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의 효령대군 이야기다.
세종실록112권, 세종 28년 4월 23일 경신 3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처음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회암사(檜岩寺)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역시 들에 가서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절안[寺內]에서 구었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5, 6월 이엄(耳掩)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매,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孝寧無以對)
효령이 장차 이 절에서 회(會)를 베풀려고 하여 승도(僧徒)들을 모아 시를 짓게 하고, 중[僧] 만우(卍雨)로 하여금 등수를 매기게 하였는데, 한 중이 이르기를,
"효령 대군 미륵신(孝寧大君彌勒身)이라"
하였다. 효령이 병(病)이 있어서(有疾) 아무리 더운 때라도 항상 모이엄(毛耳掩)을 쓰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1. 효령대군은 한여름에도 털로 된 귀덮개 모자 이엄을 쓰고 있었다. 중이 지은 시는 운율의 정밀성으로서가 아니라 비유로서 의미가 있다. 머리에 관(冠)을 써 귀를 덮거나, 귀가 길게 내려온 모습으로 묘사되는 미륵보살과 귀덮개 쓴 외형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국중박 반가사유상도 미륵이다.
2. 그런데 몸이 아파서 썼다니 무슨 병일까? 가려야만하는 피부병일까? 몸이 차다해도 왜 귀만 가렸을까? 정치적 무관심과 은둔의 상징일까?
3. 양녕대군이 영험의 증거가 없고 효령대군의 실질적 병을 해결해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佛如有靈, 君之五六月耳掩, 何不爲脫之乎)
효령대군이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은(孝寧無以對)
형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고, 대답해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반박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깨달음과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과 현실적 쾌락을 쫓는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804023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