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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독창성의 근원
결국 이런 이야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 자체의 일관성 부족 때문이다. 작품이 일관성을 지니는 데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엄중한 정직성이다. 그런데도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만약 작가가 자신의 참 모습에 눈을 뜬다면,(142)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분에 대해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면 솔직하고 독창적이면서 독특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143)(생략)
그 동안의 경험을 들어 오늘의 신념이 내일의 신념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확신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길 망설이는 초보 작가가 너무나 흔하다. 이런 초보 작가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궁극적인 지혜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주길 기다리다가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지면 자신은 글을 쓰긴 글렀나 보다고 지레 판단해버린다. 이러한 기다림이 (가끔 그렇듯이) 단지 글쓰기를 막연히 미루는 신경과민성 핑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려움으로 작용할 경우 그는 전력투구하지 않고 건성으로 반쯤 이야기를 쓰다가 거기서 그치고 만다.
이런 작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혼자만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계속 성장할 뿐만 아니라, 글을 쓰려면 우리의 현재 신념의 토대 위에서 글을 써야 한다. 마지못해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쓴다 해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최종 관점에서 동떨어져 있다면 (143) 죽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미완성인, 스무 살 시절 세상에 대해 가졌던 최종 확신과도 거리가 먼 세상에 머물러 있기 십상이다. (144)
자기 자신을 믿으라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폴티(1868~?)는 『서른여섯 가지 극적인 상황(L'art d'inventer les personnages』에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적인 상황은 서른여섯 가지에 이르며, 등장인물을 지금껏 어느 누구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극의 중심에 둔다고 해서 이야기가 흡인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설령 그러한 상황을 찾았다 해도, 자신이 읽은 이야기에서 뭔가 이렇다 할 특생을 찾아내려 애쓰거나 찾지 못해 막막해하는 독자에게 그것을 전달하려면 심금을 울리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어떻게 어려움에 대처하느냐, 그런 막다른 골목에 대해 작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것들이 바로 작가의 이야기를 진정 작가만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야기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가 자신의 개성이다. 그 자체로 진부한 상황은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다만 무신경하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속을 털어놓지 않는 작가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동료 인간이 맞닥뜨린 궁지가 속속들이 묘사될 때 감동을 받는다.(144) 예를 들어 『만인의 길(The Way of All Flesh)』(1903,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소설), 『클레이행어(Clayhanger)』(1910~1918, 영국 작가 아널드 베닛의 3권짜리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1915, 영국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의 소설)는 주제가 서로 비섯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진부한 작품이 있는가?(145)
그대의 분노와 나의 분노
아그네스 뮤어 매켄지(1891~1955, 스코틀랜드 작가)는 『문학의 과정(The Process of Literature)』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사랑과 나의 사랑, 그대의 분노와 나의 분노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이 세상 어느 두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둘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이 말이 그야말로 진실이 아니라면 예술은 토대도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디스 워턴 여사도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최근 호에 기고한 「어느 소설가의 고백(The Confessions of a Novelist)」에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사실 두 가지 기본 원칙이 있을 뿐이다. 첫째, 소설가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든 비유적인 의미로든(대부분의 경우 이둘은 같은 의미다.) 자신의 팔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다루어야 한다.(145) 둘째, 주제의 가치는 작가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또 그 안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 수 있느냐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다."
가끔 위의 인용문을 되새겨보기 바란다. 자신의 글에 최종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통찰력이며, 선하고 맑고 정직한 마음이 있는 곳에선 진부함이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146)
(생략)
주제가 잘 떠오르지 않아 암중모색할 경우 듣기에는 간단할지 몰라도 다음의 충고가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의견을 개진하고 싶을 만큼 생동감 있는 이야기라면 뭐든 써도 상관없다."
어떤 상황이 그 정도로 관심을 끈다면 그 상황은 충분이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이야기의 토대는 이미 마련된 셈이다.(148)
양도할 수 없는 개성
모든 글은 조리법이나 공식처럼 단지 정보 자체의 전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무기로 삼는 논문' 이라고 할 수 있따.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면서 독자가 작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도보록,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이 대목에서는 감동을 받고, 저 상황에서는 슬퍼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마음놓고 실컷 웃도록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설득력을 지닌다.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무릇 지어낸 이야기의 근저에는 작가의 확신이 자리한다.
따라서 작가는 마땅히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문에 대해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은 무엇이며, 글의 소재로 사용하게 될 삶의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질문 사항
여기 스스로를 진단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질문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예로 제시된 질문들을 참고 삼아 머링 떠오르는 다른 의문점들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작업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란다.(149)
- 신을 믿는가? 믿는다면 어떤 측면에서?(영국 소설가 토머스 하디(1840~1928)의 '불멸의 수호신'(『테스』중에서)이라는 측면에서, 아니면 H.G.웰스의 '현현하는 신'이라는 측면에서?)
- 자유 의지를 믿는가, 아니면 결정론자인가?(예술가가 결정론자라는 생각은 너무도 모순이라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 남자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여자? 아니면 어린아이?
-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낭만적인 사랑은 미망이자 올가미라고 생각하는가?
- "백 년이 지나도 모두 똑같을 것이다."라는 말을 심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얄팍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는가?
-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또 가장 큰 불행은?
이런 굵직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소설을 쓸 준비가 아직 안 된 상태다. 글의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 훌륭한 작품은 흔들림 없는 확신에서 나오며, 그리하여 만인의 사랑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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