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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크레인에 다녀왔다. 평창 일대는 주기적으로 방문해야하는 갤러리 성지다. 상명대박물관-가나아트센터-크레인-OKNP-세줄-자인-누크-김종영-삼세영-모리스-김보성 등으로 연결되는 동선이 완벽하다. 이어령 산책길을 따라 키미아트-영인문학관-갤러리2로 빠지는 분기점도 있다. 그리고 환기미술관과 석파정 있는 부암동을 거쳐 서촌으로 가면 스무 군데 이상 들릴 수 있다. 아주 촘촘히 다니자면 도암-중정-화정에, 동선이 복잡한 퀄리아, 자브종, 씨앤케이도 있고, 내려오면서 김달진박물관1층, 본+웅(같은 건물), 두루아트스페이스, 비엔에스, 라온을 다 거쳐서 석파정에 이를 수 있다. 환기미술관 앞에도 하랑과 에이라운지가 있고, 멀리는 등산루트와 진배없는 자하와 목석원도 있다. 하루에 다 돌기엔 버겁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크레인 첫 전시는 아토, 두 번째는 오경훈, 이번 세 번째는 오타인데 뭔가 작가 이름에 반복되는 모음과 라임이 보인다. 우연의 일치.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는 시각적 진동이다. 개관전 <인앤양>의 입구에 걸린 기하학적 문양의 반복과 수묵화적 스트로크 회화에서 시각적 진동이 느껴졌으며, 그 다음 팝아트적 스타일이 돋보이는 오경훈의 그림에선 빛의 광선이 분홍색의 파스텔 색감과 함께 부각되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울트라마린의 시원한 느낌으로 다스리려는 듯한 이번 오타작가의 전시는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삼원색 트라이어드가 특징이다. 프탈로 시안과 퀴나크리돈 마젠타와 카드뮴 오렌지로 보이는 세 가지 색의 고채도 병치가 무더운 열기를 냉각시키는 듯 강하게 시각적으로 진동한다.
또한 조형을 붙잡고 있는 듯한 형광빛 윤곽선은 마치 무대 위의 검은 암전 속에서 홀로 번쩍이는 출구 표지판 같기도 하다. 채도와 색상을 입체감을 만드는 작가 특유의 조합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빛과 색은 엄연히 다른 분류체계인데 색감으로 빛의 음영을 창의적으로 표현했다.
반전된 명도와 밝은 채도가 화면 전체를 경계 지으며 관객의 시선을 오브제로 유도해서 망막에는 얼굴과 손의 따뜻한 테두리가 각인된다. 보랏빛 반사광과 냉색 베이스로 입 속 가득히 쿨감이 느껴진다. 상쾌한 레몬빛이 팝팝거리며 안팎을 가르는 발광적 울타리로 작동한다. 외부의 힘이 내부를 잔잔히 형성하는데 콘트라스트에 집중하고 잇으면 안이 바깥에 의해 조여지고 다시 바깥은 안에 의해 호명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형광빛 윤곽선은 표피가 아니라 골격이며 색채의 흐름을 붙들어 두는 일종의 긴장된 신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형광빛 윤곽선이 소성하는 차가운 불꽃의 울분, 압박하는 투명한 쇠사슬의 속삭임, 찬란히 빛나는 늪의 윤리. 짙은 남색은 화면의 바닥에서 조용히 소환되어 검푸른 물결처럼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 위로 흘러내린 핑크다홍빛 얼룩은 불현듯 툭하고 떨어진 석류 알맹이 같다. 선은 직선이라기보다는 휘익 몸을 틀며 휘어지는 바람의 곡선같고 그렇게 스트로크의 바람을 따라 다다른 어느 색의 엣지에서는 가느다란 실선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간다. 흡사 유약이 번지는듯 가장자리에 엷게 퍼진 터치에서는 촉촉한 흙냄새 섞인 습기가 감지된다.
보는 이는 그림에서 우선 색이 겹쳐지는 경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시간대 두 개가 어긋나며 만들어낸 얇은 균열이 숨어 있다. 또 손끝이 종이를 더듬듯 눈으로 선을 따라가다 보면 파동같은 질감에서 작가의 즉흥적 호흡을 함께 느껴볼 수도 있다. 본다는 것은 살아 있는 행위의 기록이어라 그 신비여
훌륭한 문학작품에서 서로 맞물릴 리 없는 단어들이 강제로 한 자리에 배치될 때 독자는 낯섦에 걸려 넘어지고 그 걸려짐 속에서 새로운 읽기의 문턱을 발견한다. 고정된 언어의 조합을 흩트리는 순간 우리는 사고의 문법을 다시 짜맞추게 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컬러와 오브제의 나이브한 조합과 관습적인 모둠을 혁신하는 작가의 창의적인 재배치는 우리에게 그림을 읽어내는 시각적 문법을 전면 재검토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한때 두껍게 내려앉던 묘사와 서사의 중량감은 이제 오타의 그림들 앞에서 맥없이 풀린다. 전시장에는 마치 차가우면서 따뜻한 빛과 색이 공간을 풍윤하게 감싸고 있다. 신비화(fetishism)된 회화는 소소한 일상의 사물들을 기호의 제단에 올려놓으며 또 다른 감각의 성소를 구축한다.
이 작업에서 남다른 것은 재현의 정직함보다는 표면의 파장이다. 색의 진동은 함부르크 항구의 사이렌처럼 웅웅 울리고 필획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대처럼 요동친다. 인물의 눈은 가만히 응시하는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붓질의 떨림에서 차이와 반복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보는 이는 결코 같은 색을 두 번 본다고 느끼지 않을 거다. 색 배치는 정서의 교환값으로서 형상과 나 사이에 존재론적 의미장을 짜임새있게 설치한다. 핑크빛 살갗과 시안의 음영은 늘 다른 조율로 나타나고 하이라이트의 흰 점은 매 순간 새로이 번쩍인다.
흔히 팝아트를 그저 소비 이미지의 반영으로 읽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당대 도시인의 생필품 아아가 카라바죠 성화의 제물처럼 빛나고 흔한 건조대에 걸린 빨래가 하늘과 땅을 잇는 축처럼 번쩍인다. 일상은 비천한 것이 아니라 의례적 행위로 승격된다. 삶의 사소한 사물이 환생한다. 회화 속 평범한 소품은 찬란한 청춘을 찬미한다.
아도르노가 음악에서 소박한 리듬을 통해 사회적 진동을 감지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김애란이 일상 묘사에서 사회학적 풍경을 짚어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오타 작가는 팝회화의 장르적 장난을 빌려 스마트폰 빛과 이미지의 즉시성을 재현한다. 두터우면서 명랑한 빛의 파동, 경쾌하면서도 무거운 냉감, 얇으면서도 깊은 모순의 공존을 느낀다. 각기 다른 리듬을 가진 시계처럼 작품은 우리 감각을 다시 짜맞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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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을 자세히 보면 깊이와 평면이 동시에 주어지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발랄하게 붉은 윤곽선은 형태를 딱 잘라내면서 다시 내부의 차분한 청색 그림자가 그 잘린 흔적을 지워버린다. LP판의 리듬과 비눗방울의 생동을 보라. 경계는 또렷하면서도 물결처럼 흔들린다. 롤랑 바르트라면 풍크툼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마음을 찌르는 순간의 감각이라는 뜻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를 언급했겠다. 보는 이는 안정된 형태와 의젓하게 부서지는 표면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작가의 형광빛 윤곽선은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테두리와 다르고, 장미셸 바스키아의 날 선 드로잉과도 다르다. 곧 DDP에서 전시를 할 바스키아의 거친 낙서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분출과 같다면 이 작품의 림라이트는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단백질 박막을 봉쇄하는 생물학적 힘에 가깝다. 형태 안의 색이 있다는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을 뒤집어 색 위의 형태라는 전도된 질서를 창안했다고 본다.
20세기 회화사 속에 위치시켜보자면 칸딘스키의 영적 추상과도 닮은 부분이 있고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흔적의 찌그러진 인체성과도 은근히 호응하는 것 같다. 선은 마티스의 자유로운 드로잉을 연상시키면서도 색은 로스코의 명상적 색면보다는 되려 한국 단색화의 농묵 같은 번짐에 비근하다.
전통적 서양 회화의 직선적 발전사 속에 끼워 넣을 수 없는, 역사 앞에 똑바로 선 개인의 이질성은 오히려 동아시아 회화의 여백의 필연성과 상호작용할 때 더 뚜렷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서구 모더니즘의 문법을 빌리되 그 기원을 탈주하여 낯선 계보를 형성한다. 비평적으로 본다면 컨템포러리 글로벌 아트시장이 요구하는 혼합적 정체성의 변주의 일환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익숙한 언어들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혁신적이면서 순응적인 저항의 방식이다.
감상자에게 제안되는 관찰 포인트는 명확하다. 색채가 아니라 그 색을 잠가두는 빛의 울타리를 먼저 바라볼 것. 그리고 그 빛이 단순한 선이 아니라 화면의 호흡을 한껏 조여 매는, 일종의 형광적 족쇄임을 알아차릴 것. 그러면 그림을 보는 나에게 공간을 휘감는 모든 전시경험이 내 안에 투영되어 몸과 정신을 동시에 휘감는 조형적 구속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각은 육체에 스며든 세계의 촉감이자 체화된 사유라는 메를로퐁티의 말을 전시경험을 경유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감정의 무늬를 기록한 낙서이자 시각적으로 호흡하는 맥박으로서 오타의 회화는 감각의 배후에서 남몰래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실험적 문서다. 하여, 보는 이는 증거를 판독하는 탐문자처럼 작품 앞에 서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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