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s://www.threads.com/@seunghojung_art/post/DLNkmERSbOK?xmt=AQF07WDVc0hjFLthZW0Nh2ieUcUqeJR8ZvP6mhXsSxYtqw
연보랏빛이 깃든 박하색이 서걱이며 표면에 번지는 가운데 해쓱한 붓자국이 한들한들거리며 청람색 물빛 위를 감아돈다. 햇살이 수면 위로 살포시 기어올라 귀를 간질이는 소리를 낼 듯하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색이 아닌 기척이 남아, 팔랑팔랑, 살랑살랑, 풀잎도 아닌 것이 그림 위에서 서로를 다정히 어루만진다. 황록색 잎맥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는 하단과, 차분한 유백색과 갈매기회색이 뒤섞여 살짝 서로를 밀며 레몬빛의 플로우를 눌러앉힌 상단이 대조를 이룬다. 청람색이 감도는 흐릿한 터치 사이로는 레몬베이지빛이 얇게 퍼지며 똬리를 튼다. 무용수가 치마단을 들고 무대위를 움직이듯 붓끝을 살짝 들어 캔버스 위를 스쳐간 듯한, 연둣빛이 감도는 맑은 회색이 가늘게 떠 있고, 그 사이로 간혹 잘 익은 배색처럼 보이는 바나나빛과 밝은 오크색이 미세하게 배어난다.
공단과 다문화로 유명한 구로의 항동에 서울시 최초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이 자리잡고있다. 삭막한 잿빛 콘크리트의 숲 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생태의 숲. 푸른뜨락, 내음두루, 한울터, 돌티나라 같은 낯설면서 아름다운 순우리말 이름들. 드렁허리 같은 희귀한 물고기가 사는 항동저수지를 모네의 수련 구도로 감실감실 그린 정승호 작가의 2025년 회화다.
색이 숨결처럼 번져나가며 그림의 숨구멍이 된다. 초록 한 줌, 노랑 한 자락이 툭툭 떨어지며 맴도는 물비늘처럼 화면을 가로지른다. 구체도 없고 선도 없거니와, 대신 바람에 젖은 풀잎이 흘러가는 듯한 찰랑임이 있다. 빛이 물러앉고, 어둠이 깃들며, 물감이 비비적거리며 섞인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머무른 맑은 여름빛. 색깔이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색 사이의 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할지니. 그림이 보인다기보다 들리는 풍경이다.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며 스트로크는 수면에서 캔버스 정면으로 이동한다. 진부령에서 봤던 2024년 작품들과 같은 회화적 고민의 결이다. 갈피가 없고 산란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고민을 냅다 그림 위에 던졌다. 작품 앞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진실되게. 점차 채도가 짙어지고, 색은 눅진하게 겹쳐진다. 그림의 허리에선, 블루그린과 코발트 계열의 쿨톤이 눌리며 얹히고, 그 틈을 가르듯 연청색과 송홧빛이 반짝인다. 동글게 쌓인 연잎인듯, 황록, 연록, 비취 계열의 다채로운 그린들이 그림을 풍성하게 덧입히고, 붓터치가 도톰한 구획에서는 물푸레빛과 청람색이 팔레트에서 큰 붓에 의해 옮겨져 캔버스 위에 자리잡았다. 좌측 중단과 하단에는 감귤색 터치가 보이는데, 채도가 강하지 않지만 그림 전체를 깨우는 미세한 온기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회화는 자연의 재현이라기보다 전환에 더 가까운 접근이다. 자연의 기억을 시각적 질감으로 환기시키되, 구체적 모사의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 풍경화이면서 동시에 풍경에 대한 지긋한 명상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안 보이게 한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와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 화면에는 중심도 없고 고정된 시점도 없다. 위아래도 모호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흐름을 분산시키고, 관객이 하나의 관념적 구도나 중심에 집착하지 않도록 만든다. 위아래 관계없이 그저 흐릿한 어슴푸레함 속에 잎사귀가 퍼진다. 시선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물위를 내려다보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을 걷는 눈길. 단일시점과 과학적 원근법을 배제하고 또렷한 응시대신 존재의 머뭇거림을 유도하는 방식. 그것이 작가의 화두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팔려는 그림이 아니라 살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기가 아닌 무언가는 그릴 수 없는 사람이기에, 오랫동안 캔버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지 그림은 무엇인지 고뇌해왔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인상파를 따라 그리는 테크니션이 아니라 인상파의 삶을 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한 생각의 실타래가 캔버스에서 전해져온다. 붓질은 언뜻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 불규칙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야말로 시선을 붙잡는다. 정승호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기에 고뇌 끝에 나오는 붓질은 선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고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시각의 확산은 감각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물속을 보는가, 수면 위를 보는가, 혹은 빛 그 자체를 응시하는가?
회화는 추상과 인상의 경계에서 붓질을 시각언어화한다. 형태의 묘사보다는 붓의 속도, 압력, 방향, 그리고 색의 겹침이 감정을 전달한다. 예컨대 아까 언급한 좌측하단의 킬링 멜로디 오렌지빛 조각들은 온기와 활기를, 그 아래의 짙은 녹청색 클러스터는 뭉근히 침잠하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외에 모든 붓질에 작가가 느낀 감정들이 스쳐가고 회화는 마치 시각적 일기장처럼 빚어진다. 그리하여 보는 이는 장면에서 서사를 독해하기보다는, 어떤 감각을 통과하거나 통과당한다.
조화, 구도, 균형, 색채의 구성, 조직화 같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우회하는 대신, 불균질하고 비정형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스트로크의 스타카토 리듬, 오른쪽으로 약간 쏠려있는 비대칭적 구획, 불투명과 투명이 공존하는 색배합이 밴드의 잼세션을 닮았고 시각적 재즈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보는 이는 색을 읽기보다 색 사이를 건너뛴다는 점에서.
작가가 무엇을 그리는가,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회화가 어떻게 사유되는가에 대해 그림이 우리에게 재삼 질문을 던진다. 나름 답하였으되, 끈덕지게 계속 물어본다. 색채는 대상의 피부가 아니라 정신의 흔적으로 마음의 눈으로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인다. 작가는 수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수면과 감각 사이에 떠도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으므로, 보는 자는 작품의 표면 위에서 머무르지 말고, 시각적 표피를 투과해, 붓질이 남긴 지층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한꺼풀 더 보인다. 그림을 즉물적 이미지로서 소비하기보다, 자신을 던져 감각과 사유가 엇갈리는 장소로서 대우해야한다.
그런 연유로, 이건 연못이 아니다. 풀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항동의 자연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실제를 따라하지 않은 이 회화가 우리 기억 속에 새근새근 살아숨쉬던 추억 속의 무언가를 더듬는다. 적확한 풍경을 모사하는 자는 뿌연 안개를 걷어내며 선명하게 그리지만, 이 그림은 오히려 그 안개를 머금은 채 둥둥 떠다니는 까닭이다. 모사가 아니라 모색인 것이외다. 기억의 껍질을 쓸어내며 새로운 풍경의 형상을 짓고 있다. 정지하지 않고 흐르는 꿈의 살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붓끝이 남긴 자국은 흡사 들숨과 날숨의 아름거림, 곱디고운 속삭임, 혹은 잊힌 기억의 외마디, 혹은 떠도는 감정의 자락, 혹은 빛과 물과 공기가 서로를 닮아가는 풍경. 보는 이는 보면서 안에 잠긴다.
그림을 말로 옮길 때 비평가는 구조를 따지고, 문학가는 마음의 결을 헤아린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생각 속에 사로잡혀 글을 남긴다. 정승호 작가의 그림에 대한 생각은 이론와 에세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차분한 혼란이다. 나는 이 인상을 명확히 설명할 수도 완전히 침묵할 수도 없다. 그저 회화를 바라볼 뿐. 붓이 남긴 색덩이들을 하늘하늘 따라걷다 보면, 그 끝에 말을 잃고야 만다. 그 순간, 해석과 상상이 협업하는 시가 시작된다.
그림이 나를 물가로 이끌지 않고, 물속으로 자빠뜨린다. 일반적인 그림 감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감각과 감정, 언어와 무언이 뒤섞인 하나의 인상체험이다. 그림은 풍경의 외피가 아니라 내면의 풍경, 몸 안쪽에 자리한 꿈자리 같은 것이다. 보고 싶으면, 보지 말고, 눈을 감고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