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제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딸일는지 아들일는지는 아직 모르면서도 두 경우를 다 가정하고 미리부터 이름을 지어 보는 것은 한 아비 되는 이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작품에 있어서도 그렇다. 상想이 정리되기 전부터 떠오르는 것이 표제요 또 표제부터 정하는 것이 광막한 상의 세계에 한 윤곽을 긋는 것이 되기도 한다. 새하얀 원고지 위에 표제를 쓰는 즐거움, 그것은 훌륭한 회화繪畵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고치기는 할지언정 나는 번번이 표제부터 써놓곤 한다. 표제를 정하는 데 별로 표준은 없다. 콩트의 것은 경쾌하게, 신문 소설의 것은 신선하고 화려하고 발음이 좋게 붙이는 것쯤은 표준어라기보다 자연스런 일이요 단편에 있어서는 다만 내용을 솔직하게 대명시키는 데 충실할 뿐이다.
-58쪽
■ 구상
동양 소설에서는 삼국지류의 무용전武勇傳이기 전에는 서양에서처럼 고층 건축과 같은 입체적 설계는 어렵다. 생활 형식이 저들은 동적인데 우리는 정적이요 저들은 입체적인데 우리는 평면적이다. 점잖은 인물이면 저들과 같이 결투를 청하거나 경마나 골프를 하지 않고 정자에 누워 반성하고 낚시질이나 바둑을 둔다. 이렇게 조용한 인물과 생활을 가지고 변화를 부린댔자 작자의 뒤스럭만 보이기가 십상팔구다. 왜 사소설이 많으냐? "이것은 작자들의 무기력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그 자신 역시 약간의 부족이다. 동양화에서 입체감을 찾는 소리나 비슷하다. 구상, 이것은 동양 소설가들이 받는 최대의 고통일 것이다.
(크크크.. 이태준 작가는 아무리봐도 내 스타일이다. 자기합리 천재재능! 그게 정신건강에는 짱 좋다.) -59쪽
■ 인물
내가 만드는 인물이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려니 했다가 몇 번 실패하였다. 얼굴이 생기고 말씨가 나와 버리어 한번 성격이 결정만 되면 천하 없는 작가라도 그 인물에게 끌려 나가든지 그 인물을 잡아 버리든지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것이다. 사건의 발전을 봐서는 꼭 필요한 행동인데 인물이 듣지 않는 경우가 여간 많지 않다. 사건은 완성시키지 못할지언정 인물을 어절 수 없는 것이다. 작자가 예상한 사건을 원만히 행동해 주는 인물,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복안腹案*을 오래 끄는 시간 여유가 제일이라 생각한다.
*복안腹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아직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생각 -59쪽
■ 사상
문예 작품에서는 사상보다는 먼저 감정이다. 사상으로 명문화하기 이전의 사상, 즉 사고를 거친 감정이라야 할 것이다. 흔히 작품의 생경*성은 이미 상식화한 사상을 집어넣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상가의 소설일수록 너무 윤리적이 되고 만다. 그런 작품은 아무리 대가의 것이라도 철학의 삽화 격이어서 문학으로는 귀빈실에 참렬*하지 못할 것이다.
(생경.. 참렬.. 옛말과 지금 말은 정말 많이 다르군.) -60쪽
■ 제재
잡기장이 책상에 하나, 가방에나 포켓에 하나, 서너 개 된다. 전차에서나 길에서나 소설의 한 단어, 한 구절, 한 사건의 일부분이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적어 둔다. 사진도 소설에 나올 만한 풍경이나 인물이면 오려 둔다. 참고뿐 아니라 직접 제재로 쓰이는 수가 많다. 나는 사건보다 인물을 쓰기에 좀더 노력하는데 사진에서 오려진 인물로도 몇 가지 쓴 것이 있다. 제재에 제일 괴로운 것은, 나뿐이 아니겠지만, 가장 기민하게, 가장 힘들여 취급해야 할 것일수록 모두 타산지석으로 내던져야 하는 사정이다.
-60쪽
■ 문장
'내 문장'을 쓰기보다는 될 수만 있으면 '그 작품의 문장'을 써 보고 싶다. 우선은 '그 장면의 문장'부터 써 보려 한다.
-61쪽
■ 퇴고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다. 충분히 퇴고할 시간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시간에만 미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의 문제가 될 것도 물론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으로 책임을 피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마 조선 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가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음.. 한 편으로는 수긍. 다른 한 편으로는 갸우뚱.)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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