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헌을 많이 읽은 학자는 우리가 쉬이 알 수 없는 사실과 통찰을 과거 사료로부터 꺼내준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대개 글이 만연체에 중언부언(redundancy)하며 핵심을 찌르지(to the point) 못하고 변죽을 울린다는(beat around the bush) 큰 단점이 있다.


유대인으로서 UCLA에서 탈무드를 가르치는 이 다니엘 보야린도 그 예외가 아닌데, 사료리딩이 정확하고 탄탄하며 글맛이 있어서 어쨌든 끝까지 읽게 된다. 서문에 종교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아보려는 것일 뿐인걸요" 라고 학자의 마지막 수단을 취하거나, 왜 기독교와 유대교만 다루고 이슬람은 안 다루느냐는 질문에 "제 분야가 아닌걸요"라고 쉬운 길을 택한다고 하는 부분이 위트있었다.


종교 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에게 필요한 인사이트는 세 가지 였다.

1) 나는 뉴 뭐시기야, 새로운 집단이야, 우리는 달라, 나는 정통!, 나는 새롭지! 하면서 젊은 쇄신이 일어나면 이에 어쨌든 기존 집단도 대응해야하는데 그러는 와중에 상호 영향을 주면서 시대와 맥락이 상호 구성된다. 


2) 아주 오랜 세월동안 정통이냐 이단이냐 등의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그 근거가 되는 문헌과 용어는 대부분 2-5세기 때 만들어졌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는 그 이전에 이미 형성이 되고 있었던 것.


3) 정통과 이단의 그 사이 어딘가 그레이한 영역에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한 소수 파벌이 있는데 이들도 포함해서 하나의 네러티브를 완성한다. 즉, 보이는 주류 대다수가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 하나의 교단이 택하지 않은 길을 톺아보는 것도 선택한 길을 톺아보는 것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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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배달기사가 GTX-C를 타고 강남 뉴트리니티 섹터를 향해 가던 중 도깨비외 마주칩니다. 기후변화로 태양광발전률이 최근 20퍼 줄은 까닭에 도깨비는 배달기사를 잡아서 안드로이드 강아지에게 전력먹이로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배달기사는 도깨비의 피지컬 AI부하와 승부를 겨뤄 이기게 되면 자신을 놓아달라며 대신 뇌척추인터페이스를 걸겠다고 합니다. 에이아이와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 배달기사는 ..


GTX-C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던 배달기사는 포스트휴먼 사이보그. BCI를 통해 감정모듈 메시지는 블루투스로 전해진다. 사랑하는 고객님 많이 기다리고 있죠? 제가 곧 도착해영 ♡


물류는 대형은 지하화되었고 소형은 드론으로 저공비행해 배달된다. 인간을 가져가는 것은 프레시푸드와 럭셔리류. 고가다.

왕십리를 지나 한강을 지나던 중 전자 안개 발생. 디지털 도깨비 쌔비를 만난다. 쌔비는 그를 잡아 배터리부를 뜯어내 안드로이드 강아지 댕청이의 전력공급원으로 삼으려 한다.


배달기사는 제안한다.


도깨비의 피지컬 AI 부하 도래미와 대결해 이기면 자신을 풀어달라고. 작명 센스 보소. 대신 자신의 척추인터페이스를 건다. 신체 부품이 아니라 대체불가능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데이터 장치인데도.


쌔비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하를 호출한다. 덤벨처럼 생긴 고성능 근육봇이다. 근육은 솔직히 장식이다. 인간성과 기계성의 중간쯤에서 각각을 상징하는 두 존재가 힘과 속도, 효율과 감성으로 맞붙는다.


팔씨름 아니고 발씨름, 퀀텀 배달 속도, 유연한 감정 대면. 기술적으로는 AI가 우위지만, 배달기사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감정으로 기계를 뛰어넘는다. 쌔비의 알고리즘은 정성 앞에서 오류를 일으킨다. 

정성이 뭐지? 싸고 빠르게가 전부 아닌가?

배달기사가 최종 승리. 쌔비는 패배를 인정한다. 댕청이는 충전 없이 꺼지고 배달기사는 척추를 다시 꽂은 채 열차에 올라탄다. 


그는 말한다.


기계는 배달하지만, 사람은 전달하는거야.


와 쌉 갑동.


그 뒤 쌔비는 플랫폼 귀신이 된다. 저승 배달시장에 진출하고 초하루와 윤달에는 휴무. 주3일만 사냥을 나선다. 

그리고 왕과 중세귀족 전문 CS파트를 신설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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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병사의 비밀 - 셀럽들의 은밀한 생로병사
KBS 셀럽병사의 비밀 제작팀 지음, 한산이가(이낙준)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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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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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threads.com/@seunghojung_art/post/DLNkmERSbOK?xmt=AQF07WDVc0hjFLthZW0Nh2ieUcUqeJR8ZvP6mhXsSxYtqw



연보랏빛이 깃든 박하색이 서걱이며 표면에 번지는 가운데 해쓱한 붓자국이 한들한들거리며 청람색 물빛 위를 감아돈다. 햇살이 수면 위로 살포시 기어올라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낼 듯하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색이 아닌 기척이 남아, 팔랑팔랑, 살랑살랑, 풀잎도 아닌 것이 그림 위에서 서로를 다정히 어루만진다. 황록색 잎맥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는 하단과, 차분한 유백색과 갈매기회색이 뒤섞여 살짝 서로를 밀며 레몬빛의 플로우를 눌러앉힌 상단이 대조를 이룬다. 청람색이 감도는 흐릿한 터치 사이로는 레몬베이지빛이 얇게 퍼지며 똬리를 튼다. 무용수가 치마단을 들고 무대위를 움직이듯 붓끝을 살짝 들어 캔버스 위를 스쳐간 듯한, 연둣빛이 감도는 맑은 회색이 가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간혹 잘 익은 배색처럼 보이는 바나나빛과 밝은 오크색이 미세하게 배어난다.


공단과 다문화로 유명한 구로의 항동에 서울시 최초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이 자리잡고있다. 삭막한 잿빛 콘크리트의 숲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생태의 숲. 푸른뜨락, 내음두루, 한울터, 돌티나라 같은 낯설면서 아름다운 순우리말 이름들. 드렁허리 같은 희귀한 물고기가 사는 항동저수지를 모네의 수련 구도로 감실감실 그린 정승호 작가의 2025년 회화다.


색이 숨결처럼 번져나가며 그림의 숨구멍이 된다. 초록 한 줌, 노랑 한 자락이 툭툭 떨어지며 맴도는 물비늘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구체도 없고 선도 없거니와, 대신 바람에 젖은 풀잎이 흘러가는 듯한 찰랑임이 있다. 빛이 물러앉고, 어둠이 깃들며, 물감이 비비적거리며 섞인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머무른 맑은 여름빛. 색깔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색 사이의 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할지니. 그림이 보인다기보다 들리는 풍경이다.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며 스트로크는 수면에서 캔버스 정면으로 이동한다. 진부령에서 봤던 2024년 작품들과 같은 회화적 고민의 결이다. 갈피가 없고 산란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고민을 냅다 그림 위에 던졌다. 작품 앞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진실되게. 점차 채도가 짙어지고, 색은 눅진하게 겹쳐진다. 그림의 허리에선, 블루그린과 코발트 계열의 쿨톤이 눌리며 얹히고, 그 틈을 가르듯 연청색과 송홧빛이 반짝인다. 동글게 쌓인 연잎인듯, 황록, 연록, 비취 계열의 다채로운 그린들이 그림을 풍성하게 덧입히고, 붓터치가 도톰한 구획에서는 물푸레빛과 청람색이 팔레트에서 큰 붓에 의해 옮겨져 캔버스 위에 자리잡았다. 좌측 중단과 하단에는 감귤색 터치가 보이는데, 채도가 강하지 않지만 그림 전체를 깨우는 미세한 온기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회화는 자연의 재현이라기보다 전환에 더 가까운 접근이다. 자연의 기억을 시각적 질감으로 환기시키되, 구체적 모사의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풍경에 대한 지긋한 명상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안 보이게 한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와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 화면에는 중심도 없고 고정된 시점도 없다. 위아래도 모호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흐름을 분산시키고, 관객이 하나의 관념적 구도나 중심에 집착하지 않도록 만든다. 위아래 관계없이 그저 흐릿한 어슴푸레함 속에 잎사귀가 퍼진다. 시선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물위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을 걷는 눈길. 단일시점과 과학적 원근법을 배제하고 또렷한 응시대신 존재의 머뭇거림을 유도하는 방식. 그것이 작가의 화두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팔려는 그림이 아니라 살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기가 아닌 무언가는 그릴 수 없는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캔버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지 그림은 무엇인지 고뇌해왔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인상파를 따라 그리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인상파의 삶을 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가 캔버스에서 전해져온다. 붓질은 언뜻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 불규칙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야말로 시선을 붙잡는다. 정승호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기에 고뇌 끝에 나오는 붓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시각의 확산은 감각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물속을 보는가, 수면 위를 보는가, 혹은 빛 그 자체를 응시하는가?


회화는 추상과 인상의 경계에서 붓질을 시각언어화한다. 형태의 묘사보다는 붓의 속도, 압력, 방향, 그리고 색의 겹침이 감정을 전달한다. 예컨대 아까 언급한 좌측하단의 킬링 멜로디 오렌지빛 조각들은 온기와 활기를, 그 아래의 짙은 녹청색 클러스터는 뭉근히 침잠하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외에 모든 붓질에 작가가 느낀 감정들이 스쳐가고 회화는 마치 시각적 일기장처럼 빚어진다. 그리하여 보는 이는 장면에서 서사를 독해하기보다는, 어떤 감각을 통과하거나 통과당한다. 

조화, 구도, 균형, 색채의 구성, 조직화 같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우회하는 대신, 불균질하고 비정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스트로크의 스타카토 리듬, 오른쪽으로 약간 쏠려있는 비대칭적 구획, 불투명과 투명이 공존하는 색배합이 밴드의 잼세션을 닮았고 시각적 재즈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보는 이는 색을 읽기보다 색 사이를 건너뛴다는 점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리는가,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회화가 어떻게 사유되는가에 대해 그림이 우리에게 재삼 질문을 던진다. 나름 답하였으되, 끈덕지게 계속 물어본다. 색채는 대상의 피부가 아니라 정신의 흔적으로 마음의 눈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작가는 수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수면과 감각 사이에 떠도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으므로, 보는 자는 작품의 표면 위에서 머무르지 말고, 시각적 표피를 투과해, 붓질이 남긴 지층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한꺼풀 더 보인다. 그림을 즉물적 이미지로서 소비하기보다, 자신을 던져 감각과 사유가 엇갈리는 장소로서 대우해야한다.


그런 연유로, 이건 연못이 아니다. 풀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항동의 자연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실제를 따라하지 않은 이 회화가 우리 기억 속에 새근새근 살아숨쉬던 추억 속의 무언가를 더듬는다. 적확한 풍경을 모사하는 자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선명하게 그리지만, 이 그림은 오히려 그 안개를 머금은 채 둥둥 떠다니는 까닭이다. 모사가 아니라 모색인 것이외다. 기억의 껍질을 쓸어내며 새로운 풍경의 형상을 짓고 있다.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꿈의 살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붓끝이 남긴 자국은 흡사 들숨과 날숨의 아름거림, 곱디고운 속삭임, 혹은 잊힌 기억의 외마디, 혹은 떠도는 감정의 자락, 혹은 빛과 물과 공기가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보는 이는 보면서 안에 잠긴다. 


그림을 말로 옮길 때 비평가는 구조를 따지고, 문학가는 마음의 결을 헤아린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생각 속에 사로잡혀 글을 남긴다. 정승호 작가의 그림에 대한 생각은 이론와 에세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차분한 혼란이다. 나는 이 인상을 명확히 설명할 수도 완전히 침묵할 수도 없다. 그저 회화를 바라볼 뿐. 붓이 남긴 색덩이들을 하늘하늘 따라걷다 보면, 그 끝에 말을 잃고야 만다. 그 순간, 해석과 상상이 협업하는 시가 시작된다.


그림이 나를 물가로 이끌지 않고, 물속으로 자빠뜨린다. 일반적인 그림 감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감각과 감정, 언어와 무언이 뒤섞인 하나의 인상체험이다. 그림은 풍경의 외피가 아니라 내면의 풍경, 몸 안쪽에 자리한 꿈자리 같은 것이다. 보고 싶으면, 보지 말고, 눈을 감고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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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더러운 돈에 손대지마라> 봤다. 비운의 창고영화로, 7년 묵힌 영화다. 물류창고 컨테이너 보관기간도 3년이 최대고, 심지어 인삼도 7년 이상되면 썩는다는데. SNL 숏폼 트렌드도 몇 주면 바뀌는 세상에 7년을 묵은 비운의 창고 영화다.


1. 구체적으로 왜 7년이냐? 찾아보니

2018년 12월에 크랭크인했는데

2019년 3월에 크랭크업하고 5년 7개월만인 2024년 10월에 개봉하고 8만5천명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안은 채

2025년 6월에 세컨드런으로 넷플릭스에 넘어왔다


2. 연기는 좋다. 특히 김대명의 연기가 준수하다.


3. 유태오 배우가 중국 범죄조직 보스의 똘마니로 도살 전문 망나니로서 도끼칼을 들고 고광석(허동원 분)을 막 베는 장면이 있는데

유태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2022년 헤어질 결심(박찬욱 감독), 2023년 패스트 라이브즈(셀린 송 감독)보다 훨씬 더 어렸을 시절이다.


영화가 얼마나 타이밍이 늦었는지, 그 기간 동안 사람이 얼마나 자랐는지, 시간이 지나며 얼마나 얼굴이 성숙해갔는지 볼 수 있다. 유태오가 이렇게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포스터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단역이다.


4. 한창 2017년 즈음에 개봉했으면 범죄드라마, 느와르, 액션 스릴러 그리고 범죄경찰의 피카레스크극으로서 재밌었겠지만 코로나의 타격으로 시절을 많이 잃었다.


5. 인천 화교나 중국 범죄 조직에 대한 스테레오타입도 문제지만, 한국에 넘어온 중국 범죄조직보스의 중국어가 너무 형편이 없다. 한국인 배우인 것이 너무 티난다. 거의 페이퍼타올이 요기잉네 수준이다


6. 극의 진행이 중간부분부터 힘을 잃는다. 동기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고 관객에게 그 설득력을 잃은 까닭이다. 특히 메인캐릭터의 중간 행동전환은 납득이 잘 안된다. 무엇보다 아이 수술비 마련이라는 모든 행동의 이유가 너무 올드하다는 것이 함정. 캐릭터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다 이 선량하고 어린 아이의 비싼 수술비를 마련해야하는 당위성에서 비롯되는데

과연 아이는 무조건 선한가? 개인적 불행이 사회적 범죄를 정당화하는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7.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처럼 느와르의 엔딩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해외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헬조선을 탈출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동남아 휴양지에서 40억 플렉스하면서 살고 싶은 한국인의 꿈처럼 느껴진다.


8. 8. 영화에서는 공중전화가 등장한다. 핸드폰을 버리고 도망치는 형사가 주인공과 연락하기 위해 사용한다. 아직도 재난 등 공공적 필요에 의해 공중전화를 유지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 듯하다. 특히 MZ세대 중에 공중전화를 사용해 본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일단 동전을 안 들고 다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다. 그래도 10년대까지는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로 공중전화를 이용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역사 안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공중전화신이 과연 오늘날 대중에게 소구력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공중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스마트폰으로 찾아야할 정도일 듯한데. 무엇보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통신매체의 발달은 사람들의 소통방식뿐 아니라, 영화 속 연락장면의 연출방식도 함께 바꿔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삐삐와 공중전화의 시대는 5091(오늘밤에 전화해줘)를 받고 공중전화에서 집전화로 연락했다. 영화에서는 상대를 다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이 많았다. PC통신과 삐삐를 통해 익명으로 소통하면서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는 서사인 <접속>이 대표적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선 공중전화를 통해 만나고, <올드보이>에서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술 취한 채 가족하고 통화하다가 머리를 가격당하고 사립 감옥에 갇힌다.


이후 벽돌폰이 등장하면서 이동 중에도 통화가 가능해졌지만 메시지 전송은 제한적이어서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감정을 전했다. 애니콜 시대에도 한 달 요금제에 따라 문자 알 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긴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낼 수 없었다. 카톡과 완전히 다른 감성이다. 게다가 이때는 지금의 자판형 키보드 쿼티와는 달리 버튼 하나에 여러 글자가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지로 버튼을 여러 번 눌러서 기호를 입력해야했다. <봄날은 간다>나 <클래식>에서 영화 속 연인들은 몇 번이나 버튼을 눌러 잘 자 한마디를 보내곤 했고 이런 짧은 시적 한 마디에 많은 감정과 의미를 부여했다. 또, 답장이 오기까지의 간절한 기다림이 극의 긴장감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 통신매체의 발달은 커뮤니케이션기술, 도구 제도의 발전이면서 동시에 생활양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사람이 감정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리듬, 속도, 거리감, 기다림에 관여하고 관계의 진정성과 만남의 피상성 등을 함께 변화시킨다. 이러한 소통의 모습이 옛 영화 속 연출방식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의 시대. 영상통화, 실시간, 무제한, 장문의 메시지, SNS에, GPS 위치공유까지 연락방식은 다양해졌고, 이에 맞춰 영화 속 등장인물 간의 연락방식, 관계 거리감도 달라졌다. 지금은 필요하면 바로 연락하고, 연락을 안 받으면 "아이씨 왜 전화 안 받아!"라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접속> <클래식> 때는 상상할 수 없던 대사다. 느리게 다가오던 감정의 고조 대신 즉각적 반응과 끊임없는 연결이 새로운 서사의 리듬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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