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위그: 리미널, 현대미술 소장품

2025.02.27. – 2025.07.06.



1. 리움 전시는 7월까지여서 나중에 가려 했는데 에스더 쉬퍼 이전 개관 그룹전이 내일 마감이라 오늘 부랴부랴 일정에 구겨넣었다. 


독일계 화랑인 에스더쉬퍼는 원래 해방촌, 경리단길 근처에 있었고 작년에 토마쉬 크뤵취츠키Tomasz Kręcicki 같은 작가 보러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입지가 별로 안좋다고 생각했는지 한강진역 북쪽 윤세영식당 근처로 이전했다. 덕분에 bhak, 디스위켄드룸과 같이 방문하기에 좋은 포지션이 되었다.




2. 피에르 위그의 작품은 영국 가디언지 같은데 보면 이미 2014년에 화제가 되었다.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9/nov/29/pierre-huyghe-human-mask-fukushima


말하자면 11년전 작품이 이제 한국에 상륙했다.


외국의 좋은 인문학책이나 학부과정의 기본기를 쌓게 해주는 좋은 전공입문서가 30년 이후에야 번역되는 것에 비하면 빠른셈이다.


다만, 이미 유럽에서는 다 소화된 담론이 이제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경각심은 필요할 것 같다. 저 머나먼 옛적 1920년대에도 동아일보 같은데 보면 푸코 같은 유럽의 좋은 이론이 1년 안에 제깍제깍 번역되곤 했다. 최근 출판된 책에서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아인슈타인 이론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고 했다. 
















국제적으로 동기화되어서 동시대의 담론과 함께 호흡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3. 리움 피에르 위그는 전시 사진이나 설명만으로는 절대 그 현장의 아우라를 다 경험할 수 없다. 갔다 온 사람의 후기와 전시 설명을 대략 읽어보고 이게 뭐야 무슨 말이야 했다. 누구라도 그럴 거다. 영화관에 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듯이 전시장에 가게 만드는 전시가 있다. 피에르 위그가 그렇다. 


들어가면서 암전 속에 눈이 익숙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사진 찍는게 별 의미가 없다.



4. 작품을 모르거나 대략적인 설명만 접하고 감상에 임하는 편이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된다. 


영상에서 소녀인줄 알았는데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가만히 보고 있다보니 원숭이라는 걸 손발을 통해 깨달았다. 눈 클로즈업을 통해 눈망울에서 사람이 원숭이 탈 쓰고 연기한게 아님을 깨닫는다.


휴먼 마스크 (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5. 눈 먼 물고기와 고생대 생물 2종의 움직임을 가만히 관찰한다.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Cambrian Explosion 16)

2018


주기적 딜레마(엘 디아 델 로호) (Circadian Dilemma (El Día del Ojo))

2017



6. 얼굴에 구멍난 나부가 황야를 걸어다니다가 갑자기 전류 맞은듯 발작하고 누워 땡깡 부리고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세계 끝 절벽에 서있다. 피아노 같이 생긴 조명장치 밑에서 간헐적으로 음악과 함께 드라이아이스 안개 은은한 조명이 아른거린다.


7. 사막에서 해골과 함께 기계가 알 수 없는 반복 동작을 한다.



이 작품은 설명과 함께 읽을 때 이해도가 더 깊어진다.



카마타 (Camata)

2024 – 현재


기계의 집합체가 / 아타카마 사막에서 무덤 없이 발견된 인간 해골에 대해 / 알 수 없는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A set of machines / seems to perform an unknown ritual, / on the unburied skeleton of a young man, found in the Atacama Desert in Chile.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건조한 사막으로, / 천문학자들이 외계 행성, 즉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행성을 / 연구하는 시험장이기도 합니다.

It is the oldest and driest desert on earth, / the testing ground of astronomers to study / exoplanets, i.e. planets that exist beyond our solar system.


이 의식은 

1) 결코 끝나지 않는 장례 의식이자, 2) 작업 극장이며, 3) 특정한 주체성의 학습과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The ritual performed by the machines appears at once as 1) an endless funeral rite, 2) an operating theater, and 3) the learning process and formation of a specific lifeless subjectivity.


영상은 / 선형성도, 시작도, 끝도 없이 영구적으로 / 자신의 편집을 수행하는 자기 제시입니다. 

The film is a self-presentation that endlessly edits itself, / without linearity, beginning or end. 


금색 구 안의 센서가 / 지속적으로 출력되는 이미지를 수정합니다.

Sensors located in the golden sphere / continuously generate changes in its editing.


이 수수께끼 같은 의식이 관람자 앞에서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동안, / 관람자는 / 서로 다른 현실들 사이의 거래, 신체 없는 존재에서 생명 없는 인간의 신체로의 / 전환을 목격합니다.

As the enigmatic ritual unfolds live in front of us, / we witness a transactional operation / between different realities, a passage between a bodiless entity and a lifeless human body.



8. 전시장을 나와 집에 돌아와 차분히 읽어야 무슨 말인지 알게끔 써있다.


작품 설명에서 확실한 것은

영상에서 기계가 수행하는 동작을 의식 혹은 의례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알 수가 없다. 수수께끼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하는데, 동일 동작의 반복이 아니라 자기 편집을 거쳐 수정하면서 하는 것이다. (일종의 나선형 모델)


위치는 칠레의 사막이지만, 연구자들이 태양계 밖의 행성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곳이다. (한국어에서는 칠레라는 말은 뺐다)


9.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면서, 신체없는 존재에서 생명없는 인간의 신체로서의 전환을 본다.


영어는 transactioanl operation between <   >, 즉, A and B라는 구조로 써있어서 직역하면 A와 B, 즉 다른 현실들가의 거래가 맞다. 그러나 여기서는 between A and B는 'A'에서 'B'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자연스럽다.


10. 신체 없는 존재는 무엇인가? 기계다. 기계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body가 없어서, bodiless이다. 그러나 존재라서 entity이다.

생명없는 인간의 몸 lifeless human body은 무엇인가? 해골이다.


그러니까 기계에서 해골로의 전환, 기계와 해골이라는 다른 현실 간의 상호작용을 관람객이 본다는 것이다.


11. 신체 없는 존재는 기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상 프로세스로 존재하는 개체 전반을 일컫을 것이다. 인공지능, 영상, 알고리즘, 데이터... 상영되는 영상은 센서를 통해 자기 편집하고 시작점과 끝점이 없는 비선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 기반 영상을 기계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리적 형태 없는 순수한 데이터와 알고리즘까지 신체 없는 존재의 의미역안에 포함될 것 같다.


생명 없는 인간의 몸은 명확하다. 옛날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제는 생명과 자율성을 잃어버린 해골을 가리킨다.


그러면 영상에서 기계는 해골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설명을 통해 이해한 바대로 알고리즘에서 해골로의 거래라고 했을 때 과여 무슨 의미인가? 기계가 해골에서 인간의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일까 해골에서 유기물을 재구성하려는 것일까? 아니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죽음, 유기체와 인공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의식을 수행하는 것일까?


또한 왜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를 배경으로 선택했을까? 그곳은 외계 행성을 연구하는 천문학 연구가 진행되는 매우 건조한 곳이다. 생명체가 살기 힘든 척박하고 고립된 환경에서 천문학자가 인간 생명의 가능성을 찾듯, 기계 역시 같은 공간에서 인간의 유해를 통해 무언가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게끔 해준다.





12.


주드람 4 (Zoodram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 껍데기

이시카와 재단 소장


<주드람 4>은 자연적 생태계를 재현한 것도 아니고 세트장도 아닙니다. 조건들이 정해져 있으나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이 작품은 가서 수족관을 한 바퀴 돌아봐야지마 진가가 느껴진다. 빛의 굴절이 미묘하게 설정되어서 한 시야에 두 존재가 튀어나오게 보인다.


13. 그 다음은 현대품 소장전. 큰 감흥은 없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얀 보(Danh Vo)의 우리 국민은(부분) (we the people, detail), 2011-2013.



왜냐?


작품의 뒷면을 보는 것이 더 흥미롭기 때문




14. 알리기에로 보에티. 지도(mappa). 1983년. 천에 자수.


국가가 나오면 자연스레 한국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작품으 ㄴ다른데서 본 적 있는데 한국 국기가 북한 국기에 먹혀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한국 국기가 잘 그려져있는게 맞나? 직접 확인해보자




맞다. 태극만 남겼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관심있고, 하는 게 사람들과 달라서


전시든 책이든 영화든 음식이든 된장인지 똥인지 찍어먹어봐야한다.


15.






익히 잘 알려진 색면추상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무제(1968)와 한국 단색화의 대가 장욱진의 무제(1964)다.


함께 배열한 데에서 전시 기획 의도가 느껴진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비교해보라는 의중이 읽힌다.


작년 2024년 9월에 페이스 갤러리에서도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를 함께 전시했었다.


한국 단색화를 서구 색면추상는 형식적으로 유사해서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시각적 공통점을 지각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이 국제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탐색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미술작품은 각기 다른 전통과 맥락에 기반하고 있어, 서로 다른 철학적 사유와 역사적 맥락의 차이를 섬세하게 조명해봐야한다. 


우선 시각적 공통점과 국제적 맥락에 대해 생각해보자


두 작품의 시각적 비교는 한국 단색화의 독창성을 부각하는 데 기여한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회화는 감정적 몰입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강조하는 반면, 장욱진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 속에서 민화적 요소와 한국적 서정을 담아낸다. 로스코의 색면이 관람자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정신적 공간을 형성한다면, 장욱진의 회화는 조형적 절제 속에서도 삶의 본질적 요소를 담아내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우환과 로스코를 비교할 때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로스코의 작품이 색의 중첩과 대비를 통해 강렬한 감정을 유도한다면, 이우환의 작업은 물질성과 수행성을 강조하며 여백과 관계항을 통해 존재론적 탐구를 시도한다. 한국 단색화가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지점에서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마크 로스코와 한국 근현대 작가를 병치함으로써, 한국 미술을 국제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 사람들은 로스코를 경유해 한국 단색화의 미학적 특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즈음 서구 모더니즘은 자율성과 형식적 실험에 몰두했던 바면, 한국 단색화는 동양 철학과 수행성을 바탕으로 고유한 미학을 구축했다. 이는 동서양 미술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 특히 서구 관객들에게 익숙한 모더니즘 개념을 통해 단색화의 철학과 조형 원리를 설명하면 한국 미술이 단순한 지역적 흐름이 아닌 세계적 맥락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우선, 한국 단색화의 본질적 맥락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서구의 색면 추상과 단색화는 캔버스 위의 단순성이라는 형식적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창작의 과정과 철학적 배경이 다르다. 예를 들어, 이우환의 관계항 개념은 화면과 작가, 공간과 물질 간의 긴장을 조율하는 동양적 사유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로스코의 감성적 색채 추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적 지평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비교는 한국 단색화를 서구 미술의 변형된 형태로 오인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한, 비교 대상의 균형을 신중히 설정해야 한다. 장욱진의 작품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특성을 반영하긴 하지만, 단색화만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모르는 서구 관객은 한국의 로스코라는 편의주의적 해석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장욱진, 이우환을 로스코(혹은 바넷 뉴먼)와 비교하는 것은 양자의 조형적 차이를 논의하는 데 의미는 있을지언정, 단색화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우환과 로스코의 비교에서도 색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표면적인 유사성을 넘어 창작 과정과 철학적 기반을 꼼꼼히 톺아보아야 한다.


한국 단색화를 서구 색면 추상과 비교해서 이해하는 것은 국제 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의 위치를 조명하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 단순 비교에서 이해를 멈추면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서구 관객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두 작품이 함께 배치된 것을 보고 단순한 형식적 비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정교한 해석과 논의가 요구된다. 단색화가 서구 미술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고유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는지, 맥락을 짚어나가는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 단색화의 철학적 기저(불교적 무념, 유교적 절제, 도교적 자연관 등등)와 물질성 및 수행성의 개념, 1950-60년대 구상회화에 대해 한 걸음 더 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단색화의 본질을 균형있게 유지하면서 국제적 담론 속에서 고유한 사상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6. 피에르 위그 기획전을 지나 현대미술 소장품전을 거쳐 고미술품전. 항상 들리지만, 일부는 교체되어 새 작품이다. 상설전시도 무시하지 말고 종종 들러야하는 이유다.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는 무사의 무구와 칼에 대한 별도의 세션이 있었다. 이데미츠, 세이카도 분코 등에서 사무라이의 칼만 가지고 단독 전시를 하고, 온갖 명칭, 온갖 제작자에 대한 정보 투성이였다.


그런 전시를 보고 와서 리움의 고미술품 전시를 보니

우리가 얼마나 우리 칼에 대해 홀대를 하고 있는지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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