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절판


TWO 물류
물류의 허브
1.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돼지, 목수, 직조공, 베틀, 우유 짜는 아낙네와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구매 가능한 물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로 물품의 유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깜깜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물류39쪽

우리의 이런 상상의 빈곤과 실제적인 풍요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물류라고 알려진 사업 분야다. '물류logistics'라는 말은 군대 용어로는 병참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로지스티코스logistikos', 즉 군대에서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책임지는 병참 장교라는 말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늘날 이 말은 창고 보관, 재고 조사, 포장, 운송 기술을 전체적으로 일컫는다. 이 산업에서는 꽃꽂이용 꽃이나 채소가 오가는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의 '시원한 회랑',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의 페덱스 허브, 골판지 상자의 개발 등이 최고의 성취로 꼽힌다.

-물류39쪽

2.
영국 중부 에이번 강에서 남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홀든비하우스의 제임스 1세 궁 근처에는 당당한 회색 창고가 25동 모여있다. 순환도로나 공항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산업국가에 공통된 풍경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경꾼에게 자신들이 거기 있는 목적을 설명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자신들을 향한 호기심이나 모욕을 묵묵히 물리친다. 여기 함께 모여 있는 창고들은 유럽에서도 가장 크고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한 물류 단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중부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세 도로 M1, M6, A5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의 물건은 네 시간 안에 영국 국민 80퍼센트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매주, 대개 밤에, 주택 자재, 문구, 식자재, 가구, 컴퓨터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처리된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창고는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지루하게 보이기로 작정한 듯한 부지에 펼쳐져 있다. 경사는 얕고, 나무들은 장식용으로 서 있고, 초자연적인 느낌이 드는 녹색 잔디가 넓게 펼쳐진 부지이다. 건축의 문제나 가능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건물들이다. 오로지 크기가 중요하다.
-물류40쪽

성당처럼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사 대신 최소한의 두께의 무미건조한 강철들이 눈에 띈다. 거기에 길쭉한 형광등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결국 구경꾼의 눈은 줄줄이 대칭으로 늘어선 선반과 서둘러 움직이는 지게차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물류 허브의 삭막한 겉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의 중요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류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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