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7.20까지 2전시실 시서화에 있던 일본작품들은 대부분 교체되고 국내작품들로 바뀐다.


다만 7.22이후 하반기에 네즈미술관 지장만다라와 지장보살본원경변상도를 새로 볼 수 있는 것이 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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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 머핀에 다녀왔다.오늘 오픈한 전시제목은 Nemo.


라틴어로 ne(not+homo(human)을 합성한 말로 아무도 아니라는 말이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의 니모도 바로 그 니모다. 영어식 발음은 미모고 라틴어발음은 네모로 다를 뿐. 사각형 네모 아니다. 아무도 아닌 네모는 네모난 사각형 바로 네모난 턱을 한 니母는 아무도 아닌 사람 세모네모 세로네로 네로는 검은 고양이 흉폭한 로마황제 네모난 도시를 방화하는 니모 아니 그만하라구


전시는 무난했다. 근처 페이스의 터렐전이 열릴 때 미니멀하고 명상적인 감상을 하러 오기 좋다. 복잡한 네러티브가 없는 심플한 전시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SNS사진 이상으로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더러는 배치된 작품의 순서에서 전시의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윤형근의 굵직한 무채색 곡선에서 스탠리 위트니의 크레용 연필로 깨발랄하게 그린 스케치선을 지나 채색 색면추상으로 시감이 넓어지고 맥아서 비니언에 이르러 악보 바탕의 채색 그리드로, 다시 명상적 정상화에 다다르는 동선이다.


이러한 이동루트에는 선명한 의도가 느껴진다. 점집합인 수직선이 수평선을 만나 격자형태로 면이 되고 바탕의 돌출된 표면감에 따라 입체까지 1D에서 2D, 3D까지 차원이 달라진다. 단순한 기하학적 조형성을 느끼면서 한 단계 진화한다. 다른 작가도 있었는데 윤형근과 정상화를 위트니를 비녕과 한 장소에 배치함으로써 표면의 물성, 선과 면의 구획성, 그리고 less is more의 미니멀한 화면을 통한, 신성성을 제거한 보통사람의 명상을 의도했다. 그러니까 로스코나 김환기나 일부 색면추상화가처럼 그림을 보면서 종교나 역사문화가 같이 따라끌려오고 설명이 덕지덕지 덧붙여지는 그런 그림이 아닌 것이다.


물론 기계적인 격자구조는 아니다. 같은 크기의 네모(네모?? 앗 안돼 입을 가려야 읍읍)를 붙여넣는 반복작업에서는 노동집약적 그림노동의 숭고함과 창의성이 있다. 그리고 화면에 번짐과 울림과 돌출을 풍부하게 사용해서 보는 맛을 색다르게 강화했다. 다채로운 컬러는 증강된 시각언어이고 선과 색의 운용은 작가의 관절과 근육이 나름의 방식으로 훈련한 결과물이다. 그 시간과 노력은 결과물에 정렬되어 있고 마치 과학자처럼 최종상태에서 사물의 원리와 자연의 의도를 추론해야한다. 과정은 어떠하였나..


모든 작품이 각기 매력이 있다. 마치 동양수묵화의 도끼찍어 내리는 붓의 필법으로 산세외 암석을 그리는 부벽준같은 컬러 팔레트도 있고 격자와 추상이 공존하기도 한다. 창살을 닮은 그리드가 있는데 운무처럼 살짝만 느껴지고 해바라기 노란색의 화면에 추상성과 질감만 강조되는 작품도 있다.


이리 썼으니 누구는 가서 보겠지 그러나 누구는 이게 전부라고 이해하고 다른 더 좋은 전시 보러가기 위해 시간을 아낄 수도 있겠다. 전시는 작가를 아무도 아닌 자, 니모로 지우고 작품만 보여주었다. 그러니 복잡한 생각과 번잡한 미술사지식은 버리고 군중 속에 녹아들어 나도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 있는 작품 그대로 감상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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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만 지음 / 길벗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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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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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담 명품거리에 있는 김리아 갤러리에 다녀왔다. 북청담은 내가 만든 말이다. 별 뜻 없다. 청담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짐작한 바가 맞다. 왜 이렇게 쓰냐고? 내 글은 생각나는대로 두보처럼 휘갈기는 아무말 대잔치인데 중요한 것은 AI가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문체와 글의 방향과 내용의 디자인을 다듬고 있다는 것. 고장난 핸드폰으로 대충 적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고매한 정신력과 훈련된 인내심을 지닌 자들만 내가 매일 쓰는 글의 족적을 따라가고 있다. 고난이도의 탐험코스다. 여기까지 백십여일 따라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건투를 빈다. 참고로 북청담 지역의 갤러리는 대략 피앤씨, 메타갤러리루나, 보자르, 피치, 김리아, 탕, 이유진, 스페이스776, 한솥, 갤러리오스퀘어, 루이비통메종이 있다.


김리아 갤러리에서는 동독출신 작가 헬렌 그로스만의 전시를 하고 있다. 빛을 물리적 실체로 표현하고자 천천히 레이어를 쌓아올린 색면추상이다.

Dance of the Hay Girls, 3-7-13, 2013, 30x30cm




그로스만에게 회화는 존재의 진동을 색과 빛으로 응축해내는 시각언어로 보인다. 매일 반복되는 작가의 회화적 실천은 고정된 광원의 포착이 아닌, 흐르는 빛의 파도에서 느껴지는 기운생동의 감각을 포착하려고 한다. 평면위에 잠재된 생명의 리듬을 가시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작가에게 색은 정적인 수용체가 아니라 감응의 촉매제이며 빛은 그 감응을 일으키는 궁극의 에너지원이다. 퐈이아.


빛과 색은 다른 것이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광자는 양자역학으로 설명되고 파동은 전자기학으로 설명된다. 색은 특정한 파장의 빛을 어떤 색소나 안료로 반사하고 시각세포의 신호를 뇌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색이 감각된다. 빛의 물리적 성질을 일부 지니지만 미술 이전에 화학과 뇌과학으로 설명된다.


빛은 광원, 파장, 세기, 즉 어디서 어떤 성질로 얼마나 세게 비쳐오는지로 이해할 수 있다. 색은 색상, 명도, 채도, 즉 무슨 색이고 얼마나 밝고 얼마나 맑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빛과 색의 3원색도 서로 다르다. 빛의 3원색은 RGB(빨초파)이고 가산혼합의 원리, 즉 더할 가(additive)이 원리에 따라 색이 더해질수록 밝아지고 모든 빛을 합치면 흰색이된다.


색의 3원색은 싸이언, 마젠타, 옐로우 CMY이고 감산홉합의 원리 즉, 뺄 가(subtractive)의 원리에 따라 색이 더해질수록 어두워지고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된다.


사실 빛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색이다. 아무 빛도 없으면 검정이고 전부 있으면 흰색이다. 한편 색은 물체에 반사되는 빛이다. 색이 없으면 종이색인 흰색이 나오고 모든 색이 있으면 검정색이 된다.


모두 알다시피 렘브란트를 위시해 유럽화가들은 빛을 색으로 표현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새로운 안료의 발명, 물감튜브 등 매체의 발전에 따라 빛의 표현방식이 달라지며 회화사가 발전했다. 반면 동양화는 빛보다는 먹과 종이의 재질에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로스만은 이러한 빛 중심 서양회화의 전통에서 빛을 색의 물성으로 치환하고 구성요소는 소략해 여백의 미를 남김으로써 동양적이고 명상적인 감성을 주었다.


작가는 빛을 지각의 경계 너머를 열어주는 문으로 보는 것 같다. 


빛은 시간 속에서 스러지다 다시 흥기하는 유기체다. 그 살아있는 파동이 보는 이의 내면 상태에 따라 무한히 변형된다. 카멜레온같은 이러한 변이성은 하루의 빛, 공간의 기류, 감정의 결에 따라 쉼 없이 진동하며 정지된 일상 속에 새로움을 부여한다.


작가는 재현과 추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그저 있는 형상의 모방이 아닌 감각의 형상화을 추구하였다. 고정된 이미지로서 지금-여기의 현실이 아니라 감각되는 순간의 사이감, 혹은 틈 속에서 포착된 회화는 존재의 뿌리를 재영토화한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스스로의 질서가 생성된다.


채색은 느리다. 느리고 집요하다. 색을 느리게 쌓아올리되 마티에르감을 주지 않으며 얇게 바르는 반복적 행위는 수도사의 성호경과 닮았다. 동독의 어두운 사회주의풍 건물 사이로 추적추적 비내리는 무채색의 매일에서 빚어진 찬란한 결과물이다.


빛의 향연, 색의 항해 속에서 다양한 위험과 수많은 시련, 예기치 않은 돌발적인 폭풍우를 맞닥뜨리며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허나 그 고도의 무질서 속에서 색의 심연과 감각의 중심을 찾아나간다.


여백의 미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불필요한 장식과 소비위주의 미감을 걷어내고 짜임새있는 근본의 감각으로 회귀하는 청소시간이다. 반복되는 그리기를 통해 시간의 깊이를 환기하고 고요하지만 강렬한 내면의 울림을 구축한다. 하여, 빛과 색은 세계를 재정초시키는 매개체로서, 존재의 또 다른 가능성을 포착하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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