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항목들을 ‘전통 사회‘에 오른쪽의 항목들을 ‘현대 사회‘에 귀속시킨다면, 우리는 이것을 현대화가 개인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의 대차대조표로 읽을 수 있다. 버거는 우리가 명예의 세계를 떠나 존엄의 세계로 옮겨왔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일견 바람직해 보인다. 명예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지만, 존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존엄의 관념은 위계를 부정하고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평등은 벌거벗은 인간들의 평등, 역할의 갑옷을 벗고 사적인 공간으로 물러난 고독한 개인들의 평등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좌표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도표가 현실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의 대립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하도록 하자. 규범과 자유의 대립은 현대인이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규범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인간과 벌거벗은 인간의 대립은 현대인이 옷을 입은 자기 즉 남들에게 보여지는공적인 자기를 진짜 자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P96

어째서 현대인은 규범을 지키면서도 규범에 거리를 느끼는가? 어째서 그는 벌거벗은 상태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그의 영혼이 깊은 곳에서 세계와 불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도표는 현대성의 핵심에 세계와 자아의 불화가 있음을 나타낸다.

현대인은 일종의 자기 분열로써 이 불화에 대처한다. - P97

결국 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매킨타이어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는 이 개념에 의지하여 역할과 자아를 분리하는 사르트르의 관점과, 자아를 역할들 속으로 해체하는 고프먼의 관점을 모두 넘어서려고 한다. 사르트르는 덕이 있는 삶의 본보기들을 모두 ‘인습적‘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에게 있어 진실한 것은 인습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아의 태도뿐이다. 사르트르적인 자아에게 평판이나 명예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고프먼은 그와 반대로 체면을 유지하는 데 과도하게 몰두하며 그 이상의 어떤 가치도 추구하지 않는 자아를 그린다. - P99

"명예의 세계에서 존엄의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버거의 명제는 현대적 인간상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부각시킨다는 장점을 지닌다. 인권의 주체인 인간은 아무런 구체적 내용도 갖지 않는, 비어 있는 범주이다. 그는 역사도 전통도 미덕의 관념도 알지 못하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인권이 인류의 모든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명예와 존엄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옷을 입은 인간‘에 그리고 후자를 ‘벌거벗은 인간‘에 귀속시킴으로써, 버거는 존엄 역시 문화적인 관념이며, 사회적인 의례를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 벌거벗은 인간 역시 무언가를 입고 있으며, 그의 존엄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버거가 제시하는 이행의 도식ㅡ한쪽에는 명예와 역할 자아, 그리고 규범과 위치 감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존엄, 역할에서 벗어난 자아, 자유, 좌표 상실이 있는ㅡ을 다시 살펴보자. 이 이분법의 문제점은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는 구조, 즉 역할들의 체계와 동일시되며, 역할의 옷을 벗는 것은 사회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개인은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사회 바깥으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이 모델은 행위자에게 순응주의냐 내면으로의 침잠이냐라는 양자택일만을 남긴다.

규범 또는 가치 체계가 구조의 산물이자 구조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 여겨지는 한, 구조에 대한 저항은 모든 규범의 거부로 귀결될 것이다(매킨타이어가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도덕적 진공상태이다). - P102

하지만 사회는 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역할의 수행이나 구조의 재생산과 무관한, 순수한 상호작용의 층위를 발견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는 것이나 낯선 장소에서 길을 묻는 것같이,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채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그러한 예이다. - P102

그런데 역할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질서ㅡ의례적 질서ㅡ 속에 있다. 그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표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을 보여주면서, 타인의 몸을 둘러싼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길을 묻는 사람은 타인에게 다가갈 때와 헤어질 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한다. 지위와 역할이 다른 개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사회 공간 안에 현상하는 것은 이러한 의례들에 힘입어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의례적인 실천들의 바탕에 있는 규범을 단순히 "진정한 자아"와 대립하는, 외적이고 강제적인 힘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들은 그 규범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다.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상호작용과 그것을 조율하는 규범의 존재야말로 버거가 "존엄의 세계"라고 명명했던 현대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 P103

그러므로 명예와 존엄의 대립은 재고되어야 한다. 버거는 명예는 표현적 질서에 속하지만 존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모욕은 (존엄이 아닌) 명예에 대한 공격으로만 이해된다. 존엄이 표현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면, 표현을 통해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엄을 이처럼 초월적인 장소로 옮겨놓을 때, 명예의 쇠퇴라는 가설은 모욕이 사회적 삶의 주변부로 추방되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모욕은 여전히 중요한 공식 의제이다. 사회운동의 역사를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민권운동에서 게이-레즈비언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체성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배타적 민족주의운동나 파시즘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 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 P103

모욕을 명예의 훼손으로 정의할 때, 이런 문제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명예훼손은 주로 평판이나 위신 등의 손상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협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법적으로 모욕 또는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행위의 ‘공정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 그 행위를 보거나 들은 제삼자가 있어야 한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욕설을 한 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사회학 연구에서 모욕이라는 키워드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회학은 모욕을 개념이 아니라 현상으로만, 즉 인종차별이나 성폭력의 장면들을 구성하는 요소로만 다룬다.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념이 그것을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욕을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면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이러한 접근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매킨타이어는 고프먼이 모욕을 공적 갈등의 영역에서 사적 감정의 영역으로 추방하였다고 비판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의례적 성격을 강조하는 고프먼의 시각은 오히려 모욕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 장에서 나는 고프먼의 통찰에 기대어, 모욕이 언어라면 이 언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다. - P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