읽는 모든 문장, 모든 장면을 빛에 비추어 봅니다. 자연은 매우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소설가의 완전성이나 불완전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내면의 빛을 내려주었습니다.
(126~127p.)

 
   

아하, 소설의 완전성! 
전에는 '작품의 완성도' 라는 들으면 그게 대체 뭘까, 사람들은 대체 뭘 보고
완성도가 있네 없네 그러는 걸까, 궁금했다. 이젠 나도 말할 수 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말할 것이다.
"이 영화는 완성도는 좀 떨어지지만 재밌으니까 봐준다~" 어쩌구 저쩌구~
나에게도 자연이 내려준 '내면의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소설의 완전성과 작가가 맡은 일 

   
 

'실재(reality)' 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매우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먼지 날리는 흙길에서도, 길거리의 신문조각에서도, 햇볕을 쬐고 있는 수선화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방 안에 모여 있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기도 하고, 무심히 어떤 이야기를 기억에 새기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별빛 아래 집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압도하기도 하고, 고요한 세계를 말이 오가는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떠들썩한 피커딜리 거리의 승합 버스에도 존재합니다.

때때로 그것은 너무나 멀리 있어서 우리 눈에는 원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형체 속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재의 손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은 고정되고 영속적이 것이 됩니다. 그것은 일상의 표피를 저편으로 벗어버리고 나서도 남는 것이며,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의 사랑과 증오가 지나간 뒤에도 남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 이제 작가는 이러한 실재를 마주한 채 오래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이들보다 더욱 많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가 맡은 일입니다.

나는 최소한 『리어 왕』이나 『엠마』 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감각에 일종의 신기한 시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시술을 받고 나면 우리는 세상을 더욱 강렬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는 외피를 벗고 더욱 강렬한 삶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비실재적인 것과 싸우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이들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지도 못한 어떤 일 때문에 머리를 맞은 사람들은 불쌍한 이들이지요.

따라서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여려분만의 방을 가지라고 부탁할 때, 나는 여러분에게 실재를 마주한 채 활기 있는 삶을 살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삶을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든 없든 간에 말입니다.
(176~177p.)

 
   

실은 이 부분엔 뭔가 있어보이는데 그게 좀.. 마지막 부분에 '비실재적인 것과
싸우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이들입니다' 라는 말이
이해가 안된다. '부끄러워해야 할'을 '부러워해야 할'로 잘못 쓴 것인가? 아니야.
오타라 해도 이상하쟎아? 비실재적인 것과 싸우며 사는 사람들(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거지? 예를 좀 들어주지..ㅜㅜ)을 안타까워하거나 불쌍해하거나 그런게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이라는 것도 좀.. 

에잇. 아무래도 『리어 왕』이나 『엠마』 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봐야겠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나는 

1. '소설의 완전성' 이라는 말을 이해했고,
2. '자연이 내려준 내면의 빛'을 밝혔고,
3. '작가에게 주어진 기회와 작가가 맡은 일' 의 실마리를 얻었다. 

주제는 '여성'과 '픽션' 두 가지라는데, 내 편한대로 내가 필요한 것만 쏙 빼먹은 
감이 없지 않다. 미안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시대에는 '여성의 글쓰기'가 '실재'였다면,
지금은 누구에게나 '글쓰기'가 '실재' 아닌가! 

아직 그 '실재'라는 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겨두고 리뷰는 여기서,
끝.

 

 

옛말, 어른 말씀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살다보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막 하게될 때가 있지.  

어릴 때 나는 고기를 안 먹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냄새가 싫었을 뿐.
엄마는 내게 고기를 먹이려고 별별 수를 다 쓰셨다. 만두 속에 고기 안넣었다는
거짓말은 기본. 그러나 냄새가 싫어서 안먹은 내가, 고기를 갈아넣어 형태가
안보인다고 해서 모를리가 없다. 한 입 딱 베어무는 순간 냄새로 딱 느끼는걸
어쩌겠나. 엄마 말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게 되는거다. 한번은 정말 냄새
가 안나서 믿고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엄마가 승리자의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러시는거다. "어이구. 소고기는 고기루 안치나보네? 너때문에
내가 만두에 소고기를 다 넣어본다."  

지금은 고기? 없어서 못먹지.
삼겹살은 스무살에 처음, 신입생환영회에서 먹었다. 건축공학과. 대부분 남자.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땐 왜 그리 남자들을 이겨먹고 싶었는지..

선긋기(건축 신입생은 처음에 선 긋기 글씨 쓰기 부터 배운다.)는 물론 모형
만들기도 잘하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술 먹는거, 선배 심부름 하는 거, 심지어
밤새우기, 라면 끓이기 까지도 남자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니
고기 못먹는다는 소리가 나오겠나? 무조건 먹었지. 하긴 처음 마시는 소주가
하도 써서 삼겹살 아니라 삼겹살 할아비라도 먹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 생각해보면 건축, 그거 대학 1,2학년 때 술자리에서 선배들한테 배운게
크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그 숱한 술자리, 밤샘 작업, 설계실 창문
(창문, 이라고 쓰고 창문을 쳐다본다. 눈보라. 눈이 내리기도 하고 내린 눈이
날리기도 한다. 창문. 이라는 말(또는 이미지 또는 개념)이 주는 아련한 느낌
을 극대화 시켜주는 눈보라.) 

건축가는 무조건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녀야한다고 했다. 우리 건축부터 제대로
알아야 된다고도 했다. 전통건축동아리 '민가(民家)'에 들어갔다. 창경궁부터
시작해서 창덕궁, 종묘, 경복궁, 경희궁(터), 덕수궁, 여주 신륵사를 다 갔다.
입학한 해에 여름이 오기 전에.  

동아리 이름이 '민가(民家)'였는데 왜 궁궐부터 다녔냐고? 그러게.. 뭐 그저 선배
들이 가자는대로 쫓아다니기도 바빠서 그런거 따져볼 틈도 없었다는게 답이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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