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talian Executioners: The Genocide of the Jews of Italy (Hardcover)
Simon Levis Sullam / Princeton Univ Pr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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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출판사에서 나온 이탈리아 실행자 읽었다. 공식적으로는 200페이지라 되어있으나 조금 큰 폰트에 각주빼면 130페이지 남짓이다. 역사적 풍경을 서술하기에 가볍고 빠르게 읽기 좋다.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1943-45년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이탈리아의 동조자가 왜 이탈리아사에서 잊혀졌는지를 다룬 내용이다.


저자는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국립대에서 현대사 담당으로 있는 시몬 레비스 술람. 핵심은 전후 정권의 필요에 의해 배신, 밀고, 체포, 서류 작성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이들이 강제적으로 국가의 공적 기억에서 제거되었다는 고갱이다.


전후 경제 부흥기와 냉전시기 이탈리아는 민족국가 정체성을 위해 기억을 선택적 재구성하고 패배한 독일의 폭력성과 대척점에서 선량한 이탈리아인이는 픽션적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인 스스로가 과거의 악행과 연결짓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그 결과 실제로 존재했던 가해자들이 역사 담론에서 소외되었다. 따라서 공식 역사에서 유대인 학살 동조자들은 사회적 편익, 정치적 절충, 사법적 회피의 삼중주 때문에 사라졌고 저자는 이들을 실행자라고 명명하며 역사의 무덤에서 호출한다.


사회적 편익과 정치적 걸충과 사법적 회피의 삼중주. 즉, 선량한 민족으로 간주하는 것이 국가 재건에 유리했고, 전후 엄혹한 냉전 구도에서 파시스트 잔재를 제거하는 데 인색했으며, 따라서 파시스트 실행자에 대한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침묵하는 학살 피해자가 아니라 어찌되었든 살아남은 생존자 증언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 서술의 선택적 강조에 대한 숙고를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저자는 실행자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유대인 아이에게 총을 쏜 이가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데 가담한 모든 이로 정의를 하는데 이런 정의를 내리는 이유는 그간 이탈리아사에서 저항자와 구조자 쪽이 강조되면서 실행자들은 주변화됐기 때문에 후자를 쟁점화하기 위함이다.


전쟁과 폭력의 기억이 어떻게 공식적인 역사가 되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특정 국가의 동조자 문제를 기억의 정치학, 역사의 윤리학이라는 보편적 이슈로 승화시키니, 동아시아 근현대사도 이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게끔한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저자의 주장인 그간 축적된 영미권, 유럽권 선행연구에 비판을 가하는 부분을 이해해야 책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는 비교적 유대인을 보호했다는 상식이 있다. 또, 이탈리아인은 원래 착하고 관용적이라 독일처럼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다, 즉 Italiani brava gente라는 이미지가 퍼졌다. 이 이야기에 균열을 가해 브레시아(특히 마지막 장)의 문서사료와 증언을 통해 수천 명의 체포와 배신이 평범한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드러냈다.


미시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행자들은 이념적 반유대주의, 관료주의적 복종, 기회주의적 이익추구, 경쟁, 개인적 적대감, 복수 같은 다양한 동기에 의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이러한 관점이 주는 시사점은 학살이 구조적이고 기계적인 면모도 있지만 사람들의 복잡한 선택과 상황들이 얽힌 결과(어쩔 수가 없다!)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다시 기억과 망각의 정치적 역학에 얽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다른 서사를 선택한다.


또한 2차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추축국으로 같은 편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독일이 대표적으로 패배하고 전쟁중 이탈리아는 독일에 동조했으나 빨리 연합국편에 붙음으로써 이미지 쇄신에 성공했다. 좋은 이탈리아인 vs 나쁜 독일인이라는 구도는, 사실 이 둘이 전쟁 중에 같은 편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책임회피(물타기)를 위해 만들어진 선악 이분법이다. 파시스트 정권을 너무 부각하면 새로운 공화국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다. 마치 맥아더 정권이 친일파 인사를 그대로 기용해 안정적 정권운용을 꾀한 것처럼, 전시 범죄를 저질렀던 수많은 파시스트 인사들이 1946년 특별 사면에 의해 처벌 없이 풀려났다.


패배한 독일의 폭력성과 비교해 자국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편이 편한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유대인 박해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사회적 비난이나 본인들의 사과도 없었다. 이런 전후 사법 처리와 사회적 무죄화는 다른 국가에서도 있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 공동체의 반응이다. 피해를 받은 유대인 서클 내부도 구조와 보호 사례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전후 유대인 생존자의 입장에서 누가 나를 살려줬는가, 라는 질문이 우선적이었다. 즉, 왜 죽지 않았던거지 다행이다, 라는 말이 먼저였지, 누가 나를 배신했는가를 캐묻는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존을 가능케한 실질적 면모는 다양했다. 이웃이 숨어 있게 해주었거나, 가짜 서류를 만들어주었거나, 경찰이 눈을 감아주었거나, 성직자나 일반 시민이 대피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생존자의 기억은 구조되었다는 언명에 붙잡힌다.


생존자 입장에서 구조의 서사는 중요하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 모든 이탈리아인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말들이 삶을 단단히 붙잡는 앵커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매일같이 얼굴 보고 살아가는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밀고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의지해야하는 행정시스템과 공권력이 바로 나를 체포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순간 이 공동체에서 살아나갈 심리적 기반이 무너져버린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혹은 그랬을 수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면 유대인으로서 다행히도 생존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인으로서 다행히 생존했다는 사실은 밀접히 연관된 종이 한 장 차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생존서사는 이탈리아 유대인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유대인과 상황이 달랐다. 베니스의 상인때부터 언급된 이탈리아 유대인은 이미 수백 년간 이탈리아 사회의 일부였다. 동유럽 유대인처럼 이디시어를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쓰며 문화, 교육, 군복무, 시민권 등등 모두 동일하게 누렸다. 종교만 다를 뿐 외부자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을 넘긴 사람은 이웃이었다. 그러니 전쟁의 혼란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할 때 밀고자가 지인이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독일이, 파시즘이, 일부 예외적 인간들이 했다고 가해를 외부화하는 서사가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편리주의적 낙인을 직면하자고 요청하면서 20세기에 여러 유럽 국가에서 자국의 콜라보레이터에 대해 스스로 물어봤던 기억과 청산의 과정을 이탈리아는 부분적으로 건너뛰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책의 단점은 이러한 수정주의 서사를 취하는 대부분의 역사서술과 궤를 같이한다. 다층적인 접근, 입체적인 해석,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미시적 이야기를 공적 테이블에 올려놓는 모든 접근은 사료의 대표성 이슈를 벗어날 수 없다. 왕조사나 정치사 같은 굵직한 서사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사료를 취해 네러티브에 엮겠다면 얼마나 다양해야하는가? 대표적으로 꼽은 사례가 과연 대표성이 있는가? 이미 모집단에서 부분집합이 아닌가? 일부를 통해 전체를 말하겠다면서 특수에 함몰된 것은 아닌가?


예컨대 피렌체, 브레시아 등 북부사례에 집중한 나머지 Salò 공화국, 남부 저항 등은 약하게 다루었다. 내부 공모자만 다루었지 파시스트 내부 갈등과 암약, 연합군과 왕당파, 파르티잔 등 다층적 전후 상황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전체 2차 세계대전 경험의 다양성 일부만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맥락적 편향이 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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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슈레더 감독의 미시마 그의 인생 보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평생 고민하며 형식미를 추구해 온 그의 일대기를 감각적인 무대 연출과 장엄한 음악으로 몰입감을 높여 빚은 훌륭한 시네마토그래피다. 예술지상주의적 삶과 아티스틱한 영화의 미감이 정합적이다. 엔딩의 일출은 그 이전의 4개의 장에서 미시마의 인생을 모두 종합한다.


국가별로 진입이 다소 어려운 특유의 감성이 있다. 예컨대 한국의 한, 프랑스의 자유분방함, 러시아의 구원이 없는 죽음, 일본의 헛되고 쓸쓸한 와비사비 감성 같은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미학을 순수하게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서구권에서 여전히 찬사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극우민족주의적 태도가 공분을 사고 일각에서는 반발심을 일으키는 듯하다. 작가의 인생관과 정치적 입장도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태도다. 별개로 미학적 입장은 음미해볼 부분이 있다.


감독은 영어로 각본을 썼고 배우는 일본어로 연기했다 

그러나보니 문화적 의미손실이 일어난다. 들리는 일본어 음성과 영어 자막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어떤 부분은 아예 도착어인 영어에 맞게 앞뒤를 잘라버린 부분도 있다. 각본을 우선적으로 영어로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풍부한 2차 창작이 들어갔다고 본다. 일본어는 대표적인 고맥락 언어다. 생략하는 표현도 많고 해석에 사회문화적 이해가 깊이 들어가야한다. 기계적으로 번역해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전달방식도 신경써서 특유의 태도, 악센트와 함께 발성해야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흥미롭다. 맨 처음에 전화로 여집사가


마님께서 학교에 (奥さんが学校に)라고 하는데 이미 일본어 자체에서 뒷 부분의 (아이를 데리고 가셨다) 다 끊어먹었다. 영어 자막에서는

당신의 아내가 이미 그들을 학교로 데려갔다(Your wife's already taken them to school)라고 했다. Your wife에는 오쿠상(안주인, 마님)이라는 표현에 들어간 화자의 청자에 대한 위계관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또, 혈서를 쓰는 장면에서 미시마는 손가락 끝에 피를 내는데 지켜보는 대원에게 아파보이나?(이타소오까, 痛そうか)라고 한다. 영어로는 아프지 않아(It doesn't hurt)라고 한다. 어느 한 언어에서 직역하면 절대 말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런 식으로 겸양적으로 설의법으로 물어야하고 (아파보이나? 사실 안 아파), 영어에서는 사실 그대로 아프지 않다라고 해야지 Does it look painful to see? 같은 말로 하면 매우 어색하다.


옛 공계귀족 출신인듯한 할머니가 요즘 젊은애들을 한탄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귀족어법이 나오는데 영어로는 애초에 뉘앙스를 살릴 수 없다.


또, 음성으로는 스님, 중을 의미하는 보-즈(坊主-한자로 읽으면 방주)가 들리고 자막에서는 조수나 카톨릭의 복사를 의미하는 애콜라이트(acolyte)가 뜬다. 그리스도교의 시종을 의미하는 애콜라이트는 이정재 배우가 참여한 스타워즈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젠 마스터와 그 제자 관계에서 '제자'정도의 의미다. 기독교 제자인데 불교 제자로 종교문화적인 쓰임새가 바뀌었다. 그런 단어는 또 장로가 있다. 원래 노장 사상에서 유래한 도교 용어인데 이제 개신교의 직급 높은 일반신자로 바뀌었다. (고 한형조 교수의 책에서 읽었다)


마지막 자위대 앞의 일장연설 첫 대사도 흥미로웠다.

일본어로는 이렇게 들렸다.

自衛隊の諸君。

このような時代で、諸君と対面するのは、実に残念なことである。

俺は、悲しみと憤りをもって、ここに来た。

今の日本で、ただ自衛隊だけが、日本の魂を持っていると、俺は信じていた。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다.

자위대 제군. 이와 같은 시대에 여러분과 마주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슬픔과 분노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

지금의 일본에서 오직 자위대만이 일본의 혼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어왔다.


그런데 자막에서는 이렇다.

Dear soldiers! 

It's a terrible affair to have to speak to army men in circumstances like these.

I thought that the army was the last hope of Japan,

the last stronghold of the Japanese soul.


친애하는 장병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군인 여러분께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끔찍한 일이다)

저는 군대가 일본의 마지막 희망이자

일본인의 정신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성과 자막이 어떻게 다르냐?


일단, "나는 슬픔과 분노(이키도오리)를 안고 이 자리에 왔다."라는 표현이 아예 빠졌다.

자위대의 제군과 soldiers는 소속에서 차이가 있고

끔찍한 일(terrible affair)과 안타깝다(잔넨..)은 다른 말이며

대면하다와 have to speak to는 다르게 들리고

소울보다 혼(타마시이)이 더 입체적인 문화적 뉘앙스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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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캠핑장 - 반달이 뜨면 열리는,제13회 비룡소 문학상 수상작 난 책읽기가 좋아
정주영 지음, 김현민 그림 / 비룡소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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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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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전치사는 직역하기 보다 우리말로 옮길 때 술어로 바꾸면 적절하다.

국중박 로버트리먼전에 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유명한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는 영어로 two young girls at the piano다. at을 '~에서'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치는(playing)'이라고 용언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를 붙여주여야 우리말에서 자연스럽다.

같은 영어전치사지만 문맥에 맞게 다르게 바꿀 때도 있다. 쥘 뒤프레의 소 떼가 "있는(with)" 리무쟁의 풍경(Landscape with Cattle at Limousin)이고 폴 시냐크의 주전자를 "그린(with)" 정물(Still Life with Jug)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한 단어에 다층적 뉘앙스가 있고 번역가는 문맥의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적절한 단어 하나를 그물로 잡아 건져낸다.

간단하 글자지만 우리말로 풍성하게 풀어야할 때도 있다.

알베르 마르케의 식민지에 파견된(of) 연대 부사관(Sergeat of the Colonial Regiment)이고 이젤 앞에 선(and) 마네(Manet and His Easel)다.

그리고 같은 유럽어족이지만 영어와 불어의 전치사도 기계적으로 치환되지 않고 각 언어권의 원어민 나름대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감각이 있다. 언급한 르누아르 작품 불어로는 Jeunes filles au piano로, au는 à+le, 즉 at+the를 부드러운 발음을 위해 축약한 말이다. 그럼 영어의 앳과 불어의 아가 늘 같은가? 그렇지 않다.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는 Jeune fille au chapeau rose et noir로, 불어의 à가 영어에선 in을 바뀌어 in a .. hat이 된다. 안경을 "쓴"도 à lunettes고

영어는 in glasses지만 때에 따라 wearing glasses도 쓴다.

at이나 with을 à가 아니라 전치사 없이 분사형태로 바꾸기도 한다. 르누아르의 landscapes with a woman은 산책하는 여자와 풍경(Paysage et femme jardinant)이다. with a woman이 아니라 walking woman이다.

그러니 같은 유럽어족이라고 영어의 at과 불어의 à가 기계적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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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 과타리 『카프카』 수업 그린비 수업시리즈 2
성기현 지음 / 그린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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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과타리 수업 재밌게 읽었다.


원서를 오래 읽어 온 저자가 비유를 곁들여 자기 스타일대로 해설해주는 서적은 늘 흥미롭다. 과거에 박제된 고전이 현대적 감각을 입는다. 비유하자면 EDM으로 재해석된 클래식 같은 스타일 변환이다. 이런 책의 효시는 세기말에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이진경 선생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한다. 지금은 그린비에 판권이 있으나 94년엔 새길출판사에서 나왔다.


깊은 내공을 지닌 철학 원서를 읽고는 싶으나 고전 문체는 너무 딱딱하여 페이지를 쉬이 넘기기 어렵다. 초심자의 열정으로 가득 차 책을 펼쳤다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니, 중얼중얼하다가 탁 덮어버린다. 자기 생의 현실적 문제를 진단해 줄 오컴의 레이저를 바라나 옛 글의 생각의 결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읽기 힘든 번역투의 글은 독서를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냉동식재료보다 갓 잡은 원물과 채소가 신선하듯, 책도 번역서보다 원서가 좋다. 그러나 동서양 고전을 원서로 읽고자해도 외국어 공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당장 니체나 사르트르를 읽고 싶어도 유럽언어 C1까지 가는데 복습을 제외하고 수업시간만 천 시간이 걸린다. 쇼펜하우어를 읽기 위해 알파벳부터 관련없는 수많은 다이얼로그와 현대문화를 지나쳐야하는 머나먼 여정이다. 설령 한 언어는 마스터했어도 다른 언어까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깊이를 지니기는 어렵다. 열개 국어를 하더라도 또 다시 모르는 마이너한 외국어가 나온다. 러시아어와 튀르키예어 티벳어 등등. 한 정상에 오르는 것도 만만찮은데 어떻게 다 오를 수 있을까. 전문가의 존재가 귀한 이유다. 나 대신 올라가 준다. 그런 전문가가 베푼 좋은 해설서를 통해 몰랐던 귀한 학자과 글을 알 수 있다. 살면서 보물 같은 전문가들을 수없이 만나고 그들에게 사숙해 나의 배우는 지경을 넓혀간다.


해설서는 밸런스가 중요하다. 성공학을 버무린 대중서나 뇌피셜을 곁들이 교양서가 아니라 원전을 바탕으로 하는 해설서여야한다. 그리고 해당분야의 원서를 오랫동안 제대로 읽은 이가 써야 한다. 그래야 깊이와 너비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최근 들뢰즈 과타리 번역본이 없는 마당에 원서에서 일부 발췌한 저자의 번역은 적절하고 흥미로웠다.


저자의 마지막 일갈은 이렇다. "덧붙여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철학의 개념과 논리는 암기해 두었다가 지적 허영을 부릴 때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과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진단하고 예측하며 거기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것이죠" p296


이는 논문을 읽다가 동서양 학자들의 위대함에 탄복한 나머지 그간 자신의 무지를 탓하는 방어기제가 나와, 개념을 소유하고 개념을 잘못 쓰는 타인을 재단하는 감찰자들에게 주는 조언이자 권고로도 읽힌다. 우리는 타인의 모름에 조금 더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내 자신의 탐독에 더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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