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Complete Unknown
James Mangold, 2024
1. 티모시 샬라메가 밥 딜런 역할을 맡은 뮤지컬 전기 드라마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그가 무려 다섯 해에 걸쳐 밥 딜런의 말투, 노래 스타일, 걸음걸이를 몸에 익힌 끝에 빚어낸 결실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소년 톰 쿠퍼의 애잔한 눈빛 연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 펄먼이 짓던 그 미묘한 표정 연기가 언뜻 언뜻 새어 나온다. 이 모든 것이 티모시 샬라메만의 색채다.
피트 시거를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은 문라이즈 킹덤이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보여주던 익숙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특히 팔자주름이 코마루를 넘을 듯 올라가는 표정은 놀랍다. 마치 표정 변화의 테크니션이라고 할 정도로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자유자재로 조율하는 능숙한 배우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만 역의 댄 포글러는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에서 제이콥 코왈스키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왠지 그 여운이 깊었던 탓인지, 이번 작품에서도 코왈스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겹쳐 보이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eP4FFr88SQ
1964년 밥 딜런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티모시 샬라메가 이 영상의 매 초를 얼마나 잘 살렸는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이정도면 밥 딜런 골수팬들의 마음에 조금 들지 않았을까?
2. 악뮤
https://youtu.be/L6bPSUlvm5Y?si=jqd8hN8TlzQTWEy-

악뮤는 예능 프로그램 아는형님에서 교과서 한 페이지를 즉석에서 곡으로 엮어내며 신묘한 창작력을 증명한 바 있다. 애드립으로 작곡한 묵은실 잠자리는 한때 크게 화제가 되었다. 밥 딜런이 실비네집에서 조안과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노래를 할 때와 조안 바에즈네 집에서 밤에 작곡할 때, 이 두 장면에서 악뮤가 겹쳐보였다. 창작의 신은 아무 때나 밥 딜런을 찾아왔을 것이고 그는 그 신에게 응답했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길을 고집하고 자신이 원하는 음악 세 곡을 관철하고 관중들의 환호를 끌어냈을 때, 조안은 “네가 이겼어.”라고 말했지만, 딜런은 담담하게 “누굴 이겼지?”라고 되묻는다. 조안이 품었을지 모를 질투와 경쟁심은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오직 자신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는 조안과 중국 식당에서 대화에서 처럼, 안 굶는 뮤지션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번역은 a musician who eats라는 대사에서 관계사의 계속적 용법을 잘 의역했다. "먹는 뮤지션"이 아니고, "뮤지션, 먹는"이고 이를 더 반의어로 잘 다듬어서 "뮤지션, 안 굶는"이라고 한 것이다.
연인의 애착과 속박을 바라는 마음이라면, 밥 딜런 같은 남자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는 마치 자석처럼 연인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떠나버리는 자유분방함. 새벽 4시든 그림을 그리고 있든, 집 주소를 몰라 아무 방이나 두드려대기도 하면서 상대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는 점. 타인의 감정에 관심없고 자신의 내적 흐름에 충실한 밥 딜런의 성향. 가는 사람 막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알 쿠퍼 같은 경우) 그의 태도. 그래서 실비에게 “가지 마.”라고 읊조릴 때, 밥 딜런이 할 법한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강력한 한 마디였다. 포크 음악의 틀을 강요받고, 자기가 원하는 음악이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에게는 누군가의 존재가 절실했을 것이다. "stay"는 온전히 기대고 싶은 순간을 대변한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의 선택과는 다르다. 밥 딜런은 마음의 의지처로서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두려움을 스스로 삼킨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관철시켰다.
조안의 질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마도 처음부터 맹아가 있었을 것이다. 데뷔 무대를 처음 들었을 때, 나가려던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천재성을 직감했지만, 일이니까, 업무상 듀엣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변했다. 데뷔는 자신이 더 빨랐건만, 더 많은 관객이 그의 노래에 열광했고, 정작 자신은 그의 곡을 커버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prolific하다고 할 정도로 풍부한 창작력, 거침없는 작사작곡, 대중의 열광적 환호, 타고난 개인적 매력,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아마 그녀의 질투는 이 모든 것의 총합이었을 것이다.
3.

https://youtu.be/Zbo7UY8dxh8?si=umwj-rOdaB0dMO2o
밥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주최 측이 바라는 대로 따라줄 수도 있었다. 원하는대로 해주면 번거로운 일은 없다. 업무상 협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밥 딜런은 그러지 않았다. 왜? 소위 삔또를 상하게 하는 말 때문이다. 누가 포크 음악을 정의하는가? 누가 ‘올바른 방향’을 정하는가? 우리가 알던 그 전통적인 포크 뮤직해달라고, 관중들도 원하잖아. 이런 말들에 저항한 것이다.
밥 딜런 같은 저항정신의 현현들은 언제나 저항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처음 그는 국가와 정부와 시대에 반기를 들었고, 마찬가지로 국가와 정부와 시대에 저항하던 대중과 함께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도 쿠바 미사일 위기, 핵 군축, 민권 운동같은 시대적 흐름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중반 이후, 그런 시대상은 등장하지 않고 개인 서사에 초점을 맞춘다. 밥 딜런은 새로운 적과 맞선다. 바로 ‘대중’ 그 자체. 자신을 불러대고 무언가를 원하고 자기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부각된다. 딜런은 자신을 규정하려는 사람들, 포크 음악이 이렇다, 전통이 저렇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포크 음악은 이래야한다라며 당위성의 프레임을 씌우려는 이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반발했다. 안 따라준 것이다. 업무상 협조를 안해준 것이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최근 국악소녀로 유명세를 얻어왔던 송소희가 국악을 발판 삼아 북유럽 프로듀서와 손을 맞잡고 자신만의 음악을 새롭게 빚어가기 시작했다. 국악중, 국악고를 거쳐 내려오는 전통의 틀 속에서, 선생의 기교를 같은 구간에서 판박이처럼 따라 부르며 좋은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 추측컨대 폐쇄적인 국악계 내부에서는 송소희를 향한 온갖 수군거림이 있었을 터다. 절대 좋은 말 듣지 않았을 것이다. 일탈이라고 했을 것이다. 온갖 회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해야한다. 조금만 참아라. 나중에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하지만 묻는다. ‘무엇이 국악인가?’ ‘무엇이 포크 음악인가?’
처음에 포크 뮤직을 좋아하던 이들은 환경과 기후와 저항과 히피, 반국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시대가 변하며 이들 또한 과거 어느 세대가 된다. 밥 딜런이 계속 음악을 하는 이상 포크 뮤직을 감상하는 다른 형태의 대중이 또 생긴다. 그가 발굴하고 그가 길들였다고 볼 수도 있다. 밥 딜런의 저항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세상이다. 과거 그를 지지하던 이들은 또한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국악인가? 국악과 전통을 지켜온 이들의 것인가? 아니면 시대와 함께 숨 쉬며 사람들(民)의 곁에서 노래하는 것이 국악인가?
피트 시거와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임종 이후에야 비로소 만났고, 조안 바에즈는 33여개의 앨범을 내며 활동했다. 그냥 각자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을 갔고, 각자 자기의 팬층을 구축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포크(대중)와 만나는 포크 음악을 한 것이리라. 누구도 포크를 규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