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모욕의 의미

모욕에 대한 논의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쟁점 주위를 맴도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모욕이 본질적으로 (분노나 경멸 같은) 감정을 표현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욕이 공적인 관심사에서 주변화되는 이유도 그래서인데,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주관적인 표현은 객관적인 사물의 상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누가 나를 돼지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정말 돼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응수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모욕을 이처럼 감정의 표현 내지는 잘못된 재현으로 이해할 때, 말과 몸짓이 지니는 수행적 차원은 간과되고 만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 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따돌림받는 아이들이 숱하게 겪는 일이다). - P107

[인격에 대한 의례]

현대 사회이론에 대한 고프먼의 주된 공헌은 사회구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따르는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상호작용 질서를 발견한 데 있다. (주: 고프먼은 상호작용의 질서를 다른 사회질서들과 연관시키지 않고 별도로 다룰 수 있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보았다.[Erving Goffman, "The Interaction Order,"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48) - P111

개인은 (사회화를 거쳐서) 일단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다. - P116

사회적인 타자화가 유아화infantilizationㅡ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쓸 수 있다면ㅡ를 동반하는 예는 많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생활보호 대상자도 곧잘 나이를 무시당하고 아이처럼 취급된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이‘의 위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 강등되었다는 공포감을 경험한다. 아이의 이미지는 여기서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더 쉽게 침범될 수 있음을 표시한다. 그들은 더 작은 명예를 지니며, 더 쉽게 모욕당하고, 그러면서 그 모욕의 무게를 평가절하당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 ‘모자라는‘ 사람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남들보다 작고 희미하다.

온전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민은 여성, 외국인, 장애인, 총체적 시설의 재소자 등등과 비슷하다. 그들은 상호작용의 장 안에 양반, 남자, 국민, 정상인, 일반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의례 교환에 있어서 불평등을 경험한다. - P141

우리는 신분 차별을 장소/자리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개념은 인정투쟁이나 타자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P142

[사회의 발견]

신분 질서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피라미드 그림을 떠올린다. 꼭대기에는 왕과 귀족이 있고 바닥에는 노예와 농노가 있는, 3층이나 4층으로 된 피라미드 말이다.

- P142

그런데 ‘사회의 밑바닥‘이라는 말과 ‘사회의 가장자리‘라는 말에서 ‘사회‘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게 아니다.

우리는 사회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사회를 구조들(또는 구조화하는 실천들)의 총체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때 ‘사회‘ 안에는 정치•경제•문화•법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사회의 경계는 국민국가의 경계와 사실상 일치한다. 정치•경제•문화•법 등이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것은 국민국가 내부에서이기 때문이다. 구조기능주의와 마르크시즘은 둘 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마르크시즘의 전통은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를 분석의 구체적인 단위로 삼으면서 그 경계를 무의식적으로 국민국가의 경계와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코뮤니타스에 대한 터너의 논의나 상호작용 질서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모두 사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함축한다. 두 논자는 구조기능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구조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층위에 관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 P143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사회이론의 중심 질문은 사회의 기능과 변동ㅡ마르크시즘 용어로는 재생산과 이행ㅡ이다. 사회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지녔다고 믿는 다수의 주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그 주체들이 출생과 죽음에 의해 끊임없이 교체되고 있는데도, 사회의 형태가 유지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 P144

한편, 사회를 상상적 공동체로 볼 때 사회이론의 핵심에 떠오르는 것은 성원권의 문제이다. 사회가 상상적 공동체라면 그 경계는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 사회에서의 성원권 역시 불확정적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P144

[굴욕에 대하여]

앞에서 나는 근대화에 뒤따른 공적 공간의 재편성을 상호작용 질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근대화를 그때까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완전한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지나치게 역사주의적이며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근대화는 모욕ㅡ우리는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 모욕, 위반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규약의 위반에 대해 말하고 있다ㅡ를 없애지 못했으며, 다만 그것을 더 넓고 눈에 띄지 않는 싸움터로 옮겼을 뿐이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에 기초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 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 P158

미디어는 날마다 천국을 보여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가르친다. 완벽한 비주얼, 유창한 영어 발음, 그리고 ‘예능감‘은 청빈, 겸손, 근면이라는 고전적 덕목들을 대신하여 구원을 약속하는 최신의 덕목들이다. 하지만 소비주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캘빈주의가 그랬듯이, 항상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할 뿐 누구의 죄도 결정적으로 사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ㅡ‘노바디‘건 ‘썸바디‘건ㅡ 끊임없는 굴욕과 강등의 위협에 시달린다. - P159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있다. 굴욕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예인의 ‘굴욕 사진‘을 퍼나르면서 네티즌들은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예인이 ‘자기 관리를 못 해서‘ 굴욕 당한다고 생각한다.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 P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 P160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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