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2-25.03.09] 마리아 스바르보바 : 어제의 미래

[25.02.26-25.10.12] 카와시마 코토리 개인전 - 사란란


1. 

사란란은 일본인 작가가 한국어의 사랑과 사람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껴 나름 제목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체코-슬로베키아 사람이다.


일본 전시가 귀여움, 동유럽 전시가 향수를 말하지만, 두 테마는 사실 연결된 것이다. 귀여움을 이야기하면서 향수를 말해야하고, 향수를 말하면 귀여움을 말해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여움의 구현대상인 어린아이가 어른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귀여운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귀여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일부분 결합된 감정이다.







2. 둘 다 귀엽고 예쁜 아이를 카메라에 담았지만, 일본인과 동유럽인이 생각하는 귀여움이 다르다.







사란란전에서 카와이 미학에 뿌리를 둔 일본적 귀여움이 보인다. 작고 앙증맞은 요소들. 동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성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적 장치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전시를 보러와서, 자신들이 아닌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이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카와이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동유럽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현대적 미니멀리즘을 결합하여, 정제된 색감과 절제된 표정을 통해 차가운 귀여움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시대에는 개인의 이동이 통제되어 있었고, 생활방식이나 움직임 모두 도식화되어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진 속의 인물들은 모두 비슷한 동작과 포즈를 취하고 있고, 수영장의 모습도 자유로운 이동이 아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의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부박하게 말하면, 사회주의적 꼬뮌으로 각각의 생애와 일상이 연결되어 있었던 삶의 방식을 가장 동기화되고 집단적인 스포츠인 싱크로 수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무해해보인다. 고립되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동유럽적 귀여움은 서구적 개념의 귀여움과도 다소 차별화되는 지점으로,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미학 속에서 개인성이 절제되면서도 일정한 정서적 울림을 남기는 방식으로 보인다.


3. 둘 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말하지만, 일본인은 쇼와시대를, 슬로바키아인은 사회주의시대를 그리워한다.


카와지마 코지로와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 작업은 귀여움과 향수라는 테마를 앞세웠지만, 둘 다 두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즉, 어린 아이의 귀여움이란 어른의 향수인 것이다. 향수를 이야기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하고, 과거는 곧 귀여워서 맹목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던 시기이다. 포유류는 유년기가 길기 때문에 보호받아야할 어린 개체를 귀엽다고 느끼도록 프로그램되었다는 글도 읽은 적이 있다. 어리다는 것은 귀엽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 향수와 귀여움은 동행하는 것이다. 


카와지마 코지로는 일본적 카와이함을 통해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쇼와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사회주의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동유럽적 귀여움을,

사진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둘 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작업의 주요한 정서적 축으로 삼지만, 그 회귀의 방향성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란란전이 소환하는 과거는 일본의 쇼와시대, 즉 20세기 중반 폭발적 경제적 성장의 흐름 속에서 대중문화와 함께 형성된 독특한 레트로 감성에 가깝다. 작가의 작업 속 피사체는 당대의 얼굴이지만, 구도 색감 감성은 쇼와 시대 애니메이션, 잡지 광고, 영화 등의 시각적 언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쇼와시대에 대한 향수는 잃어버린 30년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도 읽힌다. 


심지어 작가는 타이완에 가서도 쇼와시대 일본인(지금은 할아버지가 된)의 얼굴형을 찾는 것 같다.



타이완에서 찍은 사진의 배경도 현대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이전의, 낡고, 빛바랜 느낌이다. (대만은 비가 많이 와서 외관이 낡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도 빛바랜 돌과 시멘트 계단 위에서 찍었다. 대만 배경의 건물도 일본처럼 비를 피하기 위한 아케이드가 있고, 폭이 좁고 너비가 긴 일본식의 수직형 건물이다.  (한자 간판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선 이런 공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마리아 스바르보바가 재현하는 과거는 동유럽 사회주의 시대의 집단적 기억이다. 전시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공 수영장과 무표정한 인물들은 체제적 규율과 통제의 흔적을 반영하면서도, 이를 폭력적이게 묘사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포장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모종의 이상향적 태도를 드러낸다.



4.

둘 다 3층 규모의 전시장이지만 그라운드서울은 중간을 뚫어 절벽 아래와 같은 공간감을 주었고, 석파정은 오밀조밀 배치했다.



공간과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시 공간의 설계 방식도 각각 추구하는 미학적 기조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라운드서울은 내부 공간을 수직적으로 개방하여, 관람자에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공간감을 제공한다. 성당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신성성을 경험하는 구조와는 달리, 전시자가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며 순간적인 권력감을 느끼도록 연출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하방식 개방 공간 연출은 협소한 주거 환경에서 사치스럽게 넓은 공간을 누릴 수 없는 1인 가구 젊은층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간 연출은 스바르보바의 사진 속 기하학적 질서 및 인공적 구성미와 조화를 이룬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 작업과 수영장을 오마주한 공간이 호응한다. 물이 없는 수영장을 보여주는 사진 작업과 실제로 물이 없는 수영장을 만들어놓은 공간이 호응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전 전시 뱅크시때보다 더 적절한 연출이다. 뱅크시보다 관객이 적었다면 그것은 한국사람들에게 동유럽, 러시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일 뿐이다.



5.

둘 다 브랜딩을 잘해서 마케팅적으로 성공적이고 인스타그래머블하지만, 사진의 본질에 대한 인사이트를 주는 전시는 아니다.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미적 소비의 대상으로서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런 인스타그래머블한 현대 사진 전시는 전시를 시각적 경험을 통한 감각적 쾌락의 수단으로 정의한 결과다.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결과에 정련되어 있는 선택들이 읽혀진다. 



그래서 두 전시에서는 어려운 전시 설명은 소략하고, SNS에 읽을만하게, 찍어서 올렸을 때 가독성 있는 한 문장 단위를 벽에 부각시키고 있다. 대부분 관람객을 타켓팅한 streetwise한 디자인 전략이다. (이 반대 측면에, 설명을 천천히 다 읽고 이해해야하는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들이다.)


두 전시 모두 감각적 요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시할까에 대한 고민이 깃들어 있다. 한편 서로의 문화적 뿌리와 형식적 구현 방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본적 귀여움이 레트로한 감성적 동경과 아이들의 놀이를 통한 유희성, 어른의 공간에 아이를 배치하면서 생기는 상황적 엉뚱함을 강조하는 반면, 동유럽적 미학은 동기화되고 차갑고 절제된 형태로 소실된 과거를 조망한다. 





이 사진이 귀엽게 느껴졌다면, 어른의 공간에 아이를 배치하면서 생기는 상황적 엉뚱함을 귀엽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감각도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6. 두 전시 모두 각자의 시각적 언어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가 현대의 감각적 소비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향유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 주파수의 폭을 넓혀 주는 전시는 아니다. 


사진 프레임 속 구도와 배치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전시는 뮤지엄 한미 삼청 아놀드 뉴먼사진전이다.


캡셜 설명에 "뉴먼은 긴 편집 테이블을 일종의 그래픽 요소로 활용하여 시선을 전경에서 후경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라고 되어있다.

He used the long editing table a a graphic element to guide the eye from the foreground to the background of the frame.


이런 설명은 사진을 다시 보고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글을 써야한다.


사진 속 많은 소품의 어수선한 배치는 "분주함"을 나타낸다. 대단히 훌륭하다.



사진에 대해 원래 큰 흥미가 없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초상화가 타격을 받은 정도, 업계 전환의 하나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새롭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존 버거의 책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사진의 이해. 글로 쓴 사진. 풍경들. 초상들... 하나하나 다 소장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다. 좋은 미술책은 대부분 열화당 출판사에서 나온다. 존 버거의 번역책은 다 샀다.


영어로 읽으니까 또 신세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문법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 - 현대 영어의 거장 제프리 풀럼이 쓴 영문법
제프리 풀럼 지음, 경규림 옮김 / 어떤책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에르 위그: 리미널, 현대미술 소장품

2025.02.27. – 2025.07.06.



1. 리움 전시는 7월까지여서 나중에 가려 했는데 에스더 쉬퍼 이전 개관 그룹전이 내일 마감이라 오늘 부랴부랴 일정에 구겨넣었다. 


독일계 화랑인 에스더쉬퍼는 원래 해방촌, 경리단길 근처에 있었고 작년에 토마쉬 크뤵취츠키Tomasz Kręcicki 같은 작가 보러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입지가 별로 안좋다고 생각했는지 한강진역 북쪽 윤세영식당 근처로 이전했다. 덕분에 bhak, 디스위켄드룸과 같이 방문하기에 좋은 포지션이 되었다.




2. 피에르 위그의 작품은 영국 가디언지 같은데 보면 이미 2014년에 화제가 되었다.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9/nov/29/pierre-huyghe-human-mask-fukushima


말하자면 11년전 작품이 이제 한국에 상륙했다.


외국의 좋은 인문학책이나 학부과정의 기본기를 쌓게 해주는 좋은 전공입문서가 30년 이후에야 번역되는 것에 비하면 빠른셈이다.


다만, 이미 유럽에서는 다 소화된 담론이 이제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경각심은 필요할 것 같다. 저 머나먼 옛적 1920년대에도 동아일보 같은데 보면 푸코 같은 유럽의 좋은 이론이 1년 안에 제깍제깍 번역되곤 했다. 최근 출판된 책에서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아인슈타인 이론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했다. 
















국제적으로 동기화되어서 동시대의 담론과 함께 호흡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3. 리움 피에르 위그는 전시 사진이나 설명만으로는 절대 그 현장의 아우라를 다 경험할 수 없다. 갔다 온 사람의 후기와 전시 설명을 대략 읽어보고 이게 뭐야 무슨 말이야 했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영화관에 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듯이 전시장에 가게 만드는 전시가 있다. 피에르 위그가 그렇다. 


들어가면서 암전 속에 눈이 익숙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사진 찍는게 별 의미가 없다.



4. 작품을 모르거나 대략적인 설명만 접하고 감상에 임하는 편이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된다. 


영상에서 소녀인줄 알았는데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가만히 보고 있다보니 원숭이라는 걸 손발을 통해 깨달았다. 눈 클로즈업을 통해 눈망울에서 사람이 원숭이 탈 쓰고 연기한게 아님을 깨닫는다.


휴먼 마스크 (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5. 눈 먼 물고기와 고생대 생물 2종의 움직임을 가만히 관찰한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Cambrian Explosion 16)

2018


주기적 딜레마(엘 디아 델 로호) (Circadian Dilemma (El Día del Ojo))

2017



6. 얼굴에 구멍난 나부가 황야를 걸어다니다가 갑자기 전류 맞은듯 발작하고 누워 땡깡 부리고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세계 끝 절벽에 서있다. 피아노 같이 생긴 조명장치 밑에서 간헐적으로 음악과 함께 드라이아이스 안개 은은한 조명이 아른거린다.


7. 사막에서 해골과 함께 기계가 알 수 없는 반복 동작을 한다.



이 작품은 설명과 함께 읽을 때 이해도가 더 깊어진다.



카마타 (Camata)

2024 – 현재


기계의 집합체가 / 아타카마 사막에서 무덤 없이 발견된 인간 해골에 대해 / 알 수 없는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A set of machines / seems to perform an unknown ritual, / on the unburied skeleton of a young man, found in the Atacama Desert in Chile.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건조한 사막으로, / 천문학자들이 외계 행성, 즉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행성을 / 연구하는 시험장이기도 합니다.

It is the oldest and driest desert on earth, / the testing ground of astronomers to study / exoplanets, i.e. planets that exist beyond our solar system.


이 의식은 

1) 결코 끝나지 않는 장례 의식이자, 2) 작업 극장이며, 3) 특정한 주체성의 학습과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The ritual performed by the machines appears at once as 1) an endless funeral rite, 2) an operating theater, and 3) the learning process and formation of a specific lifeless subjectivity.


영상은 / 선형성도,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적으로 / 자신의 편집을 수행하는 자기 제시입니다. 

The film is a self-presentation that endlessly edits itself, / without linearity, beginning or end. 


금색 구 안의 센서가 / 지속적으로 출력되는 이미지를 수정합니다.

Sensors located in the golden sphere / continuously generate changes in its editing.


이 수수께끼 같은 의식이 관람자 앞에서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동안, / 관람자는 / 서로 다른 현실들 사이의 거래, 신체 없는 존재에서 생명 없는 인간의 신체로의 / 전환을 목격합니다.

As the enigmatic ritual unfolds live in front of us, / we witness a transactional operation / between different realities, a passage between a bodiless entity and a lifeless human body.



8. 전시장을 나와 집에 돌아와 차분히 읽어야 무슨 말인지 알게끔 써있다.


작품 설명에서 확실한 것은

영상에서 기계가 수행하는 동작을 의식 혹은 의례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알 수가 없다. 수수께끼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하는데, 동일 동작의 반복이 아니라 자기 편집을 거쳐 수정하면서 하는 것이다. (일종의 나선형 모델)


위치는 칠레의 사막이지만, 연구자들이 태양계 밖의 행성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곳이다. (한국어에서는 칠레라는 말은 뺐다)


9.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면서, 신체없는 존재에서 생명없는 인간의 신체로서의 전환을 본다.


영어는 transactioanl operation between <   >, 즉, A and B라는 구조로 써있어서 직역하면 A와 B, 즉 다른 현실들가의 거래가 맞다. 그러나 여기서는 between A and B는 'A'에서 'B'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자연스럽다.


10. 신체 없는 존재는 무엇인가? 기계다. 기계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body가 없어서, bodiless이다. 그러나 존재라서 entity이다.

생명없는 인간의 몸 lifeless human body은 무엇인가? 해골이다.


그러니까 기계에서 해골로의 전환, 기계와 해골이라는 다른 현실 간의 상호작용을 관람객이 본다는 것이다.


11. 신체 없는 존재는 기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상 프로세스로 존재하는 개체 전반을 일컫을 것이다. 인공지능, 영상, 알고리즘, 데이터... 상영되는 영상은 센서를 통해 자기 편집하고 시작점과 끝점이 없는 비선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 기반 영상을 기계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리적 형태 없는 순수한 데이터와 알고리즘까지 신체 없는 존재의 의미역안에 포함될 것 같다.


생명 없는 인간의 몸은 명확하다. 옛날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제는 생명과 자율성을 잃어버린 해골을 가리킨다.


그러면 영상에서 기계는 해골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설명을 통해 이해한 바대로 알고리즘에서 해골로의 거래라고 했을 때 과여 무슨 의미인가? 기계가 해골에서 인간의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일까 해골에서 유기물을 재구성하려는 것일까? 아니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죽음, 유기체와 인공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의식을 수행하는 것일까?


또한 왜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를 배경으로 선택했을까? 그곳은 외계 행성을 연구하는 천문학 연구가 진행되는 매우 건조한 곳이다. 생명체가 살기 힘든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에서 천문학자가 인간 생명의 가능성을 찾듯, 기계 역시 같은 공간에서 인간의 유해를 통해 무언가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게끔 해준다.





12.


주드람 4 (Zoodram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 껍데기

이시카와 재단 소장


<주드람 4>은 자연적 생태계를 재현한 것도 아니고 세트장도 아닙니다. 조건들이 정해져 있으나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이 작품은 가서 수족관을 한 바퀴 돌아봐야지마 진가가 느껴진다. 빛의 굴절이 미묘하게 설정되어서 한 시야에 두 존재가 튀어나오게 보인다.


13. 그 다음은 현대품 소장전. 큰 감흥은 없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얀 보(Danh Vo)의 우리 국민은(부분) (we the people, detail), 2011-2013.



왜냐?


작품의 뒷면을 보는 것이 더 흥미롭기 때문




14. 알리기에로 보에티. 지도(mappa). 1983년. 천에 자수.


국가가 나오면 자연스레 한국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작품으 ㄴ다른데서 본 적 있는데 한국 국기가 북한 국기에 먹혀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한국 국기가 잘 그려져있는게 맞나? 직접 확인해보자




맞다. 태극만 남겼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관심있고, 하는 게 사람들과 달라서


전시든 책이든 영화든 음식이든 된장인지 똥인지 찍어먹어봐야한다.


15.






익히 잘 알려진 색면추상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무제(1968)와 한국 단색화의 대가 장욱진의 무제(1964)다.


함께 배열한 데에서 전시 기획 의도가 느껴진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비교해보라는 의중이 읽힌다.


작년 2024년 9월에 페이스 갤러리에서도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를 함께 전시했었다.


한국 단색화를 서구 색면추상는 형식적으로 유사해서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시각적 공통점을 지각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이 국제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탐색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미술작품은 각기 다른 전통과 맥락에 기반하고 있어, 서로 다른 철학적 사유와 역사적 맥락의 차이를 섬세하게 조명해봐야한다. 


우선 시각적 공통점과 국제적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자


두 작품의 시각적 비교는 한국 단색화의 독창성을 부각하는 데 기여한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회화는 감정적 몰입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강조하는 반면, 장욱진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 속에서 민화적 요소와 한국적 서정을 담아낸다. 로스코의 색면이 관람자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정신적 공간을 형성한다면, 장욱진의 회화는 조형적 절제 속에서도 삶의 본질적 요소를 담아내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우환과 로스코를 비교할 때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로스코의 작품이 색의 중첩과 대비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유도한다면, 이우환의 작업은 물질성과 수행성을 강조하며 여백과 관계항을 통해 존재론적 탐구를 시도한다. 한국 단색화가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지점에서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마크 로스코와 한국 근현대 작가를 병치함으로써, 한국 미술을 국제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 사람들은 로스코를 경유해 한국 단색화의 미학적 특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즈음 서구 모더니즘은 자율성과 형식적 실험에 몰두했던 바면, 한국 단색화는 동양 철학과 수행성을 바탕으로 고유한 미학을 구축했다. 이는 동서양 미술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 특히 서구 관객들에게 익숙한 모더니즘 개념을 통해 단색화의 철학과 조형 원리를 설명하면 한국 미술이 단순한 지역적 흐름이 아닌 세계적 맥락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우선, 한국 단색화의 본질적 맥락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서구의 색면 추상과 단색화는 캔버스 위의 단순성이라는 형식적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창작의 과정과 철학적 배경이 다르다. 예를 들어, 이우환의 관계항 개념은 화면과 작가, 공간과 물질 간의 긴장을 조율하는 동양적 사유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로스코의 감성적 색채 추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적 지평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비교는 한국 단색화를 서구 미술의 변형된 형태로 오인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한, 비교 대상의 균형을 신중히 설정해야 한다. 장욱진의 작품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특성을 반영하긴 하지만, 단색화만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모르는 서구 관객은 한국의 로스코라는 편의주의적 해석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장욱진, 이우환을 로스코(혹은 바넷 뉴먼)와 비교하는 것은 양자의 조형적 차이를 논의하는 데 의미는 있을지언정, 단색화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우환과 로스코의 비교에서도 색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표면적인 유사성을 넘어 창작 과정과 철학적 기반을 꼼꼼히 톺아보아야 한다.


한국 단색화를 서구 색면 추상과 비교해서 이해하는 것은 국제 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의 위치를 조명하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 단순 비교에서 이해를 멈추면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서구 관객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두 작품이 함께 배치된 것을 보고 단순한 형식적 비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정교한 해석과 논의가 요구된다. 단색화가 서구 미술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고유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맥락을 짚어나가는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 단색화의 철학적 기저(불교적 무념, 유교적 절제, 도교적 자연관 등등)와 물질성 및 수행성의 개념, 1950-60년대 구상회화에 대해 한 걸음 더 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단색화의 본질을 균형있게 유지하면서 국제적 담론 속에서 고유한 사상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6. 피에르 위그 기획전을 지나 현대미술 소장품전을 거쳐 고미술품전. 항상 들리지만, 일부는 교체되어 새 작품이다. 상설전시도 무시하지 말고 종종 들러야하는 이유다.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는 무사의 무구와 칼에 대한 별도의 세션이 있었다. 이데미츠, 세이카도 분코 등에서 사무라이의 칼만 가지고 단독 전시를 하고, 온갖 명칭, 온갖 제작자에 대한 정보 투성이였다.


그런 전시를 보고 와서 리움의 고미술품 전시를 보니

우리가 얼마나 우리 칼에 대해 홀대를 하고 있는지가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는 나와 우는 우는 - 장애와 사랑, 실패와 후회에 관한 끝말잇기
하은빈 지음 / 동녘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답을 찾는 교육에 길들여진 탓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풀이과정과 해답밖에 없는 문제에도 정답을 찾는데, 외국의 저명한 상이 대체제다. 오스카상, 프리츠커상, 노벨상, 그래미상 등등. 


중국의 두 번째 프리츠커상 리우지아쿤. 일본도 9명인데, 우리는 왜 프리츠커상을 못 받을까?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수상자의 건축물을 보면서 그 이유를 찾고자하지만 정작 특이하네, 예쁘네라는 휘발하는 감탄만 내뱉을 뿐이다.


우리나라 많은 신문들이 건축가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는 주지만 수상이유에 대한 심도깊은 분석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선, 한겨레, 한국 등을 읽어봤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뉴욕타임즈 같은 외신에서는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을지 않을까,


https://www.nytimes.com/2025/03/04/arts/design/chinese-architect-liu-jiakun-pritzker-prize.html


In 1984, he volunteered to temporarily relocate to Nagqu, Tibet — among the highest regions on Earth — because, “my major strength of the time seemed to be my fear of nothing, and, in addition, my painting and writing skills,” he said in statements provided by the Pritzker.


그의 이력 중 특이한 점은 84년부터 93년까지 티벳 신장 등을 돌아다녔고 소설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것이다. 건축가로 복귀한 이후에도 많은 책을 출판했고, 대표적인 저서는 2014년 명월구상(밝은 달의 구상, The Conception of Brightmoon)이다.


책을 반정도 읽고나서 왜 그가 프리츠커상을 타야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https://book.douban.com/subject/25863969/



건축가 스스로도 작문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의 책을 한 번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의 건축물에 구현된 세계관을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구해서 3장까지 읽어봤는데, 픽션적 인물 오양강산이라는 건축가가 명월도시라는 신도시를 만드는 소설이다. 건축물에 사람의 영혼을 구현해보겠다는 것으로, 그래서 온갖 사람들에 대한 인상과 묘사가 흥미롭다. 여행답사기와 건축일기를 문학적인 언어로 아름답게 쓴 글이었다. 목재 문제에 대한 담당자와 조율, 마을 사람과 대화, 지형과 문화에 대한 인상 등등


바이두의 설명에 의하면 강렬한 이상주의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https://baike.baidu.com/item/%E6%98%8E%E6%9C%88%E6%9E%84%E6%83%B3/13684187

《明月构想》是著名建筑师刘家琨创作的一部带有强烈理想主义气质的反乌托邦小说!


디스토피아 즉, 반유토피아라고 써있다. 反乌托邦. 그런 점도 있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만 읽지는 않았는데.. 아직 결론은 못 봐서 디스토피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무엇이 되었든 자기 스스로 읽고 경험해봐야지 남들의 평가는 부차적이다. 영화도 영화요약이나 평론을 보지 않은 채 직접 봐서 자기가 느껴야하고, 전시도, 책도, 음식도 그렇다. 음식 리뷰 사이트나 블로그 평가와 내 평가가 다른 점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맛없지는 않았는데.. 하면서.


인상 깊은 구절은 이 구절이었다. 문장 자체는 화려하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 문구에 트위스트가 있어 매우 문학적이고 철학적이 여운을 남긴다. 


正如政治、哲学,乃至数学,归根结底都是个性的产物一样,一个人的作品,无论怎样抽象怎样理念化,总会在某个地方酷似他本人——就像他本人会酷似某个地方 

정치, 철학, 나아가 수학까지 결국은 개인의 개성의 산물인 것처럼, 한 사람의 작품은 아무리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어도 결국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자 본인을 닮을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자신은 어딘가를 몹시 닮을 수 있다는 듯이.


마지막 문구 就像他本人会酷似某个地方 직역하면 마치 그 자신도 어떤 장소와 닮아 있는 것처럼

가 핵심적이다.

여기서 "某个地方"는 모종의 장소, 어딘가로 번역이 되는데, 특정한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사는 환경 문화적 배경이 될 수 있다.

즉, 사람 자체도 특정한 장소(환경, 사회문화적 배경)와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

쉽게 말해, 사람이 환경을 닮고, 그 사람이 만든 작품도 결국 그를 닮는다는 뜻.

그러니까
직역: 한 사람의 작품은 (아무리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어도) 결국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자 본인을 닮을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자신도 어떤 장소와 몹시 닮을 수 있는 듯이.


의역: 한 사람의 작품이 결국 작품의 창작자를 닮아버리는 것처럼, 그 사람 자체도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닮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자신이 나고 자란 배경과 닮아가는 것처럼, 창작자가 만든 작품도 본인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마지막 문구가 단어나 문법은 너무 쉬운데, 음미할 여지가 많다. "마치, 창작자 자신이 어딘가를 몹시 닮을 수 있다는 듯이."



명월구상 책 전체가 매우 유려한 중국어로 되어있다. 프리츠커상을 왜 탔나를 알아보려면 외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한다. 


건축물은 건축가 철학을 물성으로 구현한 것이다. 건축물만 있고 세계관이 없으면 앙꼬빠진 찐빵이다. 그가 티벳 신장을 10년 동안 방황했던 시간이 그의 세계를 조탁해준 것 같다. 소위 경단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돌아갈 자리가 있었을까? 21세기 중국에 태어났으면 그랬을 수 있었을까? 개혁개방 이후 건설붐의 시절에 힘입어서 우후죽순 들어서는 건축물 사이에 자신의 세계를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중요한 것은 언제 시절을 만날지 어떻게 시절을 만날지 알 수 없다는 것. 안될 때는 기다려야하고, 시간의 세례를 받아 자기를 조탁해나가야한다. 그 이후의 일은 운의 영역이다. 


때론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마 돈이 부어지면 원래 하던 일을 큰 스케일로 증폭하는 것이다. 책을 빌려보던 사람이 책을 사게 되고, 자그마하게 작품을 만들던 사람이 큰 캔버스로 아낌없이 물감을 쓸 수 있게 되고, 몇 억 단위의 소규모 건축을 하던 사람이 몇 백 몇 천억원짜리 프로젝트를 하게 되는 것.


브랜드 철학이 결여된 회사가 홀딩스, 파트너스 등 투자회사의 돈을 받아 일을 할 때 사회문화구조, 트렌드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단기영업이익을 위해 구태의연한 마케팅을 반복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왕카스테라, 탕후루 등 매년 흥했다가 없어지는 푸드 트렌드가 얼마나 많으며, 잠시 유명인 마케팅했다가 없어지는 상품이 얼마나 많은지.. 


한국사회에서는 상을 타면 정답이 되고, 상을 타지 못하면 장삼이사로 남을 뿐이다. 외국의 상을 성적우수상 같이 생각하는 것인데, 정작 외국에서는 퍼포먼스 하나로만 평가하지 않고 예술가의 작품세계 전반과 그의 철학을 들여다보는 편이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다. 만약 BTS가, 블랙핑크가, 장원영이, 인기도 있고 예술적 퍼포먼스도 잘하면서 동시에 글도 잘 쓴다면 외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세계 탑급 아티스트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상을 받았다' 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다. 권위는 외부에서 온다. 인정받았다에 집중한다. 상 받은 자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권위는 오래 가지 않는다. 누가 다른 상을 받거나, 시절이 지나가면 다 잊힌 일이 된다. 1990년 SBS 가요대전 수상, 1980년 청룡영화상 수상이 지금 효력이 없는 것과 같다.


외국인들은 상을 받게 된 이유, 철학, 세계,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책이 있으면 읽어보고 없으면 번역해서 읽어본다. 깊이, 안목, 인사이트 등에 감화가 되고 오래 지속된다. 펄펄 끓여 내지만 5분이면 식는 뚝배기냐, 초저녁에 한 번 지피면 밤새 가는 온돌이냐의 차이다. 그 정열은. 


매년 고은이 노벨상에 근접했다, 황석영이 노벨상에 근접했다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한국의 첫 번째 노벨상은 한강에게 돌아갔다. 단순히 여성인권만이 아닌, 몸, 젠더, 이데올로기 이분법에 대한 저항을 담은 페미니즘이 전세계적인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트렌드와 무관하지는 않다. 아무도 한강의 노벨상 예측을 점치지 않았었다. 민음사는 노벨상 예측 라이브에서 외국문학 담당 매니저만 있었다. 당연히 외국이 받을 것처럼.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누가 프리츠커상을 받는다면, 리우지아쿤처럼 경력단절 건축가 중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아파트 시공사 중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지금은 해외 유명 건축가 데려다가 그 네임밸류를 빌려서 시공해 분양가를 올리는 정책만 쓰고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프리츠커상을 받는다면 일단 확고한 철학이 있어야하고 책을 내야하고 그 세계가 구현된 건축물이 있어야할 것이다. 너무 쉽지 않은 일이다. 문학적 소양, 예술적 심미안, 건축주와 조율, 협상, 자재공수, 재무, 회계, 건축법 이 모두 한 사람이 함께 다루기에는 너무 어렵다. 팀이 있어야한다.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에 부족한 인프라와 재료로 건축물을 지어서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프리카인 본인이 자기가 나고 자란 땅과 사람들에 대한 기여로서 의미가 있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부족한 돈과 재료로 건축물을 짓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부모님이 선교사여서 그 나라에서 자랐다면 해비타트운동을 소환해서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담론에 대한 기여는 없어서, 그런 미니멀 전략은 쓸 수가 없다. 자신이 땅을 디디고 있는 사회의 대부분과 유리된 이야기다. 개발도상 단계였더 ㄴ70년대에는 가능했을지 모른다. 지금은 GDP 3만달러라 국격에 맞지 않고,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동떨어져있어서 안된다. 


프리츠커상을 받으려면? 두 가지 대안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우선적으로 프리츠커상을 제대로 정의해야한다. 외국에서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의 국격이 올라갔다, 네임밸류가 높아졌다, 이런 식의 부수적인 거품에 심취하면 안된다. 유명감독의 유명세가 부러워서 감독이 되더라도 우선은 원하지 않는 무명의 삶을 오래 살 것이고, 수많은 팬이 부러워서 음악가가 된다면 장기간의 연습 도중에 지칠 것이다. 부수적인 것을 다 뺀 프리츠커상 자체의 의미는 건축을 통한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비단 상징뿐 아닌 솔루션으로서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건축 세계 구현이고 건축을 애정하고 건축이 삶의 전부인 큰 공동체에 대한 전반에 대한 기여이다. 그렇다면 건축에 이르는 그 험난한 과정을 즐겨야한다. 


우선, 내 생각에는 지방소멸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노노돌봄노동과 마을만들기와 외국노동자와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글을 쓰고, 주민센터 건축을 통해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가장 실현가능한 일이다. 영어로 치면 the most feasible. 그러나 경쟁자가 많고, 일본에 그런 지방소멸 고민하는 건축가가 많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온갖 행정문제, 정치문제를 어떻게 우회할 것인지...


또 하나의 길은, 언젠가 통일이 되어서 북한건축이 된다면,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 탈북자의 사회적 위치, 남북갈등 못지 않은 북북갈등, 동유럽 사회주의 건축이 그 이후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등 온갖 것을 고민해야한다. 이 길은 정말 쉽지 않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 다음 듀크대학출판부 도서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