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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도 더 전에 과학자들은 생명 세계 전체(꽥꽥거리고, 휙휙 지나다니고, 꽃을 피우고, 덩굴손으로 감아 오르고, 잎을 내고, 털이 복슬복슬하고, 초록이고, 경이로운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려는 과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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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과학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현역 과학자였다. 비 내리는 토요일이면 거실 바닥에서 아버지의 실험용 생쥐와 놀거나, 연방의 지원금을 받아 꾸린 실험실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실험을 할 때면 그 곁에 붙어 재잘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사랑이나 섹스, 멋진 헤어스타일의 힘을 알기도 전에, 나는 다양한 통계 기법(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한 건 카이제곱이었다)의 힘에 빠삭해졌다. 결혼도 과학자와 했고, 친구들도 대부분 과학자이며, 나 역시 과학자가 되었고 지난 20년의 대부분을 《뉴욕 타임스》에 과학자들이 내놓은 신기하고 경이롭고 새로운 발견들에 관한 글을 쓰며 보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쓰던 도중에 과학이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도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보시라.

내막을 들여다보니 생명의 분류와 명명은 오히려 훨씬 민주적인 일이며 심지어 과학의 지배력을 뒤집어엎는 일이고, 과학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며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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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도달하리라 예상했던 곳도 그러기를 원했던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란 게 늘 계획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된 게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일은 여러 겹의 발견들이 우당탕거리며 하나씩 펼쳐진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생명의 분류에 관해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이 수정되거나 폐기되거나 아예 거꾸로 뒤집혔다. 그리고 소중히 품고 있던 예전의 생각들이 밀려난 자리에서 나는 더 좋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생명의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에 질서와 이름을 짓는 사람들(과학자들과 나머지 우리 모두)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고, 그 관점은 내가 상상으로도 그려볼 수 없었을 만큼 훨씬 더 흥미롭고 더 많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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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분류학이 상당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견고한 과학의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본능적인 것, 마치 희망처럼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서 영원히 새로 샘솟는 무엇 같아 보였다.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는 일, 자연의 질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감지하는 일은 오늘날 축소된 형태의 분류학, 즉 추상적인 실험실 과학보다는 훨씬 더 큰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존재함, 살아 있음에 따르는 필수적인 기능이면서, 최소한 삶의 초기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능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치에 맞는 얘기였다. 우리는 정확히 이런 식으로 진화했어야 마땅하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그렇게 미리 장착된 것처럼 판에 박힌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고 체계화하게끔 진화했어야 했다. 생명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한 가지 시각을 갖게 되는 일을 우리가 왜 마다했겠는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동굴에서 살았던 지저분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우리의 조상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과 싸워야 했을 것이며, 무엇에 대처할 채비를 갖추고, 무엇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고, 기억하고, 이름 붙이고, 식별하고, 무엇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아야 했을까? ‘그들이 먹는 것’과 ‘그들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바로 생명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자 대학 시절에 벌들에 빠져 있던 어느 교수님의 동물행동학 수업에서 배웠던 뭔가가 기억났다. 교수님은 생물학자들이 ‘움벨트Umwelt’라 부르는 것에 관해 설명해주었다.6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 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각 종이 지닌 특수한 감각 및 인지 능력에 의해 키워지고, 그 종에게 결핍된 부분에 의해 제한된 결과 그 종이 특유하게 지니게 된 시각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 용어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 개념은 아주 익숙하다.


우리는 개들이 색깔을 볼 수 없어서 색채가 아니라 냄새로 그려진 우주에서 산다는 걸 안다. 멍멍이가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기둥과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 교수님이 애지중지하던 벌들은 다면적인 구조의 눈으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벌들은 꽃에서 꿀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날아갈 수 있다. 꽃에 자외선으로 그려진 띠와 줄 패턴이 벌들을 그 자리로 안내한다. 하지만 움벨트는 개와 벌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심지어 인간에게도 있다. 우리는 그걸 ‘실제’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우리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다. 그런 게 바로 움벨트다. 그리고 거기에 답이 있었다.

인간의 움벨트에는 내내 드러나지 않고 있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들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생물의 체계적 질서를 감지하는 방식, 처음부터 내장돼 있으며 판에 박힌 그 방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바로 움벨트(우리가 공통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라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전에는 분류학과 관련지어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아주 많은 것의 원인이 움벨트임이 분명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디서나 움벨트가 우리에게 질서를 보게 하고, 또한 그 질서에 근거해 행동하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인간을 포함해) 한 종 안에서도 또 질서를 매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분류하고, 그들이 우리의 자연 질서 안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그러니까 흑인인지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등을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의료를 처방하고, 적합한 화장실을 고르며, 장학금과 기회를, 심지어 사랑을 나눠주는 데까지 그 분류법을 활용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우리의 움벨트라는 렌즈를 통해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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