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잡지나 신문에서 어떤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사실 두 명의 작가를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할 말이 있는 사람과 그 할 말을 적절하게 써내는 사람.

(중략)

디디온은 표현의 자연스러움과 자기가 하는 일을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제어력을 추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엿보이는 형언할 수 없는 것들과 섬뜩함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어떻게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쓰는 행위, 작가가 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_힐튼 앨스(Hilton Als)

2020년 7월

「앨리시아와 대안 언론」


(41p.) 요즘 신문을 읽다 보면, 나는 AP통신의 전화선일 확률이 아주 높은 끈 같은 것에 목을 졸려서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이 끊긴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 식으로 숨통을 막지 않는 몇 안 되는 예외는《월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의《프리 프레스(Free Press)》와《오픈 시티(Open City)》, 그리고《이스트 빌리지 아더(East Village Other》뿐이다. 내가 재미있는 괴짜라든가, 괴팍하고, 엉뚱하고, 뭐랄까 취향이 근사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에게 벌어지고 있는 매우 심각하고 독특한 현상, 즉 누구도 다른 사람과 직접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현상, 미국 신문들이 독자들에게 '가닿도록'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현상에 관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내가 거기에 실린 글의 내용에 거의 관심 없는 것은 논외로 하고)과 '대안' 매체에 실린 글들의 공통점은 독자들과 직접 의사소통한다는 점이다.  

(42p.)《프리 프레스》,《이스트 빌리지 아더》,《버클리 바브(Berkeley Barb)》 등을 비롯한 타블로이드 형식의 신문을 발행하는 언론사들은 젊은이와 소외 계층의 관심과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곳들로, 상당히 작위적인 '객관성'을 코에 걸고 젠체하는 기성 언론들의 가식을 찾아볼 수 없다는 큰 장점이 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도 객관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하지만 글쓴이가 가진 편향성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모든 편향에서 자유로운 척하며 쓴 글에는 대안 매체에 아직 전염되지 않은 가식과 허위가 가득할 수밖에 없고, 《월스트리트 저널》 등에는 발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대안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그렇다고 밝힌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같은 요소를 무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의견부터 분명히 밝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안으로 불리는 신문들이 딱히 은밀한 지하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뉴욕의 34번가 남쪽에는 《이스트 빌리지 아더》가 발에 밟힐 정도로 널렸고, 로스앤젤레스의 회계사들은 선셋 스트립에 점심 먹으로 가는 길에 일상적으로 《프리 프레스》를 집어 들곤 할 정도가 아닌가. 사람들은 흔이 이런 신문들이 전문적이지 못하고(사실 그렇다), 되잖게 우습고(사실 그렇다), 따분하고(사실 그렇지 않다), 실제 정보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느다고 불평한다. 실제로 대안 신문들에 담긴 정보량은 극도로 적다. 평화 행진 소식, 로큰롤 그룹이 착취 세력에 합류한 소식(가령, 어느 그룹이 레코드를 발매했다거나 주류 무대 공연 계약을 맺었다거나, 하는 배신의 소식), 멕시칸 낙태를 시도하다 하혈이 너무 심해져 응급실에 가서, 초진하는 인턴이 꼬치꾀치 캐물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패트리샤 매기니스의 조언["패트리샤와 로위나 거너 두 사라람, 혹은 둘 중 하나가 임신 중절을 도왔다고 마음 놓고 말하세요. 다른 사람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마세요. 우리는 체포당하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열다섯 살 난 마약 거래상의 반성("마약을 거래하려면, 정말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과속 운전은 살인 행위라는 훈계 등으로 지면이 채워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하자면, 오늘자 《프리 프레스》 내용은 다음 주나 다다음 주 《프리 프레스》에 실리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약물 사용자들, 혹은 게릴라 혁명 운동가들 내부에 생기고 있는 분열 소식을 건성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로스앤젤레스 프리 프레스》, 《이스트 비리지 아더》, 《버클리 바브》, 《피프스 에스테이트》,《워싱턴 프리 프레스》가 모두 비슷비슷해 보일 것이다.

 

(44p.) 나는 대안 신문에서 내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팩트'를 발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팩트'를 알기 위해 이런 신문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이 신문들의 특출난 점은 바로 독자들에게 직선적으로 의사 표현하면서 말을 건다는 점이다. 그들은 독자들을 무엇인가 걱정하거나 마음이 상한 친구로 가정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공통의 윤리관을 가진, 말이 통하는 독자들을 상대로 한다는 추정 덕분에 이런 신문에 실리는 글은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 


(45p.) 최근《프리 프레스》에는 '앨리시아'라는 이름의 독자가 앤아버시(*미시간대학교가 있는 미국의 대학 도시이다)를 분석한 글이 실렸다. 글쓴이는 이 도시의 성격을 세 줄로 요약해서 하이쿠를 방불케 하는 간결 명료함을 과시했다. '교수들과 교수 부인들은 비트 세대 출신들(버클리, 57년 졸업생들)로 평화 행진에 참여하고 우탄트(U Thant)에게 수선화를 선물하는 사람들이다. 일부 아이들은 아직도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와 칼릴 지브란(Kahllil Gibran)을 신봉한다. 그 아이들의 부모 중 일부는 아직도 킨제이 보고서를 믿는다.'

  이 신문들은 기존 신문의 관습을 무시하고, 하고자 하는 말을 직설적으로 해버린다. 단호하고 자신만만하지만,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 글들이 범하는 실수는 친구로서 할 만한 실례이지, 모놀리스(Monolith)로서의 우(訧)는 아니다. [물론 모놀리스는 대안 언론에서 가장 선호하는 단어이며, 몇 안 되는 세 개의 음절로 된 단어 중 하나이다.] 


(46p.) 대안 신문에 기고된 글의 시각은 아무리 둔한 독자라도 놓치기가 힘들다. 기성 매체의 훌륭한 신문들은 입에 올리지 않지만, 그 배후에 매우 강한 태도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런 시각을 절대 언급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습지 식물이 썩을 때 내뿜는 부식 가스 같은 것이 독자와 신문지를 자욱하게 감싸곤 한다. 《뉴욕 타임스》를 읽고 있자면, 내 안에서 불쾌한 소작민의 공격 본능이 깨어나고, 영화 〈카루셀(Carousel)〉에서 가난한 주인공의 맨발의 딸이 되어 스노가의 아이들이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하워드 러스크(Haward Rusk) 박사 같은 당대의 지성인들과 주일 만찬을 하기 위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47p.) 풍요의 뿔이 넘쳐나고, 황금 십자가가 번쩍인다. 회전목마 호객 담당인 딸은 무정부 상태를 꿈꾸면서 스노가의 아이들이 어젯밤은 어두웠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뉴욕 타임스》나《로스앤젤레스 타임스》보다 낮은 수준의 신문들은 보도되는 뉴스를 신뢰하고 말고를 논하기 전에 뉴스가 전달되는지 여부 자체가 문제다. 이런 신문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보도할 때면, 송신되어 들어오는 텔레타이프를 손에 넣은 원숭이가 여기저기 아무 구절이나 넣고, 보도 자료를 조금 삽입해 놓은 듯한 글을 읽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여름, 나는 한 신문사에서 일했다. 날마다 제일 중요한 일은 경쟁사의 기사를 자르고 재조합해서 새 기사를 써내는 일이었다.("우리를 교란하기 위해 심어놓은 기사인지 확인해." 일하기 시작한 첫날 내가 들은 조언이다.) 게다가 그런 종류의 작업은 지역 전체에 걸쳐 매우 활발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카운티 감독관들, 빈민가를 밀고 하워드 존슨 호텔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 노스 에어리어 부동산업자들을 칭송하다', '자선 사업에 열심인 상류층 여성들, 최근 구입한 말기 암 치요용 의료기를 둘러 보다', '디어 애비', '마음의 거울' 등등. 


(48p.) 혀가 입 밖으로 축 처지게 나올 정도로 졸음이 오고, 현실은 저만치 멀어진다. 35면에는 '세미너리? 세미터리? 사전이 절실한 초등학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파두카, 켄터키(연합통신) 주일학교 선생님인 케이 파울러가 세미너리(Seminary, 신학교)가 무엇인지 몯자 한 소년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을 묻는 곳(세미터리, Cemetery)이에요.' 그런 기사가 35면에 실린 신문이라면, 1면에 실린 기사도 믿을 수 없다. 

  낮은 수준의 언론이 원숭이 손에 있다면, 높은 수준의 언론은 암호가 장악하고 있다. '잘 알고 있다', 혹은 '소식에 정통하다'라고 간주되려면, '진짜 스토리', 즉 신문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통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 미국 언론에 팽배한 통념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신문들이 공식적 윤리를 반영하고, '책임감 있게' 일해주기를 기대하게 됐다.


(49p.) 존경받는 신문기자는 더는 적이 아니라 비밀을 털어놓는 친구이자 참여자다.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통령 고문 역할을 하고,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 헨리 포드(Henry Ford)와 식사하고, 르 클럽에서 헨리 포드의 딸과 춤을 추는 생활이다. 그런 다음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암호로 가득한 기사를 쓴다. 앨리시아는 책임감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앨리시아는 르 클럽 같은 곳에 절대 가지 않는다. 앨리시아는 아마 앤아버를 벗어난 세상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녀는 앤아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말해준다.

 


책임감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앨리시아를 본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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