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공부 잘했다. 반1등을 했다.

라는 말의 뒷꽁무니를 잡고 으레 따라오는 말은

그런데 공고를 갔다. 여상을 갔다. 실업계를 갔다.

라는 말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따라오는 말은

나보다 공부 못했던 애가, 반2등이었던 애가 지금은 교수다, 장관이다, 한 자리하고 있다, 잘 나간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섞인 더블샷 푸념이다. 대부분 현재 직업과 환경에 만족하지 않은 경우에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에는 사람은 많은데 지식정보와 시스템과 기술이 없었다. 그러니 교육이 중요했다. 50-60년에 교수가 되신 분들 중에는 일본에서 대학교만 나왔어도 교수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70-80년대에 교수가 되신 분들 중에는 석사학위로만 취직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박사, 포닥, 미국 조교수출신, 실무경력 등으로 학력인플레가 심해진다. 무엇보다 근무조건도 같지 않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그냥 있어주는 존재감이 중요했고, 따라서 논문 몇 편 써야한다는 조건 같은게 없었다. 한량처럼 사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중간기말고사 때 강의실에 들어와서 그냥 "OO란 무엇인가?" 같은 말을 쓰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 진입한 자들은 꿀을 빨았다.

그렇게 해도 똑똑하고 의지있는 학생들은 우후죽순 생겼고, 대체로 이런 이들은 알아서 스스로 공부를 했기에 나른하게 "잘 될거네, 너를 믿네" 하는 말만 해주면 나중에 성공하고 제자로 찾아온다. 교직에 있는 이들은 안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만남이 힘들었어도 결국 졸업을 잘 시키고 좋은 상급기관에 진학하면 성공이 그 이전 과정을 다 소급한다. 인생이 잘 나가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준다. 노력하고 죽을 쑤면 말짱 꽝이다. 최종 성공이 그 이전 실패를 소급하는 것인데, 소급이 안되면 모든 고난의 과정은 망각이 안되고 계속 곱씹으면서 체념의 원천이 된다. 열심히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나, 실패하면 서울대 졸업장도 쓸모가 없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어려웠으나.... 잘 됐다! 라는 성공신화기 때문. 지금은 취업교육도 따로 시켜야하고, 옛날같지 않다. 회사에서 신입사원 뽑아서 교육해주던 자격증, 업무교육, 외국어 등이 지금은 자비로 해야한다. 좋은 대학나오면 취직하던 시절이 끝난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 옛날 같은 교수님들이 있다면 비난의 몰매를 받기 십상이다. 고등학교는 3년 맡아두고 대학교보내면 끝인데, 대학교는 4년 맡아두고 그 다음으로 토스할 곳이 없으니 취업이 쉽지 않다면 선생원망이 생기고 학교 탓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쉬운 선택지로 대학원을 종용하고, 그렇게 미래를 유예시킨다. 빚은 쌓여만가는데. 여대나 미대의 경우 여성의 아름다움 혹은 원래 집이 부자였으므로 미술을 시켰다는 본가의 재력을 무기로 시집을 보내고 정신적 책임을 종료하는 경우도 있다. 갤러리에 취직하거나, 대학원 가거나=유학을 가거나=작가가 되거나(셋은 거의 같은 느낌의 말), 아니면 시집장가. 미대생들은 대략 이런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린다. 취업과 시집을 합한 다소 차별적인 표현, 취집,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아니라, 취업, 대학원, 결혼같은 사회적 이벤트를 기점으로 그 이전 소속과 신분이 종료되기에, 초중고처럼 아예 담당기관이 바뀌는 경우와는 달리(그리고 이때는 성장기라 신체적 성장도 급격해서 1년 전과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대학교는 담당기관이 바뀌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기분이라 약간 한 타임 끊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와 중학교는 무슨 관계인가?

경제급성장하던 산업화시기에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다면 그 다음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상급교육기관에 계속 올라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력과 경력이 뒷받침된 이들에게 사회는 계속 호의적이었을 것이고 많은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을 만들지 않았다면 여유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동창모임에 가서 부동산 개발소식을 듣고 일산과 압구정의 요목에 좋은 아파트를 하나 사두어 대대로 금전적 혜택을 보았을 수도 있고, 이때 여윳돈이 없었더라도 친구와 지인의 지인을 통해 은행대출을 쉽게 받았을 수 있다. 그러니 교육은 사회적 성공과 금전이득으로 연결되는 성공의 사다리의 초입이었다.

그러니 동생 뒷바라지, 가난한 가정형편, 부모의 무지 등 다양한 이유로 그 우상향 장기우량주에 올라탈 기회에서 탈선해버린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는가. 나이가 들고 보니 그때 그렇게 기차를 놓쳐서 3시간이면 갈 부산을 혼자서 30일 동안 털래털래 걸어갔더니 이미 장터가 끝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물론 교육의 부산물만 다가 아니다.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한 한은 그 자체로 한스러운 일이다.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보았다. 선생님은 진주에서 한약방을 해서 많은 돈을 벌어 학교를 짓고 장학재단을 만들어 수많은 학생들을 교육시켰는데 여전히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크셨다. 그 반대급부로 다른 이들을 교육시킨 것이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에서 교육의 한 상징, 즉, 배워서 따내는 공적 자격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선생님도 신문에서 한약업사 공고를 보고 만18세때 최연소로 국가자격증을 취득했고 그덕에 몇 십년간 한약방을 운영해 지방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상황이 지금과 같지 않다. 한약방을 열려면 미적분을 잘하고 경희대 원광대 한의대에서 침수련도 받고 한문도 공부한 다음 고시를 통과해야한다. 모두 길게는 10년은 걸리는 일이다. 그러니 그때 그 60년대의 자격증이란, 전쟁 때의 신분증명서처럼 수만 금보다 귀한 것이었겠다.

부의 사다리에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든 못 올라가고 아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든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 안다. 어렸을 때는 몰라서 기회를 놓쳤지만 자식에게까지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교육에 몰빵한다. 상류층은 국제고와 유학을 보내고, 중산층은 외고와 자사고를 보낸다. 이제 교육의 분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제 사회의 트렌드는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다. 몇 십 년전 금보다 귀한 그 교육, 혹은 교육으로 인한 결과인 졸업증, 자격증, 시험패스같은 것만 얻었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칙칙폭폭 달려나갔을테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나무보다는 숲을 봐야한다.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구조를 보아야한다. 사막에 숲을 이제 만들 때의 나무 한 그루와, 숲이 울창해졌을 때 나무 한 그루는 완전히 역할이 다른 것이다. 처음의 그 나무를 생각하고 나중의 나무를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산업화 시대의 교육은 디지털 시대와 교육과 같지 않다.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된 사람이 없던 시절에, 교육을 통해 남들과 차별화를 시켜 준 베이비붐시대의 교육. 이제는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을 한다.


베이비붐시대의 교육의 역할은 21세기 초입의 주식과 비트코인이다. 카카오 네이버 배민 테슬라구글(알파벳) 등이 처음 주식상장이 되었을 때 산 이들과 장이 커졌을 때 산 사람들의 입장이 다르다. 지금은 개당 1억원인 비트코인이 100달러였을 2013년 즈음 구매한 초기 진입자들이 연희전문학교나 일본동양예술학교 졸업하고 논문 몇 편 써야하는 조건 없이 교수된 이들과 비슷하다. 제자들 다 사회에서 명성있는 유명인이되고 자신도 명예교수가 되고 계속 사람들이 추앙하고 회고전을 열어주어 복리효과가 생긴다. 지금은 그냥 교육 가지고는 안된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들여 고점의 학벌을 매수해야한다. 그래야 본전이고, 유학의 ROI가 안 맞는 경우가 생기지만 그냥 다 하니까 나도 해야한다. 학력도 없이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하고 운까지 따라줘야 겨우 취득가능한 사적 신분증명서, 아주 비싼 개인 호패다.


주식시장이 과열된 후, 고점에서 산 주식은 맥아리가 없다. 시장이 커지면 이제 좋은 주식과 나쁜 주식을 구분해야한다. 지금 교육의 옵션이 생애주기별 유학, 다양한 종류의 학교, 영미호주일본 등 온갖 공부, 전공별로 다양한 루트 등이 생긴 것처럼. 옛날에는 교육 하는 게 중요했고, 지금은 어떤 교육이냐가 중요해서 수많은 다양한 선택지가 생겼다. 옛날에는 주식을 초기에 샀냐, 비트코인했냐가 중요했고 지금은 이더리움, 업비트, 저점매수, 스캘핑, 단타 등등 온갖 다양한 비법이 생겼다. 주역을 활용한 원영리정이라는 것도 있고, 풍수를 활용한 홍콩주식비법도 있다.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일까?
나는 취향이 넥스트 트렌드가 될 것 같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의 홍수를 넘어 지피티 시대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수많은 정보를 소화해서 큐레이션해주는 것도 능력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처음에 읽었어야지 이제 읽으면 어려워. 그때부터 했어야했는데 다 따라가려면 너무 많아. 라는 말이 앞으로 나오게 될 것 같다. 웹소, 웹툰도 다 그런 영역이다.

브레이킹배드 같은 시즌이 많은 미국드라마, 36개에 달하는 마블 시리즈, 30개에 달하는 디즈니애니를 조금씩 봐왔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제 새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100시간은 써서 봐야한다.

그런 장르별, 취향별 정보가 너무 많아져서 그 분야의 정보를 항상 접하고 있다가 초심자에게 핵심만 알려주고 하는 일들도 중요해지리라고 생각한다. 영화관계자들은 매우 싫어하지만, 유투브 영화 리뷰 요약이 돈이 되는 이유가 다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미래를 다 예측할 수는 없으니까 이것이 어떤 형태로 굴러나갈지는 지켜봐야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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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의 생각 없는 생각 - 양장
료 지음 / 열림원 / 2025년 6월
평점 :
품절


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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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일본전기미술전에 다녀왔다. 글피에 오픈했으나, 국중박은 다른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라 닫는 월요일에도 여는 관계로 월요일에 방문계획을 짜두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노(가면극), 조몬토기, 칠기, 옷, 그림 등을 대여해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작품과 함께 3층에 전시했다. 꾸민 장식, 절제된 반장식, 애잔함, 자유분방이라는 네 가지 포인트로 작품을 모아두었다고 써있다.


인사이드아웃식으로 말하자면, 와 예쁘고 멋져, 으음 소박하네, 아이구 쓸쓸하고 애처롭네, 들뜨고 재밌어 보이네의 구성이다


그러나 전시장 안에서 보이는 각 섹션 도입부 설명은 이 네 테마를 재서술해, 꾸밈의 열정, 절제의 추구, 찰나의 감동, 삶의 유희이라고 써두었다. 네 가지 시선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는 뜻은 죠몬 야요이 고훈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막말 메이지로 이어지는 일본사 연대기적 순서따라 작품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본사를 다 훑을만한 작품 갯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완성된 연대기적 전시를 보려면 자국사를 가장 잘 전시해둔 일본 국립박물관을 가야한다. 외국에서는 한 나라의 모든 연대기를 훑은 만한 전시를 열기는 어렵고 보통 테마전을 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테마전은 포인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감질거린다는 느낌은 당연히 받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작품이 부족해? 라는 불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무책임하고 나른한 비평이고, 제한된 자원을 어떤 의도로 배치했을까? 를 고민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계열로 배치하기에는 작품 갯수가 모자르고 일부 빠진 시대 작품도 있다면 일반적인 시대별 순서를 택하지 못하고 다른 식으로 재구성해야한다. 그에 따른 배치구도가 장식, 반장식, 애잔함과 놀이라는 것.


띠부띠부씰, 포켓몬 카드, 아이돌 굿즈 등을 모을 때도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방에 배치를 해둘텐데 갯수가 적으면 카테고리화하기에 제한이 있는 것과 같다. 커머셜 굿즈에서 희귀한 문화재로 대상이 변했다는 것만 차이일 뿐, 


가격 고하와 희소성 유무를 막론하고 다수의 물품을 배치하는데에는 선택과 결정이 수반된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 배치했는가 그 결과에는 늘 결정권자의 고민의 흔적이 있고, 이 결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느냐에 따라 권위가 따른다. 


관객은 결정이 마무리된 최종결과인 전시를 보면서 왜 네 시선이지? 각각 어떤 의미가 있지? 각 작품은 각 테마에 적절한지 아닌지 음미하면서, 컨테스트 심사위원처럼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조탁하며 전시장을 천천히 걷는다.


화려한 장식에는 예쁜 자기, 장식문양의 조몬토기, 나전칠기, 길상무늬 이불, 찬란한 봉황 병풍을 배치하고


소박한 반장식에는 차완과 절제된 차문화를 위주로


애잔함에는 하이쿠, 겐지모노가타리 구절을


자유분방함에는 가면극 노의 물품과 에도시대 잔치가 그려진 병풍과 새 그림들을 배치했다.


이제 각자 가서 정말 배치된 작품과 테마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차례다. 이는 미시적 분석으로, 각론을 총론에 맞춰보는, 


전시출품리스트와 전시의도를 대응시켜보는 작업이다. 


더러는 장식-장식 없음-애잔함-자유분방함이라는 거시적 구조가 일본의 미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접근방법인가? 아니면 여기 있는 작품에 몇 개를 빼고 더해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고민해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장식공예의 물질문화와 정신성 위주의 지배계급 문인문화라든지, 그림과 글 즉 시각문화와 텍스트문화라든지 다양한 접근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 한 벌의 카드를 숫자와 글자로 하든 컬러로 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배치할 수 있듯 말이다.


참고로, 사실 지금 국중박의 전시는 방점이 4개다.


1층에 크게 특별전시 두 개 하고 있고 (조선전기미술과 오세아니아 마나모아나)


2층 왼쪽 시서화에 7.20까지 전시하고 교체되는 좋은 시서화 작품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3층 오른쪽 특별실에 6.20부터 8.10까지 일본미술 특별전을 하고 있다. 아 물론, 원래 있던 일본상설전시도 그대로 있고 추가로 하는 것이다.


전체 약 50점 중 두 점은 7.14까지만 하니 그때까지 방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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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헌을 많이 읽은 학자는 우리가 쉬이 알 수 없는 사실과 통찰을 과거 사료로부터 꺼내준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대개 글이 만연체에 중언부언(redundancy)하며 핵심을 찌르지(to the point) 못하고 변죽을 울린다는(beat around the bush) 큰 단점이 있다.


유대인으로서 UCLA에서 탈무드를 가르치는 이 다니엘 보야린도 그 예외가 아닌데, 사료리딩이 정확하고 탄탄하며 글맛이 있어서 어쨌든 끝까지 읽게 된다. 서문에 종교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아보려는 것일 뿐인걸요" 라고 학자의 마지막 수단을 취하거나, 왜 기독교와 유대교만 다루고 이슬람은 안 다루느냐는 질문에 "제 분야가 아닌걸요"라고 쉬운 길을 택한다고 하는 부분이 위트있었다.


종교 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에게 필요한 인사이트는 세 가지 였다.

1) 나는 뉴 뭐시기야, 새로운 집단이야, 우리는 달라, 나는 정통!, 나는 새롭지! 하면서 젊은 쇄신이 일어나면 이에 어쨌든 기존 집단도 대응해야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상호 영향을 주면서 시대와 맥락이 상호 구성된다. 


2) 아주 오랜 세월동안 정통이냐 이단이냐 등의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그 근거가 되는 문헌과 용어는 대부분 2-5세기 때 만들어졌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는 그 이전에 이미 형성이 되고 있었던 것.


3) 정통과 이단의 그 사이 어딘가 그레이한 영역에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한 소수 파벌이 있는데 이들도 포함해서 하나의 네러티브를 완성한다. 즉, 보이는 주류 대다수가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 하나의 교단이 택하지 않은 길을 톺아보는 것도 선택한 길을 톺아보는 것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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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배달기사가 GTX-C를 타고 강남 뉴트리니티 섹터를 향해 가던 중 도깨비외 마주칩니다. 기후변화로 태양광발전률이 최근 20퍼 줄은 까닭에 도깨비는 배달기사를 잡아서 안드로이드 강아지에게 전력먹이로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배달기사는 도깨비의 피지컬 AI부하와 승부를 겨뤄 이기게 되면 자신을 놓아달라며 대신 뇌척추인터페이스를 걸겠다고 합니다. 에이아이와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 배달기사는 ..


GTX-C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던 배달기사는 포스트휴먼 사이보그. BCI를 통해 감정모듈 메시지는 블루투스로 전해진다. 사랑하는 고객님 많이 기다리고 있죠? 제가 곧 도착해영 ♡


물류는 대형은 지하화되었고 소형은 드론으로 저공비행해 배달된다. 인간을 가져가는 것은 프레시푸드와 럭셔리류. 고가다.

왕십리를 지나 한강을 지나던 중 전자 안개 발생. 디지털 도깨비 쌔비를 만난다. 쌔비는 그를 잡아 배터리부를 뜯어내 안드로이드 강아지 댕청이의 전력공급원으로 삼으려 한다.


배달기사는 제안한다.


도깨비의 피지컬 AI 부하 도래미와 대결해 이기면 자신을 풀어달라고. 작명 센스 보소. 대신 자신의 척추인터페이스를 건다. 신체 부품이 아니라 대체불가능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데이터 장치인데도.


쌔비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하를 호출한다. 덤벨처럼 생긴 고성능 근육봇이다. 근육은 솔직히 장식이다. 인간성과 기계성의 중간쯤에서 각각을 상징하는 두 존재가 힘과 속도, 효율과 감성으로 맞붙는다.


팔씨름 아니고 발씨름, 퀀텀 배달 속도, 유연한 감정 대면. 기술적으로는 AI가 우위지만, 배달기사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감정으로 기계를 뛰어넘는다. 쌔비의 알고리즘은 정성 앞에서 오류를 일으킨다. 

정성이 뭐지? 싸고 빠르게가 전부 아닌가?

배달기사가 최종 승리. 쌔비는 패배를 인정한다. 댕청이는 충전 없이 꺼지고 배달기사는 척추를 다시 꽂은 채 열차에 올라탄다. 


그는 말한다.


기계는 배달하지만, 사람은 전달하는거야.


와 쌉 갑동.


그 뒤 쌔비는 플랫폼 귀신이 된다. 저승 배달시장에 진출하고 초하루와 윤달에는 휴무. 주3일만 사냥을 나선다. 

그리고 왕과 중세귀족 전문 CS파트를 신설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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