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22-25.03.09] 마리아 스바르보바 : 어제의 미래
[25.02.26-25.10.12] 카와시마 코토리 개인전 - 사란란
1.
사란란은 일본인 작가가 한국어의 사랑과 사람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껴 나름 제목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체코-슬로베키아 사람이다.
일본 전시가 귀여움, 동유럽 전시가 향수를 말하지만, 두 테마는 사실 연결된 것이다. 귀여움을 이야기하면서 향수를 말해야하고, 향수를 말하면 귀여움을 말해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여움의 구현대상인 어린아이가 어른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귀여운 어린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귀여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일부분 결합된 감정이다.


2. 둘 다 귀엽고 예쁜 아이를 카메라에 담았지만, 일본인과 동유럽인이 생각하는 귀여움이 다르다.




사란란전에서 카와이 미학에 뿌리를 둔 일본적 귀여움이 보인다. 작고 앙증맞은 요소들. 동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성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적 장치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전시를 보러와서, 자신들이 아닌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다. 아마 아이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카와이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동유럽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현대적 미니멀리즘을 결합하여, 정제된 색감과 절제된 표정을 통해 차가운 귀여움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시대에는 개인의 이동이 통제되어 있었고, 생활방식이나 움직임 모두 도식화되어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진 속의 인물들은 모두 비슷한 동작과 포즈를 취하고 있고, 수영장의 모습도 자유로운 이동이 아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의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부박하게 말하면, 사회주의적 꼬뮌으로 각각의 생애와 일상이 연결되어 있었던 삶의 방식을 가장 동기화되고 집단적인 스포츠인 싱크로 수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무해해보인다. 고립되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동유럽적 귀여움은 서구적 개념의 귀여움과도 다소 차별화되는 지점으로,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미학 속에서 개인성이 절제되면서도 일정한 정서적 울림을 남기는 방식으로 보인다.
3. 둘 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말하지만, 일본인은 쇼와시대를, 슬로바키아인은 사회주의시대를 그리워한다.
카와지마 코지로와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 작업은 귀여움과 향수라는 테마를 앞세웠지만, 둘 다 두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즉, 어린 아이의 귀여움이란 어른의 향수인 것이다. 향수를 이야기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하고, 과거는 곧 귀여워서 맹목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던 시기이다. 포유류는 유년기가 길기 때문에 보호받아야할 어린 개체를 귀엽다고 느끼도록 프로그램되었다는 글도 읽은 적이 있다. 어리다는 것은 귀엽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 향수와 귀여움은 동행하는 것이다.
카와지마 코지로는 일본적 카와이함을 통해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쇼와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와 사회주의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동유럽적 귀여움을,
사진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둘 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작업의 주요한 정서적 축으로 삼지만, 그 회귀의 방향성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란란전이 소환하는 과거는 일본의 쇼와시대, 즉 20세기 중반 폭발적 경제적 성장의 흐름 속에서 대중문화와 함께 형성된 독특한 레트로 감성에 가깝다. 작가의 작업 속 피사체는 당대의 얼굴이지만, 구도 색감 감성은 쇼와 시대 애니메이션, 잡지 광고, 영화 등의 시각적 언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쇼와시대에 대한 향수는 잃어버린 30년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도 읽힌다.
심지어 작가는 타이완에 가서도 쇼와시대 일본인(지금은 할아버지가 된)의 얼굴형을 찾는 것 같다.

타이완에서 찍은 사진의 배경도 현대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이전의, 낡고, 빛바랜 느낌이다. (대만은 비가 많이 와서 외관이 낡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도 빛바랜 돌과 시멘트 계단 위에서 찍었다. 대만 배경의 건물도 일본처럼 비를 피하기 위한 아케이드가 있고, 폭이 좁고 너비가 긴 일본식의 수직형 건물이다. (한자 간판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선 이런 공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마리아 스바르보바가 재현하는 과거는 동유럽 사회주의 시대의 집단적 기억이다. 전시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공 수영장과 무표정한 인물들은 체제적 규율과 통제의 흔적을 반영하면서도, 이를 폭력적이게 묘사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포장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모종의 이상향적 태도를 드러낸다.

4.
둘 다 3층 규모의 전시장이지만 그라운드서울은 중간을 뚫어 절벽 아래와 같은 공간감을 주었고, 석파정은 오밀조밀 배치했다.

공간과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시 공간의 설계 방식도 각각 추구하는 미학적 기조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라운드서울은 내부 공간을 수직적으로 개방하여, 관람자에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공간감을 제공한다. 성당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신성성을 경험하는 구조와는 달리, 전시자가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며 순간적인 권력감을 느끼도록 연출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하방식 개방 공간 연출은 협소한 주거 환경에서 사치스럽게 넓은 공간을 누릴 수 없는 1인 가구 젊은층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간 연출은 스바르보바의 사진 속 기하학적 질서 및 인공적 구성미와 조화를 이룬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 작업과 수영장을 오마주한 공간이 호응한다. 물이 없는 수영장을 보여주는 사진 작업과 실제로 물이 없는 수영장을 만들어놓은 공간이 호응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전 전시 뱅크시때보다 더 적절한 연출이다. 뱅크시보다 관객이 적었다면 그것은 한국사람들에게 동유럽, 러시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일 뿐이다.
5.
둘 다 브랜딩을 잘해서 마케팅적으로 성공적이고 인스타그래머블하지만, 사진의 본질에 대한 인사이트를 주는 전시는 아니다.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미적 소비의 대상으로서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런 인스타그래머블한 현대 사진 전시는 전시를 시각적 경험을 통한 감각적 쾌락의 수단으로 정의한 결과다.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결과에 정련되어 있는 선택들이 읽혀진다.


그래서 두 전시에서는 어려운 전시 설명은 소략하고, SNS에 읽을만하게, 찍어서 올렸을 때 가독성 있는 한 문장 단위를 벽에 부각시키고 있다. 대부분 관람객을 타켓팅한 streetwise한 디자인 전략이다. (이 반대 측면에, 설명을 천천히 다 읽고 이해해야하는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들이다.)
두 전시 모두 감각적 요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시할까에 대한 고민이 깃들어 있다. 한편 서로의 문화적 뿌리와 형식적 구현 방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본적 귀여움이 레트로한 감성적 동경과 아이들의 놀이를 통한 유희성, 어른의 공간에 아이를 배치하면서 생기는 상황적 엉뚱함을 강조하는 반면, 동유럽적 미학은 동기화되고 차갑고 절제된 형태로 소실된 과거를 조망한다.

이 사진이 귀엽게 느껴졌다면, 어른의 공간에 아이를 배치하면서 생기는 상황적 엉뚱함을 귀엽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감각도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6. 두 전시 모두 각자의 시각적 언어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가 현대의 감각적 소비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향유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적 주파수의 폭을 넓혀 주는 전시는 아니다.
사진 프레임 속 구도와 배치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전시는 뮤지엄 한미 삼청 아놀드 뉴먼사진전이다.

캡셜 설명에 "뉴먼은 긴 편집 테이블을 일종의 그래픽 요소로 활용하여 시선을 전경에서 후경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라고 되어있다.
He used the long editing table a a graphic element to guide the eye from the foreground to the background of the frame.
이런 설명은 사진을 다시 보고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글을 써야한다.
사진 속 많은 소품의 어수선한 배치는 "분주함"을 나타낸다. 대단히 훌륭하다.

사진에 대해 원래 큰 흥미가 없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초상화가 타격을 받은 정도, 업계 전환의 하나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새롭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존 버거의 책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사진의 이해. 글로 쓴 사진. 풍경들. 초상들... 하나하나 다 소장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다. 좋은 미술책은 대부분 열화당 출판사에서 나온다. 존 버거의 번역책은 다 샀다.
영어로 읽으니까 또 신세계다.