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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대전환 -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ㅣ 역사의 시그니처 4
김혜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네이버 카페 컬처블룸의 지원으로
개인적 의견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식이라 함은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여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맞게 되는 다양한 환경으로부터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 인출하는 일련의 과정으로의 지각, 기억, 상상, 개념, 판단과 추리를 포함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앎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일까 궁금해 진다.
250년 전의 칸트가 했다는 '우리가 정말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앎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변화를 획책하는 인간의 앎이 어떤 변화를 야기할지를 묻는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된다.
칸트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과 같이 매우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보통의 나, 우리가 일상적인 독서로의 대상으로 하기에 버거운 존재감을 자랑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독서인의 지적 수준 향상과 의식의 확장과 인식의 대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면 그들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칸트를 생각하며 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을 만나 읽어본다.
이 책 "인식의 대전환" 은 철학가라는 존재를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는 존재로 판단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부르거나 지칭하는 혁신가 쯤으로 지칭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철학자들 가운데 무게감이 막역한 칸트에 대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문단들을 발췌해 철학적 사유를 맛봄과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적 의미를 곱씹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성이라는 존재, 그 실체에 대해 우리는 형이상학적 존재감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이성이 우리의 안다는 것과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안다는 것의 본질에 대한 이성의 역할은 형이상학적 존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칸트의 주장인 '나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에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 의식과 능동적 판단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 진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방식은 철학사의 흔치 않은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사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것이 철학사적 인간의 사유 방식은 진리가 인간 바깥의 신, 자연, 혹은 대상 자체에 있고 인간은 그것을 추구해 나간다는 일반화적 상식을 뒤집은데 있기에 새로운 철학적 사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담은 '이전 형이상학에 종언을 고하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보고 있는가 하면 앎의 한계, 이성의 운명적 관계를, 더 깊이 들어가면 자아와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물음, 철학적 사유에 대해 심도 깊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여정을 제공한다.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에서 외부로의 인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주창한 것은 완전한 독립적 존재로의 나, 우리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인 대상화된 객체들에 대해 인식하는 일은 우리의 이성이 이미 우리의 머리속에 갖고 있는 틀의 발현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이자 앎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식을 얻는 일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생각할 수 있을것 같다.
인간은 보고 듣는것에 의해 많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칸트의 이러한 주장이라면 이미 내면에 형성된 이성과 틀에 의해 앎에 대한 인식이 이뤄진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된다 판단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와 부합하는 철학적 사유를 칸트의 주장에서 느껴볼 수 있지만 그마저도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생각 자체를 인식의 존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 닿게 된다.
칸트의 이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오늘 우리 사회, 우리의 삶에 대입해 보며 어떻게 접근하고 대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판단해 보며 독자들의 다독을 권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