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gallerycrane.com/current/5



detail, ota, water play, oil on linen canvas, 2025


ota, highball, oil on linen canvas, 2025



detail, ota, despite all,oil on linen canvas, 2025


갤러리 크레인에 다녀왔다. 평창 일대는 주기적으로 방문해야하는 갤러리 성지다. 상명대박물관-가나아트센터-크레인-OKNP-세줄-자인-누크-김종영-삼세영-모리스-김보성 등으로 연결되는 동선이 완벽하다. 이어령 산책길을 따라 키미아트-영인문학관-갤러리2로 빠지는 분기점도 있다. 그리고 환기미술관과 석파정 있는 부암동을 거쳐 서촌으로 가면 스무 군데 이상 들릴 수 있다. 아주 촘촘히 다니자면 도암-중정-화정에, 동선이 복잡한 퀄리아, 자브종, 씨앤케이도 있고, 내려오면서 김달진박물관1층, 본+웅(같은 건물), 두루아트스페이스, 비엔에스, 라온을 다 거쳐서 석파정에 이를 수 있다. 환기미술관 앞에도 하랑과 에이라운지가 있고, 멀리는 등산루트와 진배없는 자하와 목석원도 있다. 하루에 다 돌기엔 버겁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크레인 첫 전시는 아토, 두 번째는 오경훈, 이번 세 번째는 오타인데 뭔가 작가 이름에 반복되는 모음과 라임이 보인다. 우연의 일치.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는 시각적 진동이다. 개관전 <인앤양>의 입구에 걸린 기하학적 문양의 반복과 수묵화적 스트로크 회화에서 시각적 진동이 느껴졌으며, 그 다음 팝아트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오경훈의 그림에선 빛의 광선이 분홍색의 파스텔 색감과 함께 부각되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울트라마린의 시원한 느낌으로 다스리려는 듯한 이번 오타작가의 전시는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삼원색 트라이어드가 특징이다. 프탈로 시안과 퀴나크리돈 마젠타와 카드뮴 오렌지로 보이는 세 가지 색의 고채도 병치가 무더운 열기를 냉각시키는 듯 강하게 시각적으로 진동한다.


또한 조형을 붙잡고 있는 듯한 형광빛 윤곽선은 마치 무대 위의 검은 암전 속에서 홀로 번쩍이는 출구 표지판 같기도 하다. 채도와 색상을 입체감을 만드는 작가 특유의 조합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빛과 색은 엄연히 다른 분류체계인데 색감으로 빛의 음영을 창의적으로 표현했다. 


반전된 명도와 밝은 채도가 화면 전체를 경계 지으며 관객의 시선을 오브제로 유도해서 망막에는 얼굴과 손의 따뜻한 테두리가 각인된다. 보랏빛 반사광과 냉색 베이스로 입 속 가득히 쿨감이 느껴진다. 상쾌한 레몬빛이 팝팝거리며 안팎을 가르는 발광적 울타리로 작동한다. 외부의 힘이 내부를 잔잔히 형성하는데 콘트라스트에 집중하고 잇으면 안이 바깥에 의해 조여지고 다시 바깥은 안에 의해 호명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형광빛 윤곽선은 표피가 아니라 골격이며 색채의 흐름을 붙들어 두는 일종의 긴장된 신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형광빛 윤곽선이 소성하는 차가운 불꽃의 울분, 압박하는 투명한 쇠사슬의 속삭임, 찬란히 빛나는 늪의 윤리. 짙은 남색은 화면의 바닥에서 조용히 소환되어 검푸른 물결처럼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 위로 흘러내린 핑크다홍빛 얼룩은 불현듯 툭하고 떨어진 석류 알맹이 같다. 선은 직선이라기보다는 휘익 몸을 틀며 휘어지는 바람의 곡선같고 그렇게 스트로크의 바람을 따라 다다른 어느 색의 엣지에서는 가느다란 실선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간다. 흡사 유약이 번지는듯 가장자리에 엷게 퍼진 터치에서는 촉촉한 흙냄새 섞인 습기가 감지된다.


보는 이는 그림에서 우선 색이 겹쳐지는 경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시간대 두 개가 어긋나며 만들어낸 얇은 균열이 숨어 있다. 또 손끝이 종이를 더듬듯 눈으로 선을 따라가다 보면 파동같은 질감에서 작가의 즉흥적 호흡을 함께 느껴볼 수도 있다. 본다는 것은 살아 있는 행위의 기록이어라 그 신비여


훌륭한 문학작품에서 서로 맞물릴 리 없는 단어들이 강제로 한 자리에 배치될 때 독자는 낯섦에 걸려 넘어지고 그 걸려짐 속에서 새로운 읽기의 문턱을 발견한다. 고정된 언어의 조합을 흩트리는 순간 우리는 사고의 문법을 다시 짜맞추게 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컬러와 오브제의 나이브한 조합과 관습적인 모둠을 혁신하는 작가의 창의적인 재배치는 우리에게 그림을 읽어내는 시각적 문법을 전면 재검토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때 두껍게 내려앉던 묘사와 서사의 중량감은 이제 오타의 그림들 앞에서 맥없이 풀린다. 전시장에는 마치 차가우면서 따뜻한 빛과 색이 공간을 풍윤하게 감싸고 있다. 신비화(fetishism)된 회화는 소소한 일상의 사물들을 기호의 제단에 올려놓으며 또 다른 감각의 성소를 구축한다.


이 작업에서 남다른 것은 재현의 정직함보다는 표면의 파장이다. 색의 진동은 함부르크 항구의 사이렌처럼 웅웅 울리고 필획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대처럼 요동친다. 인물의 눈은 가만히 응시하는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붓질의 떨림에서 차이와 반복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보는 이는 결코 같은 색을 두 번 본다고 느끼지 않을 거다. 색 배치는 정서의 교환값으로서 형상과 나 사이에 존재론적 의미장을 짜임새있게 설치한다. 핑크빛 살갗과 시안의 음영은 늘 다른 조율로 나타나고 하이라이트의 흰 점은 매 순간 새로이 번쩍인다.


흔히 팝아트를 그저 소비 이미지의 반영으로 읽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당대 도시인의 생필품 아아가 카라바죠 성화의 제물처럼 빛나고 흔한 건조대에 걸린 빨래가 하늘과 땅을 잇는 축처럼 번쩍인다. 일상은 비천한 것이 아니라 의례적 행위로 승격된다. 삶의 사소한 사물이 환생한다. 회화 속 평범한 소품은 찬란한 청춘을 찬미한다. 


아도르노가 음악에서 소박한 리듬을 통해 사회적 진동을 감지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김애란이 일상 묘사에서 사회학적 풍경을 짚어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타 작가는 팝회화의 장르적 장난을 빌려 스마트폰 빛과 이미지의 즉시성을 재현한다. 두터우면서 명랑한 빛의 파동, 경쾌하면서도 무거운 냉감, 얇으면서도 깊은 모순의 공존을 느낀다. 각기 다른 리듬을 가진 시계처럼 작품은 우리 감각을 다시 짜맞추게 한다.



detail, ota, catch ball, oil on linen canvas, 2025


디테일을 자세히 보면 깊이와 평면이 동시에 주어지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발랄하게 붉은 윤곽선은 형태를 딱 잘라내면서 다시 내부의 차분한 청색 그림자가 그 잘린 흔적을 지워버린다. LP판의 리듬과 비눗방울의 생동을 보라. 경계는 또렷하면서도 물결처럼 흔들린다. 롤랑 바르트라면 풍크툼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마음을 찌르는 순간의 감각이라는 뜻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를 언급했겠다. 보는 이는 안정된 형태와 의젓하게 부서지는 표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작가의 형광빛 윤곽선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테두리와 다르고, 장미셸 바스키아의 날 선 드로잉과도 다르다. 곧 DDP에서 전시를 할 바스키아의 거친 낙서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분출과 같다면 이 작품의 림라이트는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단백질 박막을 봉쇄하는 생물학적 힘에 가깝다. 형태 안의 색이 있다는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을 뒤집어 색 위의 형태라는 전도된 질서를 창안했다고 본다.


20세기 회화사 속에 위치시켜보자면 칸딘스키의 영적 추상과도 닮은 부분이 있고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흔적의 찌그러진 인체성과도 은근히 호응하는 것 같다. 선은 마티스의 자유로운 드로잉을 연상시키면서도 색은 로스코의 명상적 색면보다는 되려 한국 단색화의 농묵 같은 번짐에 비근하다.


전통적 서양 회화의 직선적 발전사 속에 끼워 넣을 수 없는, 역사 앞에 똑바로 선 개인의 이질성은 오히려 동아시아 회화의 여백의 필연성과 상호작용할 때 더 뚜렷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서구 모더니즘의 문법을 빌리되 그 기원을 탈주하여 낯선 계보를 형성한다. 비평적으로 본다면 컨템포러리 글로벌 아트시장이 요구하는 혼합적 정체성의 변주의 일환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익숙한 언어들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혁신적이면서 순응적인 저항의 방식이다.


감상자에게 제안되는 관찰 포인트는 명확하다. 색채가 아니라 그 색을 잠가두는 빛의 울타리를 먼저 바라볼 것. 그리고 그 빛이 단순한 선이 아니라 화면의 호흡을 한껏 조여 매는, 일종의 형광적 족쇄임을 알아차릴 것. 그러면 그림을 보는 나에게 공간을 휘감는 모든 전시경험이 내 안에 투영되어 몸과 정신을 동시에 휘감는 조형적 구속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각은 육체에 스며든 세계의 촉감이자 체화된 사유라는 메를로퐁티의 말을 전시경험을 경유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감정의 무늬를 기록한 낙서이자 시각적으로 호흡하는 맥박으로서 오타의 회화는 감각의 배후에서 남몰래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실험적 문서다. 하여, 보는 이는 증거를 판독하는 탐문자처럼 작품 앞에 서게 되리라. 



detail, ota, summer collector, oil on linen canvas,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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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시대예보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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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반드시 좋은 것 반드시 나쁜 것은 없다. 그 상황에 적절하거나 부적절한 게 있을 뿐이다. 최근 강릉 물부족사태에서 보아알듯 폭우는 바닷가 마을을 침수시키지만 고산지대에서는 같은 기상현상이 해갈의 축복이 된다.


어? 강릉은 바닷가 근처아냐? 싶겠다. 물리적 거리는 바다와 가까우나 급경사 지대문제로 물이 고이지 않고 빠르게 바다로 흘러가 버리는 문제가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인생에서 각자 간절히 원하는 결핍의 대상이 다르다. 그러나 분류해보면 대개 돈, 사람, 명예, 가족, 재능을 크게 넘지는 않는다. 사주에서는 이를 재성, 비견, 관성, 인성, 식상이라고 표현한다.


아예 없는 것도 문제고 조금밖에 없는 것도 문제다. 돈이 없으면 해야할 것을 못하고(무재), 돈이 적으면 시작은 했지마 찍먹으로 끝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물로 내가 증명된다.


이 구체적인 형태는 사람과 처한 환경마다 다른데 예를 들어 자금 부족으로 프로젝트를 원하는 모습으로 구현하지 못했거나, 집에 돈이 없어 학업을 못 끝냈거나, 엔젤 투자를 받지 못한 스타트업, 금리가 높아 대출금을 충분히 받지 못해 시설투자를 양껏 못한 사람,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양껏 사용하지 못한 예술가 등등이 있겠다.


그러나 돈이 과다해도 역시 문제다. 다 쓸 수 없고, 또한 가오나시처럼 갑자기 돈과 함께 돈이 나갈 일이나 여러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서민은 재벌을 부러워하며,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코스피의 늪에 갇힌 동학개미는 폭등장의 서학개미를 부러워하지만 돈이 벌리면 나갈 돈도 많다. 생각하지 못했던 수수료, 종부세, 부가가치세, 협회 가입비 온갖 내역이 생긴다. 사주에서 재성은 재물뿐 아니라 일복을 뜻하기에 돈을 번만큼 또한 쓸 일이 많아진다. 그렇게 돈은 돌도 도는 것.


돈의 본질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를 증폭시켜주는 것이다. 사업 아이디어가 프랜차이즈화가 되고, 작은 캔버스에 그리던 화가가 대형을 그리게 되고, 여행유투버가 더 많은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코미디언이 더 많은 사람을 웃기게 해주거나 하는 것이다. 본디 갖고 있던 아이디어가 사회에 패악을 끼친다하더라도 증폭이 된다. 그러니 좋고 선한 씨앗에 에너지가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지금 돈이 없는 이라도 언젠가는 돈이 생긴다. 자신의 시절이 온다. 품어왔던 나만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흐드러지게 열매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단단히 땅을 다지고 기술을 연마하고 생각을 조탁해두어야한다. 마치 가을을 상상하면서 봄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한겨울인 새해에 한 해 농사 플랜을 디자인하듯이.


아까 말했든 재복이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쓸 일, 곧 일복을 뜻하기 때문에 물길이 들어와 노를 저어야할 때가 오면 공부하고 뒤를 돌아 볼 시간이 없다. 매일 일을 쳐내느라 바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갑자기 이렇게 삶이 바뀌었다는 것을 소급해서 느끼게 된다. 


2010년 이후 엔젤 투자 받고 스타트업 차린 이들이 많다. 이들의 얼굴을 보면 돈은 벌었어도 단 몇 년만에 얼굴이 폭싹 삭고 흰머리 가득한 경우도 여럿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상을 경험했다고 본다. 무명의 장삼이사로 히키코모리로 학생으로서 지내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갔는데 자신의 타이밍이 도래하자 갑자기 시간이 배속으로 흘러간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자기 운명에서 짜여진 바대로 다른 속도의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돈뿐 아니라 관(명예, 조직)이 과다할 경우 이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감의 범위를 지나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는 대상이 많아진다. 인성이 과다할 경우 내가 소화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도움을 받게 된다. 예컨대 최근 올라 온 유투버 딕헌터의 300만원짜리 부산-오사카 페리 오너스룸 이용기를 봤는데 한 사람이 다 먹기에 힘들만큼의 음식, 술, 프로그램이 과다하게 제공되어 행복에 겨워 힘들어하는 영상이었다. 그 하루에 몰아서 먹고 즐기지 않고 야간 알바하면서 돈 모으는 힘겨운 나날에 나누어서 지급되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인생이 신기하게도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때, 폭발적으로 공부해서 머리가 좋아지는 때, 폭발적으로 돈이 벌리는 때, 폭발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때, 폭발적으로 일이 많은 때가 있다. 마치 자고 일어났더니 씨앗이 우후죽순 자라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이 그렇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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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는 다른 유럽어와 다르다. 대개 SVO 어순의 직선적인 문형이 특징인 유럽어에 비해 행위주체인 주어를 강조하지 않고 수동태나 사역형을 활용해 행위자를 생략하고 사건을 강조한다. 


예컨대

John broke the window 존이 창문을 깼다


를 직역한 Juan rompió la ventana보다


la ventana se rompió 창문이 깨졌다가 자연스럽다.


물론 프랑스어에도 네가 보고 싶어=I miss you를 Tu me manques라고 뒤집어 표현해 너는 나를 그립게 만들어, 라는 로맨틱한 표현이 있지만 인과관계보다 행위의 매개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표현은 스페인어에 훨씬 많다.


우선 se가 다른 유럽어에 비해 재귀인칭대명사일 뿐 아니라 무인칭(다들 그렇다), 수동(~되었다) 등 다양하게 쓰인다. 다른 언어에서는 poderse처럼 can에 itself가 붙어있는 표현이 없고, verse처럼 see oneself가 되었다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무인칭, 중간태, 재귀, 주체 후위화를 모두 포괄하는 스페인어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래서 se puede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 가능하다로 해석되고, verse(보통 se vio로)는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나타난다, ~보인다, ~듯 하다'로 옮겨진다. 이런 표현법의 특징은 목적어나 사건 자체가 주어처럼 문두로 올 수 있으며 행위자는 생략하고 상황을 강조하며 동사와 붙어 무인칭 수동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영프독에는 정확히 대응되는 직역이 없다. 옮기려면 항상 가상의 주어 또는 문어적 구조가 필요하다. 없던 주체를 발굴하는 등 구조를 꺾어야한다.


이런 스페인어는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아랍인의 언어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랍어도 동사를 먼저 쓰고 주어는 종종 가려지기 때문이다 VSO 혹은 VO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또한 아랍어 동사 10변형 중에서 스페인어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표현이 많다. 예컨대


아랍어 동사 10변형 개요에서 9번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그런 뉘앙스다 (대략 아랍어과 2학년 진도)

I (فعل) 기본 의미, 단순 동사

II (فعّل) 사역 / 강화 / 반복

III (فاعل) 상호적 / 상호작용

IV (أفعل) 사역 / 강제

V (تفعّل) 재귀적, 자기행위 강조

VI (تفاعل) 상호적 재귀

VII (انفعل) 수동 / 자기발생 / 상태 변화

VIII (افتعل) 반사적 / 자기 관련 / 재귀

IX (افعلّ) 색·상태 관련 (형용사적)

X (استفعل) 사역적·요청적 / 얻다, 구하다


동사 수준이 아니라 문형 수준에서 보자면 아까 읽었던 히스토리아 아르떼의 도라 마르 글에서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Los últimos años de esta fotógrafa olvidada los pasa en su casa, con un círculo reducido de amistades.


한영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This forgotten photographer spent her final years at home with a small circle of friends.

(혹은 더 원어민스럽게 자연스럽게 바꾸면, In her final years, this forgotten photographer lived quietly at home, surrounded by a few close friends)다. 


이 잊힌 여성사진작가는 말년에 집에서 가까운 몇몇 친구들과 조용히 지냈다.


물론 reducido에는 줄어든 친구라는 뉘앙스가 있긴 한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문형이다.


스페인어의 문구를 그대로 한영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잊힌 여성 사진작가의 마지막 몇 년은) 그녀는 (집에서 보낸다) (작은 친구들의 모임과 함께)

(The final years of this forgotten photographer) (years) she spends at home이다.


특이한 구조다.


주체인 사진가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다라는 행위의 목적어가 도치되었고(토픽강조) 주어인 그녀는 동사에 포함됐다. 원래 스페인어는 동사 어미에 주어가 표현되어서 she spends가 아니라 spends(pasa)라고 쓰였다.


게다가 years도 대명사los로 한 번 더 반복되었다.


Los últimos años de esta fotógrafa olvidada

이 잊힌 여성사진작가의 말년을

los pasa en su casa

(그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집에서



이를 통해 사건이나 결과가 먼저 나오고 부차적인 행위자는 생략가능한 주체 후위화의 언어적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간접적 매개적 조정적 관점으로서 독립적인 개인이 주체적으로 했다라는 서유럽식 사고보다는, 그렇게 되었다라는 사건 자체에 주목하는 아랍어에 영향받은 사고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수동태나 중간태(무인칭) 활용을 통해 상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변화에 초점을 두는 접근방식도 보인다. 


이런 특징은 일본어에서도 보이는데 예컨대 직접적으로 사랑고백을 하지 않고, 분위기상으로 사귀게되어졌다라고 한다든지, 원하는 것을 직접 쟁취하지 않고 상황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다고 말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일본어에서는 꾈 유를 써서 사소우(誘う)같은 표현이 많이 보이는데 

사소와레따(誘われた)라는 말은 권해졌다, 꾀어졌다, 불러내졌다라는 말이고, 피동형(국문법에선 수동태라는 말이 틀리다)이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식로 바꾸어보자면 (상황에 이끌려서) 가게 되었다, 즉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デートに誘われた

직역은 데이트에 권해졌다이고

데이트하게 되었다=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라는 뉘앙스로 해석이되는데

이런 답답함이 싫어서 직설적 화법으로 바꾸자면

숨겨져있고 없던 주어를 복원해야한다.

"그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했다"라고.


이와 비슷하게 지명되었다, 지목되었다(指名された)도 많이 쓴다. 이런 표현은 한 두개가 아니다.

사랑이나 관계에 있어서도 간접적 표현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어쩐지 아랍-스페인-일본 모두 척박한 기후에서 종교의 역할이 강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 속에 사람들은 순종적이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방지할 수 없는 천재지변 속에 교단과 함께 대동단결해 상호부조를 하는 상황 속에서 발아된 공통적인 사고방식이 언어에 드러나는 것 같다. 


자연환경과 기후가 인간의식과 언어표현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행위자는 뒤로 빼고 감추고 직접 행동이나 발화보다 결과나 상황으로 사건을 묘사해서 감정적 사회적 완충장치를 만드는 언어는


주체의식이 뿜뿜 빛나고 자기 문제는 스스로 DIY로 해결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마을로 얼마든지 이동하는 북유럽식 사고와는 차이점이 있다.


아랍의 모래사막 척박한 땅에 인격화된 유일신 구원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역시나 뜨겁게 작열하는 스페인의 기후에서 태동한 열렬한 가톨릭 신도들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도를 나갈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습기가 많은 더위를 어떻게 해볼 수 없어 견디는 자들이 매년 태풍 쓰나미 지진의 자연재해를 견뎌야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불교나 신도의 조직력을 통해 어떻게든 마을 단위로 대동단결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런 기후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는 

자랑스러운 내가 이것을 혼자서 하였다. 라는 말보다는

우리 모두 다같이 하였다, 이런 식으로 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집단이 하였다. 하는 식으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결국 집이 쓰러졌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다시 복원되었다고

우리 모두 함께 한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그런 결과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기후와 생활방식이 언어와 사고에 영향을 미쳐 영향주체 후위화, 결과 사건 중심, 간접적 매개적 완충적 상황중심적 결과중심적 집단적 사고가 나타난다고 본다.


물론 일부의 특징으로 읽어낸 사례일 뿐 집단 구성원의 사고를 표준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케바케 사바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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